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편지를 띄우는 오후


나는 그 달달한 김태형에도 뭐 빼다 바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하고, 눈을 결연하게 감았다 떴다.

마냥 스윗하게 눈웃음 치는 김태형 녀석 얼굴이 오늘따라 영 꼴보기가 싫다.

평소 같았으면 어련히 받아주고 넘어갔을 텐데… 아, 아니지. 정신 차려 한예화! 얘가 지금 나한테 고백이라도 한 게 아니잖아!

굳세게 맘 다잡고 나는 손가락 하나를 척 뻗었다. 새끼 눈이 동그래진다.


한예화
너, 내가 가는 날이 한 주 남은 건 알고 있지?


김태형
당연히 알고 있지. 달력에 체크하는 중이야.


한예화
아, 쫌. 제에발 아가리 닫고 한 번만 그냥 들어 봐.


김태형
그래. 그럼,

김태형이 웃으면서 입 또 나불대려는 것을 내가 혼을 담은 샤우팅으로 막았다.


한예화
빨리 소원 준비해서 갖다 바쳐!


김태형
꼭 니가 안 들어준다는 것처럼 말한다. 소원은 연습까지 하는 중인데요, 아가씨.


한예화
연습은 무슨 연습. 소원 선정만 잘 해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준댔잖아. 장기적인 거 말고, 한 방에 끝나는 거.


김태형
장기적? 좀 길어.


한예화
일 년 이상이면 나 참여 안 해.


김태형
길어야 일 주일, 아니면 이 주일. 이 정도는 단기간이지?


한예화
그 정도야 뭐….


김태형
필요하면, 무기한.


한예화
무기하안?!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붙잡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무슨 무기한이야, 무기한이. 시방 나랑 장난허냐.

불타오르는 내 반응과 다르게 김태형은 썩 불편한 듯이 턱을 괴고 투명의자를 했다.

투명의자… 혼날 때 많이 봤지. 중죄(?)를 저지른 친구들이 하는 거. 생각해 보니 쟨 공기마스터라 투명의자 하는 척 하고 진짜 공기 위에 앉아있는 거구나.

그 불편한 자세를 한 주제에 다리까지 꼬는 걸 보니 내 짐작이 팔십 퍼센트는 맞아떨어진 듯 보였다.

나는 다시 말을 걸었다.


한예화
아, 아무튼. 너 마지막 순간에 변심하기만 해. 너만 참여하는 거 아니고, 박지민도 참여하니까.


김태형
별의별 사람들을 다 데려가네. 교수님 박사님도 모시고 와.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주제를 뱅뱅 돌리며 혼잣말만 한 지 몇 분일까 그가 내게 하얀 봉투를 쥐어준다.

아니, 이 길쭉한 하얀 봉투는!


한예화
돈이야?


김태형
…생각이 해도 해도 너무 괴상하네.


한예화
돈 말고 뭐가 있어. 이 길다란 하얀 봉투는 누가 봐도 돈이잖아, 돈.


김태형
누가 돈을 그런 데에 넣어둬, 아깝게.

아, 여기는 돈을 하얀 봉투에 안 넣어두나보다. 그럼 어디 넣어놓지? 검은색 벨벳에 금 실로 자수가 놓아진, 귀족들의 잇 아이템 봉투?

그래, 돈은 위대하니까.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떨떨하게 하얀 봉투를 받아서 접합부를 뜯어내려고 하니 김태형이 씁, 숨을 들이마시고 내 손을 잡는다.


김태형
혼자 봐. 박지민 없고, 전정국 없고, 나 없는 데서.


한예화
박지민은 어떻게 가능한데 전정국은 모르겠네. 아마 남의 방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진…

아닌가? 걔라면 문을 부수고도 들어오려나? 아예 그냥 방 안에서 뿅 하고 떨어지려나?


한예화
…최대한 막아 볼게.


김태형
…왜 전정국한테만 확신이 없지. 아가씨.


한예화
아닌데, 그거 아닌데. 나도 확신 가지는데. 그럴 수 있는 건데.


김태형
그러지 마, 김석진같으니까. 아무튼… 들어가야지?

김태형이 내 손을 잡았다. 이 초 후, 나는 등을 떠밀리는 것처럼 바람에 날려가서 내 방 앞에 도착했다.

이런, 마찰력이 그냥 막, 발바닥이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이 막 난다야.

발뒤꿈치가 끔찍하게 아려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니 김태형이 나를 달달하게 내려다본다.

새앵긋 웃는 얼굴로 엿을 날려준다. 내 손가락이 또 곱고 길어요. 하얗게 뾰족하니까 바늘 같지? 아니면 뭐 엿가락이나….


김태형
뭔데.


한예화
내가 너를 고백…

입을 찰싹 때린다. 왜 갑자기 뇌도 일을 멈추지? 내가 요즘 밥을 좀 덜 먹었나?


한예화
…고소하겠다는 싸인.


김태형
고소?


한예화
엉.


김태형
누구한테 하게.


한예화
…전정국?



김태형
아까부터 왜 자꾸 주제가 전정국이지, 나랑 있는데.

김태형이 내 머리 쪽으로 오른쪽 손을 뻗다가, 내가 채 정색하기도 전에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하며 뒷걸음질한다.


김태형
아니다, 아가씨. 빨리 들어가. 들어가서 쉬어.


한예화
왜 지랄이야.


김태형
보고 있으니까 계속 보고 싶잖아, 짜증나게. 예쁘지도 않은 게 자꾸 아른거려서는.

이 꼬시기 스킬들이 알고 나니까 너무 확 느껴져서 나는 홧김에 눈을 감고 문턱을 넘어, 기숙사 방문을 쾅 닫았다.

양 뺨이 뜯어질 만큼 열 오르는 게 생경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댔다.


한예화
아 뜨거!

…관두자. 악녀가 되기 위한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부터 해야지. 옷을 편한 땡땡이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양 다리를 푸덕거리며 나는 하얀 봉투에 든 종이뭉치를 휙 꺼냈다.

조금 낡은 것 같은 부분들만 아니었으면 이곳 화폐라고 착각할 뻔했네. 다음에 쟤네 만나면 한 번 구걸해볼까?

프로포즈할 거면 돈으로 줘욧! 흑흑.

…벌써부터 프로포즈를 생각하는 건 좀 에바인 듯. 여신의 에바로 기각되었습니다. 삐빅.


한예화
흠….

나는 가장 낡아 보이는, 삼등분으로 접힌 종이를 폈다. 낡은 종이가 뜨득거리며 펴졌다. 어머, 이거 뜯어지는 거 아니겠지? 오래돼 보이는데… 조심조심 읽어야 쓰겄넹.

나는 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고, 혹시나 붉은 일그러짐, 그러니까 박지민의 조작이 있을까 주의 깊게 살펴본 뒤에 종이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한예화
자아… 오늘은 열세 살!

엥, 년도별로 안 적고 나이를 적었네. 아무튼 나는 계속 그 삐뚤빼뚤한 티브루아 공용어를 읽었다.


한예화
선생, 오늘은 선생한테 그림도 그렸어요.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라기에 선생을 그렸어요.


한예화
은발 머리에 회색 눈, 반쪽은 하얗고 반쪽은 빨갛게 똑같이 그려도 선생이랑 안 닮았더라고요.


한예화
선생. 보고 싶어요. 엄마가 선생이 마제파에 간다면서 유리 섬으로 갔다던데 사실이에요? 내가 유리 섬에 가면 선생 볼 수 있나요?


한예화
아직 양 손을 다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못 찾았어요. 또 편지 할게요. 바티안에게 축복을, 먼저 잠든 이에게 명복을.

김태형이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이하 선생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고 그걸 보내지 못한 건가? 근데 마제파는 어디야?

열세 살부터면 오 년 동안인데… 어머, 이 새끼 첫사랑한테 쓴 편지를 왜 나한테 주고 지랄.

아닌가, 첫사랑을 선생이라고 부르지는… 아니지 여기만의 독보적인 애칭?

크흠, 아무튼 계속 한 번 읽어 볼까.


한예화
열네 살. 선생은 건강한가요. 난 무지 건강하거든요. 우리 엄마는 아픈데 말예요.


한예화
내 주제에 오늘도 아빠를 원망했어요. 아빤 또 나를 비아 남서쪽으로 유학 보내겠대요. 근데 난 싫어요. 내가 가진 마법과 기술력이 원망스러워요.


한예화
가끔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 힉, 열네살부터?!

텁, 입을 틀어막았다. 약간 주말 드라마를 보는 어무이의 심정이긴 한데 너무 재밌는 걸 어떡해.


한예화
…을 때가 있어요. 이게 우울인가요? 선생은 이 기분을 일 년 삼백 육십 오 일 느끼면서 산 건가요?


한예화
왜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 뒤로 몇 번 잉크가 떨어진 자국만 있어서 나는 더듬더듬 줄을 여러 개 내려가야 했다.


한예화
…바티안에게 축복을, 먼저 잠든 이에게 명복을.

이거 뭐, 기독교로 치면 아멘 같은 건가? 편지마다 맨 마지막 줄에 적혀 있었다. 그렇게 치면 바티안이 신 이름이고, 먼저 잠든 이는 뭐지?

에라. 모르겠다. 난 다음 종이를 쥐었다.


한예화
오늘은 열여섯. 학교에서 희한한 애를 만났어요. 꼭 우리 나라의 황후처럼 자신을 칭송해요.

티브루아 전체의 황녀가 이여주인 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실런, 비아, 루이아, 컬마다 황제들이 따로 있나 보다.


한예화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선생이 그랬지만 지 잘난 것밖에 모르고… 물의 능력밖에 안 가졌으면서 친구들을 협박해요.

물의 능력이라면, 민윤기? 아… 물 쓰는 애들 좀 많나. 그래도 협박까지 할 정도로 나쁜 애로는 안 보였는데.


한예화
이상해요.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싫어요, 그 아이가 보기 싫어요. 하지만… 선생이 가르쳐 준 건 증오심과는 다른 거니까요.


한예화
하지만 전 그 애를 가르칠 거에요. 정신을 차리고 가족에게 돌아갈 때까지. 바티안에게 축복을, 먼저 잠든 이에게 명복을.

이건 뭐, 어디서부터, 아니 어디를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를 가르치겠다는 이 마인드부터가 문젠 거 같은데.

내 친구였음 절교했다 진짜, 이 진상….

마지막 종이는 휘갈겨 쓴 필체와 아무것도 없이 하얀 종이 끄트머리의 금박 무늬가 눈에 띄었다.


한예화
오늘은 열여덟. 선생, 찾으러 갈게.


한예화
바티안에게 축복을, 먼저 잠든 이에게 명복… 뭐야, 이게 끝이야?

나는 육성으로 당황을 표출하면서 종이를 펼쳤다 덮었다 했다. 뒷면도 한 번 보고, 봉투도 한 번 훑고.

아무것도 없지만.


한예화
…아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혼란스러움은 제쳐두고 우선 종이들을 재정리해서 봉투 속에 넣은 뒤, 베개 아래에 숨겨뒀다. 박지민이 보면 큰일이니까.

그나저나 정말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어쩌라는 건지. 좋아한다면서는.


한예화
연애는 어려운 거지.

특히 그 대상이 학교 최대의 존잘들 중 한 명에, 다정하다면 더… 나는 마른 세수를 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차암.

나는 방에선 첫 한 달 이후로 생전 펴 본 적도 없던, 펴 볼 기회도 없던 역사학과 지리 책을 꺼냈다.

내 글씨 옆에, 둥글둥글한 글씨로 한예화의 메모들이 적혀 있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 예습 부분일까.


한예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행성 위에는, 총 여섯 개의 대륙이 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티브루아, 우리와 가장 가까운 대륙은 마제파이다.

아, 여기서 마제파! 난 아까 그 편지에 적혀 있던, 선생이 산다던 그 또 다른 대륙을 떠올렸다.


한예화
마제파 외의 다른 대륙들은, 대향양을 중심으로 둘러서 있기 때문에 우리와는 멀리 있다.


한예화
마제파에는 티브루아의 유리 섬처럼 부속 도서가 있는데, 그 섬의 이름은 솔도. 쌍무지개가 자주 보이며 경관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나가면 벨라랑 같이 가 보던지 해야지. 그나저나, 나가고 나면 뭘 해야 할까? 원작에서 예화는 쫓겨날 예정이었지, 쫓겨나고 나서 뭘 한다고는 안 나왔는데.

나는 한참 지리 책을 넘겼다. 시험 기간에도 이렇게 재밌게 공부하지는 않았는데, 문득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잠들었나 보다.


벨라
- 예화야… 예화야….


어린 한예화
- …우리 엄마 어디 갔어요?


벨라
- 안 돼! 그거 손 대지 마!


어린 이여주
- 기어오르지 마라, 썩을 년! 니가 뭐라고 왕족의 명예를 실추해!


벨라
-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황녀 전하… 저, 저희 아이 아직 어립니다. 그래서 잠시 여쭈어 본 것입니다.


어린 이여주
- 어미도 아닌 것이 뭘 보호하겠다고….


어린 한예화
- …여주야.

???
- 한예화. 너…, 이여주 마음에 안 들지? 내가 도와줄까?


한예화
흐읍….

새벽의 찬 공기였다. 하필 악몽을 한예화 걸로 꾸지, 몸이 바뀌니 뇌도 바뀌고, 기억도 바뀌었나 보다.

다 괜찮은데, 마지막에 누가 나온 건지 잘 모르겠다. 도와준다고? 남자였던 거 같은데….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몸을 뒤틀어서 벽을 바라보고는 자고 있는 척을 했다.


박지민
…남 자고 있는데 악몽이나 꾸고, 이렇게 이불 다 걷어 차고.

박지민이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이불을 다 정리해주고는, 다시 사다리 아래로 걸어내려갔다.

나는 오직 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 누구였을까?

베개 아래에 있는 편지 봉투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거 같았다. 꼭, 김태형 손 같다.

오랜만이에요! 인예가 또, 시험 기간 끝나자마자 올리겠다고 부랴부랴 작관을 가져와버렸습니다. 히히… 많이들 기다리셨겠어요.

오늘 뿌려둔 떡밥을 하나 회수하고, 두 개 더 뿌렸어요. 여러분이 추리할 만한 요소가 많아지겠네요!

기억이 안 나신다구요? 태형이가 지칭하는 선생이 누군지 모르겠다구요? 그럼 정주행 한 번 하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