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04화 > 02
*05, 06화 > 03
기존에 두편으로 나눠서 업로드하던걸 그냥 한편에 올리기로 했습니다ㅎㅎ 두편씩 합쳐두었으니 06화까지 보셨던 분들은 이번 화부터 보시면 됩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남자친구가 생긴 건에 대하여
W. 그쁨
채여주와 김태형의 관계는 어딘가 오묘한 구석이 있었다.
김태형, 한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학년. 아직 군대도 안 갔을 그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어쩌다 채여주와 안면을 트게 되었냐 하면, 우연, 이 한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순전히 우연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웨에엑…,"
"……."
만취한 김태형이 속을 게워냈던 곳이 하필이면…, 채여주의 새하얀 운동화 위였다는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아마도 3월쯤이었을 것이다. 신입생 환영회가 곳곳에서 열린 덕에 대학가의 술집들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으니 분명했다. 물론 그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는 채여주도 있었으니, 어김없이 만땅 취해서는 강서영을 데리고 2차가 열리고 있다는 술집으로 가던 차였다.
물론, 바로 어제 세탁한 하얀 운동화에 그…, 말로 설명하기엔 더러운 것들이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그 취기가 싸그리 날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날은 술을 마신 날 치고 기억이 멀쩡한 날이 없던 채여주가 유일하게 모든 것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는 날이란 뜻이었다. 아직 술 안 깬 강서영은 옆에서 깔깔 웃고 있지, 이름도 모를 남자애는 남의 신발에 토해놓고 방실방실 웃고 있지, 신발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아무튼, 그 방실방실 웃고 있던 남자애가 바로 김태형이었단 점에서 채여주와 김태형의 인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채여주가 술이 만땅이 되어서는 남의 신발에 토하는 실례를 저질렀다면, 채여주는 사과와 신발값을 배상한 뒤로는 그 사람의 시야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왜? 개 쪽팔릴 테니까…. 근데 김태형은 아니었다. 김태형은 사리분별 못 할 정도로 처마셔놓고 용케 기억은 멀쩡해서 자신이 취해 실례를 저지른 사람이 같은 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인 채여주라는 사실을 용케도 기억했다. 그뿐일까, 그날 채여주가 맨발로 편의점에 가서 슬리퍼 하나, 숙취해소제 하나, 아이스크림 세 개 사 와서 제 손에 숙취해소제 하나랑 아이스크림 하나 쥐여주고 강서영까지 셋이 나란히 아이스크림 쪽쪽 빨며 기숙사까지 저를 데려다주었다는 사실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채여주였으면 쪽팔려서 이불을 천장에다 붙여버렸을 일들을 다 기억하고도 김태형은 채여주를 아주 뺀질 나게 쫓아다녔다.
"누나, 좋아해요!"
별… 어처구니없는 이유와 함께.
물론 채여주는 들은 체도 안 했다. 무릇 새내기란, 캠퍼스에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 하루에 백가지씩 생겨나는 때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얼마 못 갈 줄 알았단 소리다. 애초에 채여주는 연애할 마음도 없었으니 더 그랬다. 채여주의 견고한 철벽에도 굴하지 않은 김태형도 대단한 놈이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철벽을 가진 채여주는 김태형을 대할 때면 늘 선을 그었다. '친한 후배'를 대하는 것처럼. 난 널 '친한 후배'로만 대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 선 지켜. 단호한 거절이나 다름없는 그 행동이 김태형에겐 상처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채여주에게는 최선이었다. 웃기게도 김태형은 그 선을 착실하게 지켰다. 선을 넘었다가는 채여주가 상대도 안 해줄까 싶어서였다. 그런 김태형이 유일하게 선을 넘나드는 순간이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였다. 이따금 강서영과 이유민이 우스갯소리로 이러다 고백 100번 채우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자주, 진심으로,
"나 진짜 누나 좋아해요."
하고 말할 때면 채여주의 말문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채여주의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절절한 진심이었다.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찰나의 정적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거절의 말을 에둘러 전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무려 반년 좀 넘게였다. 한쪽은 반년 동안 쫓아다니며 고백하고, 한쪽은 반년 동안 선 그어가며 거절하는 게 반년 좀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다는 말이었다. 카페에서 우연처럼 만난 그날까지.
"김태형?"
"여주 누나!"
그러니 오묘한 관계라고 할 수밖에.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는 분명 채여주가 아는 김태형이 맞았다. 채여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공부하러 왔어요?"
"과제하러. 도서관에 자리가 없더라…. 너는?"
"저도요. 이제 수업 있어서 다시 가야 돼요…."
"그래?"
"네. 아쉽다, 누나 오는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뭐,"
수업이라도 째려고? 그럴까요? 미쳤니, 그러다 졸업 못한다. 누나가 아쉬워하길래~. 실없는 대화가 오갈수록 채여주의 얼굴이 풀렸다. 제법 오랜만의 만남인데도 어색함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누구랑 왔어요?"
근데 이 한 마디에 어색함이 생겨버렸다. 어디에? 채여주의 표정에…. 음, 하고 뜸만 들이며 채여주는 눈을 굴렸다. 며칠 전 강서영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태형이, 너랑 석진 선배 사귄다는 소문 듣자마자 정국이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단다. 그랬던 애한테 지금 내가 내 입으로 그 남자친구랑 데이트 겸 공부할 생각으로 카페에 왔다고 말하게 생겼다. 채여주가 생각했다. 대체 김태형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되나. 또 나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말을 내 입으로…, 됐다, 더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프지. 채여주는 망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친구랑 왔어."
"…아,"
김태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채여주가 망설인 이유는 간단했다. 김태형이 채여주를 좋아하는 걸 채여주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죄책감과 민망함에 채여주는 뒷목만 벅벅 긁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 싶긴 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감도 안 왔다. 애꿎은 뒷목만 벅벅 긁고,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맞다, 누나 남자친구 생겼죠. 채여주가 그러는 사이에 먼저 표정을 가다듬은 김태형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축하해요! 하며 웃는데, 눈은 전혀 안 웃고 있었다. 채여주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한들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 고마워. 채여주의 대답에 김태형이 생긋 웃었다. 이번에도 입만 웃었다.
"그럼 저 가요, 지각할 것 같애…."
"어, 응. 조심히 가고. 다음에 보자."
"좋아요! 다음에 만나면 밥이라도 같이 먹기예요!"
아, 이번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곱게 휘어지는 김태형의 눈매를 훑던 채여주가 마주 웃어보였다.
"그래, 그러자."
일순 김태형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 헤프게 웃었나? 싶어 채여주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럼 조심히 가고-, 하던 채여주의 앞으로 김태형의 얼굴이 훅, 들어섰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채여주의 팔을 잡아 끌어당긴 김태형은 속삭였다.
"누나, 그래도 좋아해요."
그러고는 채여주가 버럭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재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얄밉게 손까지 흔들어준 김태형이 채여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와, 채여주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친새끼…."
오늘까지 이러는건 반칙 아니냐고. 귓가에 닿았던 희미한 목소리가 생생했다. 채여주는 제 귀를 벅벅 문지르며 자리를 옮겼다.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새 얼음이 살짝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여전히 김석진이 과제에 몰두하고 있는 제 자리로 향할때 까지, 채여주는 저도모르게 자꾸만 귀를 매만졌다. 인기척에 김석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사람이야?"
"누구요?"
"…방금, 이야기 나누던 사람."
"아-, 친한 동생인데 오랜만에 보는 거라 잠깐 얘기 나눴어요."
"그래?"
그렇구나. 하며 김석진이 미소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채여주도 마주 웃어 보이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김없이 테이블엔 정적만 흘렀다. 타자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작은 소음 속에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채여주는 과제에 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짧은 만남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김태형의 가라앉은 표정이, 느닷없이 귓가에 속삭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오늘같은 날 마저 좋아한단 말을 그렇게 내뱉을 수 있는지. 채여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채여주는 이번에도 김태형이 제가 그어둔 선 안에 남아줄 거라고 아주 굳게 믿고 있었다. 채여주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김태형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채여주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니까. 마지노선은 채여주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지만, 김석진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깊은 생각에 빠진 채여주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채여주는 아무것도 몰랐다. 멍청하게도 그랬다.
♥
채여주가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던 건, 답지 않게 김석진이 채여주의 눈치를 잔뜩 보던 날이었다.
"여주야,"
"네?"
"…아니야, 수업 열심히 들으라고."
손에 쥐여주는 포카리 한 캔에 채여주가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갑자기요? 채여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김석진은 사람들 틈에 섞여들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채여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쥐고 있었던 건지, 미적지근해진 포카리 하나를 손에 쥐고 강의실로 들어간 채여주는 자연스럽게 김석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채여주가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에 김석진이 움찔했다.
"같은 수업인데요, 선배님."
"…그러네."
"옆에서 열심히 듣는지 아닌지 잘 지켜보시면 되겠네요."
"하…."
김석진이 한숨을 내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늘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만 봐왔던지라 오늘같이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처럼 구는 김석진의 모습이 채여주는 신기했다. 민망해하는 김석진의 모습이 웃겼던 채여주가 키득거리며 김석진의 팔뚝을 쿡쿡 찔렀다. 오늘따라 진짜 안 어울리게 구시네요, 하면서.
암만 생각해 봐도 오늘의 김석진은 채여주에게 낯설었다. 무엇이 그랬냐면, 꼭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엉성하게 구는 게 딱 그랬다. 답지 않게 아침부터 데리러 왔단 이상한 말을 하더니만은 정작 옆 동에 가있질 않나, 감자 알러지가 있는 주제에 멍하니 사이드메뉴로 나온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려 하질 않나(채여주가 기겁해서는 싹 다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오후 수업을 새카맣게 잊어먹고 있다가 허둥지둥 가질 않나. 더 우스운 건 그 얼빠진 모습들을 온전히 채여주에게만 보여줬단 것이었다. 오늘 석진 선배 좀 이상하지 않냐? 하고 채여주가 동기에게 물었는데, 동기로부터 어? 똑같으신데? 하는 대답이 돌아온 걸 보면 그랬다.
"선배."
"……."
"저한테 할 말 있죠."
"……."
"다 티 나거든요.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사람 속 터지게…."
"…티 났어?"
"엄청요. 뭐 보증이라도 서달라고 하게요?"
"해달라면 해주게?"
"꿈도 꾸지 마시죠,"
채여주의 실없는 농담에 김석진이 하하, 웃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하며 뒷목을 쓸어내리는 꼴이 어지간히 민망한듯싶었다.
"뭔데요? 빨리 말해요."
"…여주야,"
"네, 선배님."
"…오늘 저녁, 같이 먹어줄 수 있어?"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요 근래 들어 채여주와 김석진이 함께 밥을 먹은 날이 셀 수도 없이 많았건만. 새삼스레 묻는 김석진에 채여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점심도 먹어놓고 새삼스레 뭐 이런 걸 물어보나 싶어서였다. 어… 되죠? 별것 아니라는 투로 튀어나온 채여주의 대답에 김석진이 입을 달싹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이 말고,"
"네? 그럼 누구랑요? 뭐 선배 친구분이라도 소개해 주려고요?"
"…우리 누나랑."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선배님."
"제대로 들었어요, 후배님."
"…선배님네 누님이랑요?"
"응."
"그러니까, 선배님 가족분이랑? 저랑? 선배랑?"
"응."
"…제가 왜요?"
아니, 그보다 김석진한테 누나도 있었냐. 채여주가 생각했다. 진짜 아는 거 없네…. 채여주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김석진은 채여주의 대답을 곱씹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가 왜요라니, 왜긴. 네가 내 여자친구니까. 그딴 말로 대답이 될 리가 없건만, 김석진은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채여주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괜찮아?
"미친, 안 괜찮죠. 미치셨어요?"
"처음엔 된다면서."
"그거야 선배님이랑 둘이 먹는 줄 알았을 때 얘기죠.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왜요?"
"글쎄, 여자친구 있다니까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데, 거절할 구실이 있어야지."
"……."
"됐어, 안 가도 괜찮으니까 그냥 잊어버려."
채여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안 가도 괜찮을 자리였으면 오늘 아침부터 김석진이 이렇게 넋을 빼는 일도, 채여주에게 같이 가달라는 말을 꺼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아, 그새 김석진한테 익숙해져서는…. 찝찝한 마음에 채여주가 뒷목을 벅벅 긁었다. 내켜 하지 않는듯한 그 모습에 김석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뭐래, 그럴 거면 말이나 꺼내지 말던가요. …가줄게요."
"…뭐?"
"같이 가준다구요. 여태 밥 얻어먹은 거 갚는 셈 치죠, 뭐."
채여주로써는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애초에 어쩔 수 없이 사귀는 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만나고 있던 상대였으니 오죽할까. 김석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하며 되묻는 통에 괜히 민망해진 채여주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거, 내가 한번 가주고 말지…. 김석진은 채여주를 잠시간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옮겼다.
…고마워. 김석진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여주는 밀려오는 민망함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
"별거 없을 거야."
…김석진은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지.
김석진의 말을 곱씹던 채여주가 치마 끝자락을 붙잡고 쭉쭉 끌어내렸다. 언젠가 사촌 오빠 결혼식 날 한번 입고 옷장 한구석에 처박아둔 투피스였다. 오랜만에 꺼내 입는 치마에 벌써부터 발꿈치를 쓰라리게 만드는 구두까지. 김석진은 편하게 입고 오라고 했지만, 채여주의 감이 편하게 입으면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래도 명색이 남자친구의 누나 되시는 분 만나는 자린데 아무거나 입고 가기는 좀 그래서 꾸역꾸역 입고 나온 참이었다. 그리고 김석진이 채여주를 데리고 온 식당 앞에 서서 채여주는 생각했다. …별거 존나 있을 것 같은데요. 몇 없는 치마 꾸역꾸역 꺼내 입길 잘했지.
"김예진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겠어요?"
무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으리으리한 외관부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내부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학교에서 잘 사는 아들래미라는 소문이 김석진한테 따라붙긴 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그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채여주가 정신 못 차리고 김석진의 뒤만 졸졸 쫓아가는 와중에도 김석진은 익숙한 듯 주변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걸 보면 그랬다. 채여주가 김석진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묵묵히 앞만 보던 김석진이 흘긋 채여주를 쳐다봤다.
"…선배 혹시 차에 소화제 있어요?"
"…갑자기 소화제는 왜?"
"벌써 체할 것 같아서요…."
"……."
김석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직원이 걸음을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하며 친절하게도 드르륵, 문을 열어주는 직원에 채여주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금방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놀란 게 무색하게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르륵, 하며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김석진은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더니 채여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오고 뭐 하냐는 듯한 그 눈빛에 채여주가 얼어붙었던 걸음을 겨우겨우 떼며 김석진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미리 와 계신 줄 알고 놀랐어요."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곧 올 거야."
"예에…."
전혀 달갑지 않은 소리에 채여주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 벌써 기 빨려.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소주라도 빨고 오는 건데. 그랬으면 긴장은 덜 했겠지. …첫인상에 술냄새 풍기는 것 보단 얼어있는게 낫나? 채여주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손을 꼼지락거렸다.
"긴장돼?"
"…당연하죠."
"음, 당연한가."
김석진이 빈 잔에 물을 따라 채여주에게 내밀었다. 마셔. 채여주는 거절하지 않고 잔을 받아들었다. 긴장으로 바싹 마른 목을 축였다. …집에 가고 싶다. 물을 받아마시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다시 문이 열렸다. 드르륵, 하는 소리에 채여주가 화들짝 놀라며 잔을 내렸다. 잔 안에 남아있던 물이 찰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일찍 왔네,"
와 씨…, 존나 미인이다. 문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채여주가 생각했다. 이건 뭐, 전철 타고 가면서 봐도 김석진과 남매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김석진과 묘하게 닮은 이목구비나, 풍기는 분위기가 매우 닮아 있었다. 한마디로 김석진의 누나 또한, 어디에서 외모로는 절대 빠질 수 없을 정도로 미인이란 소리였다. 채여주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김석진이 조심스레 등을 톡톡, 건드리는 것에 정신을 차리곤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채여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석진이 누나 김예진이에요."
처음 뵙죠? 하며 싱긋 웃곤 저를 향해 내미는 손을 채여주가 답삭 잡았다. 어, 네…, 그렇죠…. 얼빠진 채여주의 대답에 김석진이 작게 웃었다.
"그래요. 식사가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앉아요. 석진이 너도 앉고."
"아, 네."
바야흐로, 지옥 같은 저녁식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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