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듯 이별과 죽음은 순간이었다. 자경단 내 사람들이 처참한 몰골로 죽었을 때도 그랬다. 죽은 순간에 진심과 정성을 쏟아 부어 추모하곤 마음속에 묻어두면 그만이었다. 이번이라고 유별난 판으로 특이점을 쫓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그녀도 결국 별반 다를 것 없는 짐승이었다. 금새 익숙해졌다. 딱히 무뎌지기 위해 과거를 씻어내려고 안간힘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에 따라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 또한 흘렀다. 한때 그날 밤 생각에 잠을 설치고 일부러 냉수에 몸을 던졌던 가상한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시간이란 존재는 필연적으로 부분적인 아픔을 해결해주었다.
양반집 자식치고는 월등히 자주 궁을 들락날락했던지라,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궁밖은 어수선하니 낯설었다만 궁내를 제 집 안방처럼 누비는 자객은 조선 내 그녀로 무이했다. 각각 저마다의 사연으로 자객 노릇을 한다거늘 그녀의 사연은 개중에서도 심심한 편에 속했다.
호화로운 삶을 살았고, 게다가 궁과 교류를 했다. 즉, 자객과 완벽하게 동떨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객 무리의 사람들은 그녀를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명목과 관계를 이용해 득을 얻었다. 언뜻 보면 아둔하나 파고들수록 묘하게 영리했다. 이것이 그녀가 자객에게 느낀 일종의 매력이었다. 모순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흥밋거리로 해석할 수 있는, 어쩌면 무한, 다만 그녀에게는 나아가 수단이었다.
적응의 동물이며 짐승이라고 했다. 사실, 그녀에게 그것은 괴물의 수준에 미쳤다. 세상을 모르던 천진한 소녀는 아주 사랑스럽고 고운 아이, 소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복면을 쓴 적에는 검을 쥐기조차 버거운 청춘, 개화하지 않은 청춘이 시드니 어느새 감정을 잊은 검객이었다. 그렇게도 정이 많던 그녀가 오로지 순간에만 숨을 쉬어 마음을 덜어낼 수 있는 검객이었다. 참 씁쓸했다.

첫 임무였다. 서민을 찔러 죽일 때, 심장이 무섭도록 미친듯이 뛰었다. 이제는 나의 칼질로 사람이 웃음을 잃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중년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고함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깊숙이도 찔러넣은 칼을 복부에서 힘껏 빼내었을 때 분출하는 적색의 혈기는 그녀가 감당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어쩌면 생각했다. 칼과 수장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속눈썹에 붙어 아른거리는 핏물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때려치울까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랬더니 무뎌진 것이다. 무뎌진다는 표현이 이상할만큼 애초에 그런 감정이 싸그리 거짓 같았다. 오직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착오에 불과했다.
당시 무리개 중 두목이 뒷정리를 담당했다. 벌벌 떨던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실전은 한동안 삼가고 훈련에만 매진하란 명령을 내렸다.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인지라 굳이 마다하진 않았다. 무예에만 주력한 성과는 좋았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게 있었기 때문에 무서운 속도로 익혔고, 태생의 힘이 좋아 연약하게 굴지도 않았다. 때문에 여자라는 이유로 못마땅해 하던 자객 내 이들의 환심을 샀으며, 사실 당연하게도 두목의 눈에 들었다.
어쩌면 재앙은 그것부터가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