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늑대"와 친구로 지내는 법 [犬友情法]

01.





결(潔)이는 마당 한 켠의 평상에 앉아서 자신의 넓고 큰 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칼은 현재,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종족의 물건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뉘엇뉘엇 넘어가는 노을진 햇빛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등으로 온전히 다 받아내고 있는 결의 이마는 구릿빛으로그을려있었다. 워낙 단단한 칼이였기에, 칼을 간다기보다는 숫돌이 칼날에 갈려 나가는 형상이었다. 결이는 숫돌이 갈려서 얇아지면 옆으로 휙 던져서 버린 뒤 다시 적당한 숫돌을 가까운 냇가 어디선가 집어와 다시 칼을 갈았다.

 

서걱, 서걱, 서걱...

 

사실 그의 칼은 영이 깃들어있기에 손질은 필요하지 않았다. 칼의 자생적인 능력을 통해 알아서 칼이 무뎌지지 않게끔 스스로 유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은신해 있던 결에게는 일과가 필요했다. 예전처럼 사냥을 다니지도 않고, 더 이상 보살필 백성도 없었기에, 애꿎은 칼만 갈고 있는 것이다.

 

바람을 가르며 늑대족을 지키던 영험한 칼도 지금의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 듯 주인의 의미 없는 손짓에 몸을 맡기며, 묵묵히 숫돌을 갈아내고 있었다.

 

 




회색 늑대 수인들의 족장이었던 결은 원래 용맹한 늑대였다. 

인간과의 전투가 치열해져도 그는 절대 비관하거나 나약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곳에 지내는 동안 백성들이 사라지고, 아끼던 두 아이가 사라진 것이 분명해질수록 그의 불꽃 같았던 전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숲에 두고 온 두 아이가 살아있진 않을지 기대하며,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썼다. 결은 밤낮으로 숲을 뒤지며 아이들의 흔적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고,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늑대족의 민가에 돌아온 생존자가 없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러한 결을 돕기 위해 신전에 나가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밤이나 새벽 동안 함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져서였을까..?

 

늑대족들의 흔적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아마도 인간의 잔혹함이 그에 한 몫 했을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인간의 마을에 숨어있던 혼현(魂顯)을 완벽히 감추지 못한 늑대들을 색출하는 일이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몇몇 늑대족을 구출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색출된 늑대족과 그들을 도와준 인간들의 처형식을 멀리서 지켜보던 결이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결이의 엄지를 타고 뚝뚝 떨어지던 붉은 피가 마치 그의 심장을 옥죄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 한동안 집에 돌아와 조용히 지내던 결은 더이상 자신의 백성들도, 아이들도 찾으러 다니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아이들이 숲에 남아있다고 한들, 생존을 장담하기가 어려웠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포기한 것 같아 나는 그것이 결이답지 않다고 느껴졌다. 결이에게 있었던 호기심이나 패기, 총명함, 이런 것들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가족을 잃은 결이에게서 삶의 일렁이던 열정은 사라져버렸다. 

 

결이가 한동안 혼현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 모습으로만 지내도록 하는 것도 결이의 총기를 빼앗아가도록 하는 것 같아, 나는 못내 미안했다. 일반적인 수인들에게 인간의 모습은 도력을 이용해 둔갑한 모습이어서 하루종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결이는 일반적인 수인들과는 급이 다른 도력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에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결이를 이곳에 데려온 이후, 나는 애시당초 거의 없다시피한 식솔들도 전쟁을 이유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예끼치 않은 방문객이 있을까봐.. 그리고, 머지않은 곳에 민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심스러웠다. 결은 잘 때 조차도 왠만해서는 혼현을 드러내지 않았다.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서서 칼을 묵묵히 갈고 있는 결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렇게 그는 인간 속에 인간의 모습으로만 지내게 되진 않을까..?

 

 

수인족들의 영토가 함락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나는 그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종종 생각해왔었다. 그가 족장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혹은 내가 신전에 속한 사람이 아니였다면, 혹시라도 우리는 친구 이상으로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날에 보냈던 결이와의 시간은 내가 유일하게 생기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갑작스럽게 무녀로 발탁되면서부터는, 그와 대적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려서 더이상 그와 가까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후 그가 족장으로서 후계를 잇기 위해 다른 여자를 아내를 맞이하고, 후손을 보는 동안.. 나는 그저 소중한 결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음에, 여전히 친구로서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에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신전에서 쫒겨나면 그때는 오갈 곳 없는 나를 결이가 받아주지 않을까, 그러면 혹시라도 나를 결이가 안아주지 않을까 기대하던 철없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었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의 길을 열심히 걸어갈수록, 그래서 상급 무녀로 진급해갈수록, 결이와는 멀어져서 멀찌감치에서 그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요 몇 주간 결이와 온전히 이 곳에서 지내게 되자, 못된 마음이 올라온다. 그가 생기를 잃어갈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운 마음들이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이대로 계속 지낸다면 이제는 결이를 독차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두고 가지 못하도록 이 곳에 묶어둘 수 있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좋지 않을까? 그와 단둘이 지낼 수 있다면, 그동안 누군가에게 그를 양보해야만 했던, 더이상 다가설 수 없어서 마음 아팠던 나의 멍든 시간들이 보상 받을 수 있진 않을까?

 

 

서걱, 서걱, 서걱... 탁!

 

 

결이가 얇아진 숫돌을 마당 한켠에 던지자, 숫돌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덕분에 잠시 피어올랐던 나의 검은 망상들도 함께 깨어졌다. 툇마루의 기둥 뒤에서 결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내가 전쟁을 일으킨 악독한 인간들과 결국은 같은 족속임이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결이에게 땀이라도 닦으라고 손수건을 가져다주려 툇마루에 서있던 나는 더이상 결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만 방으로 돌아와버렸다.

방 안은 바깥보다 제법 시원한데도 불구하고 툇마루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땀이 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방에 앉아서 잠재우는 동안 어이가 없어서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것은 고결한 너에게 나쁘고 해롭구나..

 

 

물론 내가 나의 검은 망상들을 실행에 옮긴다고 한들, 또 아무리 결이가 인간의 모습을 잘 유지한다 한들,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우리 둘다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숨겨주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는 무녀의 직위를 박탈 당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수인족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처형될 것이다. 어쩌면 죄없는 나의 식솔들이나 신전에 있는 아기 무녀들까지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결이가 늑대족의 수장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말그대로 삼족을 멸하라 할지도... 물론 나는 부모도 형제도 없기에 삼족을 멸한다 한들 큰 의미는 없겠지만...

 

"설(雪)아, 숫돌 좀 가지러 갈께"



밖에서 결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알았어~ 같이 갈까?"



"아니 됐어. 혼자 갔다올께~"



노을에 의헤 길게 문에 비치던 결이의 그림자가 곧 마당을 지나 사라졌다. 나가서 숫돌을 여러 개 가지고 올 수도 있을 텐데, 결이는 꼭 하나씩만 세심하게 골라 집어온다. 갈아서 없어질 돌인데도 예민하게 고른다. 그리고 그 돌이 사라질 때까지 갈고는 마당 한 켠에 휙 던져버린다. 아마 그것이 네가 슬픔을 감당하고 위로하는 방법이겠지..



생기(生氣)를 잃어가는 결이를 더이상 둘 수는 없다. 아빠 없이 생기를 잃고 있던 나에게 그것을 되찾아준 것이 너였듯이, 이번에는 내가 너를 살려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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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보그화보 나왔을때 달항아리 사이에 누워있는 남준이 보고 썼던 글입니당... 일반 소설로 올렸던 거라 이름은 결이..!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