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결혼했어요

[ 1화 ] 일과 결혼했어요

"우와, 저게 진짜 사람이야?"

"오자마자 일만 하고 계시잖아, 안 심심하시려나?"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뭐"

필터링도 거치지않은 가시박힌 날카로운 일침들은 모두 한 사람을 향해 날아가고있었다.

바로 흔히 '일중독'이라고 불리우는 나에게로

"무슨 벙어리같아"

회사를 다니면서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내가 입밖으로 말을 내뱉는 일은 가뭄에 콩나듯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 내가 신기할만도 하겠지

수군거리는 사람들덕분에 어수선해진 분위기속에서도 표정하나 변하지않고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는것이 결코 쉬운일은 아닐테니까

"얼굴은 괜찮으신데 일만 하시니까 사람들도 이젠 말도 안거는거지"

탁 -

나는 일부로 큰 소리로 컵을 내려놓았고 꽤나 둔탁한 소음덕에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쥐죽은듯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래, 이래야 일할 맛이 나지

들리지않도록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간사함에 박수라도 쳐야할 판이다

팀장님

"자, 다들 주목! 이제 퇴근시간도 가까워졌는데 오늘 회식자리엔 나올꺼지?"

"또 회식이야, 무슨"

"저 팀장은 회식하려고 회사나오는것 같다니까?"

팀장님

"아 참, 지은씨! 이번 회식자린 꼭 나와줄꺼지?"

한지은

"…"

꾸벅 -

나는 대답대신 '아니요'라는 의미를 담아 허리를 90도 숙였다.

팀장님

"쯧쯧, 하여간 일만 잘하면 뭐해? 사교성이 부족한데말이야 티내는것도 아니고 정말"

딱히 다른 사람들처럼 목소리를 줄인채 흉을 본것도 아니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들었을만한 목소리로 나를 깎아내린것. 나는 팀장이란 무식한 작자를 향해 들리지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한지은

"퇴근하겠습니다…"

어느덧 시계가 퇴근시간을 가르키자 나는 귀를 쫑긋 세우지 않는 이상은 들리지 않을정도의 목소리로 예의상 인사를 건넨후 회사를 나왔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있는 한산한 시내의 풍경은 어느덧 오색찬란한 간판불을 내세우며 하나둘 밝아지고 있었다

띠리리리 -

굉장히 정직한 소리로 울려대는 통화음에 나는 휴대폰을 들어올려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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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끝났어요 공주님?"

한지은

"풉… 공주님이 뭐야, 공주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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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공주님을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그럼 또 뭐라 부르겠어?"

내게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주는 남자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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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목소리가 왜그렇게 우울해? 오늘 또 팀장새끼가 괴롭히기라도 한거야?"

한지은

"아니, 오늘은 무난하게 잘 넘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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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오늘은??? 그럼 어제는 괴롭혔다는 말이야?"

한지은

"농담이야, 농담!"

그의 목소리 한번이면 10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듯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힘겨운 하루를 살아가고있는 무뚝뚝한 내게 살아갈 이유를 제공해주는 한 사람 덕분에 오늘도 웃을 수 있었다

한지은

"근데 오빠는 뭐해? 요즘 얼굴 한번 보기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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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나야 뭐, 오늘도 일하는 중이지. 최근에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가지고 만나기는 힘들겠다, 미안해"

한지은

"난 괜찮아! 내가 뭐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말은 그랬지만 한동안 또 볼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은 감추지못했지만 자신의 이런 마음이 잘못됬다고 되새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한지은

"몇분을 통화한거야, 이제 그만 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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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우

"조심해서 들어가요, 공주님~"

뚝 -

통화가 끝난 직후에도 그의 모습이 떠올라 어느새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띄어져있었다

한지은

이제 그만 빨리 가야지

성우와 통화하느라 천천히 걸어왔던 지은은 다시 속력을 내어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오늘역시도 소란스러운 아침분위기로 회사에서 하루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 얘기 들었어? 오늘 신입사원 들어온다던데"

이번 주제는 신입사원에 관한건가? 평소에 회사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어젖혀지고 별로 반갑지않은 팀장님과 그 뒤엔 긴장한듯 보이는 얼굴의 낯선 남녀가 줄을 이어서있었다

팀장님

"이번에 들어온 신입사원이야, 다들 인사나 한번씩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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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지

"안녕하세요, 배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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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김재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첫날이라 그런지 얼굴에 화장이 유독 진해보이는 여자보다도 뒤에있는 앳된 얼굴의 남자가 더 인상이 좋아보여 눈길이 갔다.

팀장님

"수지씨 자리는 저쪽 창가옆자리고, 재환씨 자리는... 지은씨 옆자리가 비어있네"

내 이름을 거론하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모니터에 집중하고있던 눈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팀장님이 아닌 재환과 시선이 맞닿았다.

상당히 좋은 인상으로보아 우리 팀과는 별로 어울릴것같지 않았다.

팀장님

"그럼 각자 이번에 들어온 안건들 잘 처리하고 오늘 신입사원 환영회나 할겸 회식이나 한번 하자고"

아.. 또 회식이라니 어쩌피 이번에도 슬그머니 빠져나갈 생각이였으나 정말 팀장님은 회식에 집착이라도 하는것같았다. 무슨 사람이 맨날 회식타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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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저, 혹시 이거 좀 도와줄수 있으실까요?"

모니터에 온 관심을 쏟고있던 나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칸막이를 넘어 재환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지은

"아, 앞에있는건 보안팀으로 제출해주시고 뒷장에 있는건…"

김재환 image

김재환

"아하,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해맑게 싱긋 웃어보이는 재환을 보고있자니 왠지모르게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듯한 생각이 들어 잠시 멍했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들어봤으니 감회 또한 새로웠다 매일 듣는 말이라고는…

"지은씨, 이거 나대신 좀 처리해줘."

부탁도 아닌 확고한 명령투

"일이 그렇게 좋으세요?"

나를 경멸하며 비아냥거리는듯한 어조

"지은씨는 회사에 계신지 꽤 된것같은데 아직도 대리시네 능력이 부족하시나?"

그리고 날 향한 날카로운 험담

마치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는듯한 기분이랄까 이러니 어느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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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저기, 괜찮으세요? 표정이 어두워보여서"

한지은

"아… 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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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재환이 건넨것은 다름아닌 따뜻한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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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환

"원래는 저 먹으려고 산건데 첫날이라 그런지 딱히 졸립지도않고 컨디션이 괜찮아서요."

한지은

"아… 고마워요."

재환과의 대화가 끝난뒤에도 그의 친절한 호의에 한참동안 정신을 못차리며 멍때린채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가만히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