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예뻐해 주세요_
Episode 39. 떨어진 꽃잎을 주워줄 사람




김태현
어느 방향이든 둘에게는 나은 선택이 될 수가 없는 거네요.


김태현
……애초에 갈라질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 예뻐해 주세요_" _39화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이…

놀랍게도 변하지 않았고 예전과 그대로다.


김태현은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안전을 확인하는가 하면,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은 끝날 줄을 모르며, 나는 여전히-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것도, 사람과 정을 쌓지 않으려는 것도_ 이제는 점차 흐려져 가는 그의 흔적 탓이 크다.

언젠가 사람의 연은 모두 끝날 거라 생각하니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달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 아빠가 운영하는 기업은 나날로 발전 중이라는 것. 그리고, 나 백여주가 기업 회장의 딸이라는 게 회사 직원들에게 밝혀졌다는 것 정도.

물론 밝혀진 후의 같은 부서 직원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대충 알고 있었다는 사람, 전혀 몰랐다는 사람, 갑자기 나에게 존칭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


우선 그 일은 뒤로 하고, 오늘은 아빠가 운영하는 기업이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주주들을 불러 모아 기념식을 하는 날.

가족으로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아침부터 차려 입고서 축하연을 여는 곳으로 가기 전에 먼저 회사를 들렸다. 김태현에게 생존 신고라도 할 겸.



김태현
뭐야, 너 연애해? 데이트 가?

평소와 다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을 했으니, 제 딴에도 내가 어색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다. 이런 질문이 들려올 줄은 어느 정도 예상했고.


백여주
내가 설마 연애를 하겠니-


김태현
하긴. 백여주가 그럴 리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말은 자연스레 놓기 시작했다. 물론 살아온 세월로 따지자면 김태현이 나보다 훨씬 조상님이시지만.



김태현
그래도… 이 흘러가는 시간을 낭비하긴 좀 그렇잖아.


김태현
너도 연애 좀 하지-.


김태현
김태형이랑 헤어진 지도 벌써 1년인데.


백여주
…음, 백여주는 10년이 지나도 연애는 안 할 예정.

그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태현이 고개를 젓길래, 한 마디 해줬다. 너나 하세요.


김태현
나도 하고 싶네요.


백여주
소개 좀 해줄까?


김태현
됐어.



백여주
아 참, 나 오늘 축하연 갔다가 다시 출근 안 할 거야.


김태현
…? 누구 마음대로?


백여주
회장님한테 허락 받았어.


김태현
…….


김태현
……그래, 조심히 가라.

아빠 이야기하니까 할 말 없다는 듯이 입 꾹 다무는 모습이 왜 이렇게 웃긴지. 홀로 웃음 삼키며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여주
수고하세요~ 부장님~




10:54 AM

축하연 시작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차는 밀려서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여주.

마침 블루투스로 폰 연결한 차 안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핸들 뒤 편에 있던 통화 버튼 눌렀다.

백 회장
- 여주야- 오려면 멀었어-?


백여주
아빠, 죄송해요- 늦게 출발했는데 지금 차가 밀려서 좀 늦을 것 같아요.


말하면서 조수석에 놓인 빨간 장미 꽃다발 한 번 쳐다봤다. 아빠께 드리려 오늘 아침 근처 꽃집에서 샀던.

백 회장
- 아, 그래-?

백 회장
-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


백여주
어... 예상 도착 시간은 20분 뒤에요.

백 회장
- 어, 그래. 알았다. 조심히 운전해서 와.

그렇게 통화가 끊길 줄 알았는데… 곧이어 다시 들려오는 아빠 목소리.

백 회장
- 근데 우리 따님... 뭐 때문에 늦게 출발하셨을까-ㅎ


백여주
아, 별 건 아니고… 그냥 잠깐,

백 회장
- 설마 연애 하나-?!

오늘 연애 질문만 벌써 두 번째. 기습 질문에 여주가 웃음 터뜨렸다.


백여주
저 눈 진짜 높아요, 아빠.ㅎ

막 아무 사람이나 골라서 연애 안 한답니다. 이런 대답을 하는 지금의 나조차 웃긴 거 있지.

백 회장
- 그래, 눈 높은 게 좋지. 뭐.

백 회장
- 아빠도 우리 딸 아무 사내에게나 줄 생각 없단다.

백 회장
- 앞으로도 연애는 하지 마-ㅎ


백여주
네-ㅎ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백여주
앞으로 연애할 생각 없어요, 절대.


백 회장
- 그래 ㅎ 조심히 오고. 곧 보자-

네에- 한껏 높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통화는 끊겼다.



백여주
누구 때문에 내 눈이 이렇게 높아졌는지….

저번에 태형을 한 번 소개시켜달라던 백 회장의 말이 떠오른 여주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태형이 사라진 이후로, 직장 동료들의 기억에서도- 여주의 아빠인 백 회장의 기억에서도 태형이 사라져버린 탓에 오롯이 여주만 기억하게 되었지만.


잘 지내요? 오늘도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저를 지켜봐 주고 있을 태형에게 마음속으로 안부를 묻는 여주였다.




약 20분 후, 축하연이 열리는 아트홀 지상 주차장에 들어서게 된 여주. 많이 늦은 탓에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어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마침 눈에 들어온 딱 하나 남은 자리.


백여주
오케이-.

다행이다 싶어 차를 돌리고 있는데… 어라? 옆에 주차되어 있는 값비싼 외제차 세단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백여주
……?

왜 눈에 띄었냐, 하면...



백여주
어떤 놈이 주차를 이렇게 거지같이 했지…?

내가 주차 할 빈자리의 영역을 침범한 채로 주차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일단 어떻게든 주차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조심스레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서 나 백여주, 그냥 지나쳐선 안 되겠다 싶어 시동 끄고 운전석에서 바로 내렸지.

주차를 일단 하긴 했지만, 나중에 다시 이곳에서 나올 때는 차 빼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어디서 한 번쯤은 본 듯한 이 세단. 의아함을 뒤로 하고 일단 차 창문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안 울리는 연결음 끝에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 "여보세요."


백여주
여보세요-.


백여주
혹시 여기 아트홀 앞에 주차하신 검은 세단 차주분 되세요?

- "아, 네. 맞아요."



백여주
음...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친절한 목소리로 들리실까, 고민을 좀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백여주
차를… 다시 주차해 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요.


백여주
다른 구역으로 넘어오셔가지고...

괜히 이 비싼 외제차 차주에게 연락했다가 되려 내가 잘못 걸려드는 건 아닌가 싶어 말 끝을 흐렸는데…


"아,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다정한 말투를 들으니 다행히도 드라마에서나 보던, 성격 괴팍한 금수저 차주는 아니구나 싶어 속으로 안도했다.


우선 이 일은 뒤로하고, 안 그래도 시간 늦었는데 더 늦을까 봐 서둘러 조수석으로 가 꽃다발을 챙겼다.

뭔가 팔이 허전하다 싶어 뭐가 문제지, 생각하고 있는데 뒷좌석에 있던 가방을 안 들고 내렸길래 팔 뻗어 가방까지 챙겼고.

놔둔 건 없나… 차 안을 살피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때 마침 차 창문 너머로 외제차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거는 남자가 보였다. 되게 금방 오셨네.


이제 가야겠다 싶어, 조수석 문까지 닫고 꽃다발 안의 빨간 장미에서 풍겨오는 향기를 맡으며 차들 사이에서 나왔다.

다시 그 외제차를 보니, 이제는 제대로 주차해 주신 듯했고.

좋아. 내심 흡족하게 꽃다발 속 장미 들여다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홀 입구로 걸어가려는데-


"전화 주신 분이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아까 그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정확히는, 뒤를 도는 찰나에 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백여주
아, 맞아요.


백여주
바쁘신 와중에 부른 게 아닌지 모르겠,

뒤를 돈 후에도 잠시 동안은 꽃다발에 향해 있던 여주의 시선은 끝내 제 앞에 있던 남자에게 닿았다.




김태형
아니에요. 제가 죄송합니다.

바쁜 분 발목 잡은 것 같아서요. 정중하게 사과를 건넨 그. 그의 얼굴을 확인한 여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백여주
…….


얼마 안 가 여주 눈가에 눈물 차오르기 시작했고… 이내, 눈물은 한 방울씩 여주 볼을 타고 흘렀다.

한 편, 태형의 입장에서는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저 자신을 보고 울기 시작하니까 당황스럽다. 왜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달래줘야 할 것 같고.



김태형
…괜찮으세요?

급기야 손에 힘이 풀리자 꽃다발은 힘 없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 떨어졌고, 새빨간 장미 꽃잎 몇 개는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태형은 무릎까지 굽혀 그걸 또 아무 말 없이 주워줬고.


김태형
…울지 마요. 오늘 좋은 날 같아 보이는데.


백여주
…….

눈물 흘린 것도 잠시, 제 옷소매로 눈가를 닦은 여주는 태형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백여주
…….


백여주
……꿈에도 한 번을 안 나타나 주더니,



백여주
날 기억도 못 해주네요.

이건 좀 서운하네. 코 끝이 빨개진 여주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미소로 감췄다. 조금이라도 더 말했다가는 정말 주체 못하고 울게 될까 봐 애써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몇 개 떨어진 꽃잎의 흔적들을 아무 말 없이 응시하던 여주는 이내 뒤 돌았다. 그리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속으로 되새겼다.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


반면에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태형은 힘없이 바람에 나뒹구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다.


이내 멀어져 가는 여주 뒷모습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던 참이었고.

그런 제 자신이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그였다.



+추가연재. 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