"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2. 나의 마지막 연인 (2)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 2화. 나의 마지막 연인 (2)

[에피소드를 감상하신 후에는 댓글을 등록순으로 바꾸어, 제가 남긴 댓글을 확인해주세요:)🐣]



인사가 마무리된 후에는, 식물원 안쪽에 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였다.

조심스레 들어선 이곳은, 방금까지 느껴졌던 습한 공기와 다르게 제법 따뜻한 온도가 갖춰져 포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전정국과 나는 나란히 자리에 앉아,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 가방만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서류를 꺼내는데··· 꺼내는 소리조차 다 들릴 정도로 고요하더라.

내가 말을 못하고 있자, 옆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정국이에 드디어 정적이 깨졌다. 내심 고맙기도 한 반면에 내 나름대로 민망했던 건 뭐냐면…


"보내주신 메일로 간단한 설명은 읽었습니다만,"



박지민
정확한 대관 날짜를 묻고 싶네요.


전정국도 박지민이 내 전 남자친구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

박지민도 전정국을 아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내가 사적인 생각에 빠져들 때 즈음, 전정국이 나를 대신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정국
다음 주 토요일입니다.


전정국
아직 회사 측에서 확정된 건 아니라서, 최종적으로 합의되면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맴도는 공기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그렇게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한 것도, 서로의 눈빛에서 적대감이 드러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국의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두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 채, 5초가 지났을까. 아까 전 나를 반겨주었을 때와 비슷한 미소를 머금는 그였다.


박지민
따로 여쭤보실 사항은 없으신가요?


한사라
…….

마치 얼음이 되었다가, 땡 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뒤늦게 정신을 되찾았다. 그 와중에 땀이 나는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리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한사라
참석 인원이 100명 가까이 되는데, 전원이 앉을 수 있는 좌석 같은 게 있을까요?

기업 임원분들이 참석하시는 자리라, 공간이 넓을수록 좋을 것 같아서요. 긴장되는 탓에 자꾸만 손을 매만지는 사라였다.


박지민
자리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박지민
2층은 행사 전용으로 쓰이는 중이기도 하고요.

테이블 위의 모니터를 몇 번의 마우스 클릭으로 빤히 들여다보던 그가 말했다.


박지민
다행히도… 다음 주 토요일은, 가능합니다.


한사라
가능하다면, 2층도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긍정의 표시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겠다, 바로 둘러보려던 참이었는데…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고민하다 결국에는 정국에게 말했고.


한사라
…내가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너 먼저 식당 가 있어.

지금 이 서먹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3자가 봐도… 지금 우리 셋의 관계는 좀 이상하거든.


전정국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아까 이 근처에 식당 많던데 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지민이가 보는 앞이라 최대한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던 사라가 정국에게 속삭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지민은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주었고.


그렇게 이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어두운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내려 하는 정국임을 눈치챈 사라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한사라
문자 남겨놔. 조금 둘러보다가 바로 갈게.

혹시나 지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까, 부담스러웠던 사라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사라는 이내 문을 열고서 이곳을 나섰다.






···



그의 발길을 따라 조심스레 2층으로 들어서면, 1층의 무성하게 자란 식물들로 장식된 공간과는 또 다르게 몇 개의 화분만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조금 더 걸어가면, 눈 앞에 펼쳐지는-


완전히 다른 공간.


한사라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아늑한 느낌을 풍기던 1층과는 달리,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이 공간이 어쩌면 처음부터 마음에 와닿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한사라
사진 좀 찍어가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단번에 허락을 받아, 팀장님에게 보여드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기념식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표현하자면, 차만 굴러다니기 바쁜 도심 속에서 잠깐의 평화로운 일탈을 도와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것도 잠시 옆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시선에, 부담스러워서 머지않아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넣으며 애꿎은 입술만 다물게 됐지만.


한사라
…아, 이제 다 됐어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정해진 대사만 뱉는 나도 참, 한심하긴 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전 애인 앞에서.


한사라
그럼,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박지민
오랜만이네요, 우리.


날 보고 있던 낯익은 시선의 이유가 이 한 마디였나 보다. 그도 이 말을 꺼내기까지 꽤 오랜 고민을 거쳤다는 말이겠지.


한사라
…….

마냥 그의 시선을 피하기만 하던 나도, 어렵사리 돌아섰다. 그를 바라 보는 쪽으로.

그렇게 시선이 맞닿은 우리는, 아까 사무실에서 눈을 마주쳤을 때의 분위기와는 다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의 눈빛이 너무나도 달랐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듯한, 냉철함과 온화함이 공존하는 너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다시금 내 마음 한 편을 짓눌렀다.



서로에게 영원을 속삭이던 날이 있었다.

첫사랑의 텁텁함과 달콤함을 간직하고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지 못하는 나에게 길이 되어준 사람.

사랑은 첫사랑이 마지막이길 바랐던 내게, 새로움을 안겨준 그는 매번 나에게 진심이었고 정성을 다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 좋은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주었을까 싶은. 그런 사람.


그는 내게 너무 과분했다.

몇 년 동안의 그와 함께한 시간들은 한편의 영화와 같았다. 내 삶의 하루들을 해피 엔딩으로 만들어주곤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평생 미안해야 할 선택을 해버렸다.

결국은 그 과거 기억 '하나'에 얽매여, 나를 사랑해 주고 진심으로 보듬어주던 사람을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영화였다면, 평점이 5도 되지 않을 법한 끝맺음이 없는 결말 그 자체.


나는 그에게만큼은, 지독하게 이기적인 애인이자

…좋지 못한 그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