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W . 여름비처럼
* 이 작의 모든 저작권은 저에게 있으며, 도용 시 강경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도용작 발견 시 알려주세요. 그럼 저의 작고.. 늦은 선물 잘 즐겨주세요. *
* 중간에 글씨 크기 변화가 있었다가 다시 돌아오는데요, 몇 번 고쳐도 똑같더라고요. 이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
쏴아아아-
태형은 눈을 살짝 뜨며 주변을 살폈다. 거의 모두가 빠져나가 적막한 교실 안. 낡은 창문에 굵은 비가 마구 부딪히고 있었다. 또 수업을 하다 잠들고 여태 깨지 않은 걸까. 태형은 눈을 대충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 시, 학교 마친 지 한참은 지난 시간이다. 잠든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리를 움직이자 책상 옆 고리에 걸린 가방이 흔들리며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이제 곧 장마라고 했던 할머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벌써 시작된 걸까.
"우산 없는데."
늘상 있는 일이긴 하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비가 좀 심하게 많이 왔다. 창문에 거세게 부딪히는 물방울들이 화가 잔뜩 나 있다. 태형은 손을 들어 헝클어진 제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해야 집에 간다. 그 생각으로 일어난 태형은 든 거 없는 가방을 둘러메고 교실 문턱을 나섰다.
복도는 검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복도에 소등을 하는데다 비까지 오니 어두워서 오싹할 지경이었다. 태형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끔 이럴 때 성적 상위권을 차지하는 아이들이 남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갑도 안 들고 와 매점에서 우산을 살 수 없는 상황이라, 한 명이라도 남은 애가 있으면 돈을 빌려 우산을 살 생각이었다.
"오늘은 모범생 없는 건가."
전반을 다 돌았지만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뭐, 전반이라고 해봤자 한 반에 열다섯명씩 두 반 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시골에 위치한 학교 치고는 학생 수가 꽤 되는 편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고등학교이니 도시로 가지 않고 시골에 남은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건 꽤 오랜만이라 어른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화제가 됐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은 남아서 공부하는 애들이 없다. 태형은 작게 한숨을 뱉으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름 남기고 외상으로 사갈까 , 하는 고민도 해봤지만 매점을 지키는 할아버지 성격으로 보아 절대 도전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태풍이냐고."
1층 공동현관까지 내려온 태형이 낮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태풍이 아니면 무엇이 태풍이란 말인가. 이 장관을 맨몸으로 뚫고 지나간다면 꼼짝없이 목욕한 꼴이 될 터. 태형은 멍청하게 쭉 자버린 저 자신을 탓했다. 장마라고 했으니 비는 아무래도 그치지 않을 거다.
"김태형?"
"어? 네가 왜."
멍하니 운동장이 진흙밭이 되는 과정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정확히 박히는 목소리. 대충 들어도 제 반 반장의 목소리다. 뒤를 돌자 역시 하계 체육복을 입고 그 위에 가디건을 걸친 여자 아이가 저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 시간까지. 학교 마친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 그러다 태형의 눈이 향한 곳은 반장의 손에 얌전히 들린 빨간 우산이었다.
"우산 없어?"
"응."
"그럼 같이 쓸래?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 그래주면 고맙고."
크지도 작지도 앉은 빨간 우산이 펼쳐졌다. 반장이라는 여자 아이가 우산을 들다가 순간 멈칫하더니 우산 손잡이를 태형에게 건네주었다. 뭔가 하던 태형은 곧 제 키가 더 크니까 우산을 들라는 말로 해석하고 서둘러 받았다.
"그렇게 안 커서 불편하겠지만, 지금은 없는 것보단 낫겠지?"
"응."
둘은 함께 물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건물 밑을 벗어나자마자 엄청난 소리가 우산을 향해 몰려들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으나, 빗소리 때문에 모두 묻혀버렸다. 둘은 교문을 통과하고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향했다.
"할머니 잘 계셔?"
"뭐라고?"
"할머니 잘 계시냐고!"
"아, 어."
"잘 계셔?"
"어!"
조금만 작게 말해도 뜻이 전달되지 않았다. 태형은 조금 더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제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는 했으나, 그렇게까지 부탁할 순 없다는 태형의 마음이었다. 딱 제 집과 이 아이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 나뉘는 갈림길 까지만 가 달라고 할 예정이다. 발걸음의 속도가 빨라지자 옆에 따라오는 숨소리도 빗소리를 뚫을 만큼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김태형, 잠깐만."
"아, 미안."
"뭐 급한 일 있어?"
"아니."
"그럼 조금만 천천히 가자, 아니면 어디 들를래? 아이스크림 사줄게."
"그럴까."
곧 둘이 향한 곳은 동네에 작게 딸린 구멍 가게였다. 파는 것도 얼마 안 되고 아이스크림만 있지 도시의 과자는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지만,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지낸 아이들에게는 정말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애들 중 하나가 태형과 옆의 아이었다.
"뭐 먹을까?"
"그러게."
둘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냉장고 안을 훑었다. 몇 분의 고심 끝에 여자 아이가 골라낸 건 초코맛 막대 아이스크림.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두 개를 꺼내는데, 재빠르게 하얀 손을 저지하는 큰 손이 들어왔다.
"송주아, 나 초코 별로 안 좋아해."
"에?"
"그, 초, 초코 말고 딸기. 딸기 좋아해."
하며 후다닥 주아의 손목을 놔주고 그대로 딸기 요구르트 맛 아이스크림을 집는 태형이었다. 눈을 깜박이던 주아가 계산을 마치고 오자 둘은 가게 앞에 마련된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비를 피할 수 있게 천막까지 있어 생각보다 편했다. 어렸을 때는 이 평상이 그렇게 넓어 보였는데, 이제 두 명만 앉아도 제법 차 보인다. 태형은 알게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포장지를 뜯었다.
"초코 싫어하는 줄 몰랐는데."
태형의 포장지까지 받아가 쓰레기통에 넣은 주아가 말했다. 태형은 주저하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체육대회 때, 초코 받아도 잘 먹지 않았어?"
"안 먹었는데."
"버리는 걸 못 봤는데."
"거의 항상 집 가져가서 할머니 드렸어."
"아."
조용히 앉아 오늘을 잠시 회상했다. 특별한 게 있었다면, 점심시간에 했던 상담 정도. 진학 하고 싶은 대학과 학과를 묻는 담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었다. 태형은 가만히 제 옆에 앉아 입에 초코를 묻히는 주아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주아는 항상 똑부러졌다. 동네에서 애들끼리 놀다가 다치면 바로 어른들께 알리는 것도 주아였고, 마을 행사에서 어린 아이들이 난동을 피우지 않게 돌보는 것도 주아의 역할이었다. 자연스럽게 초등학교에 들어선 동네 또래들에게 선생님의 역할이었고, 중학교부터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주아의 말은 뭔가 따르게 된달까. 거기다 성적도 항상 최상위는 아니여도 상위권이었다. 아마 가고 싶은 대학도 있겠지. 이번 2학년에 들어서서 했던 반장 선거에서도 다들 아무 반박 없이 주아를 내세웠다. 모두에게 인정 받는 아이. 그게 송주아였다.
"비 봐, 진짜 장마 왔나 보다."
"그러게."
반면 태형 자신은 뭐 하나 특별한 게 없었다. 애들 사이에서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인 존재감없는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태형 자신에게도 편했다. 이런 저에게도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기회가 주어질까. 오늘 담임한테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 끝끝내 하지 못하고 상담을 마쳤다. 근데 아마 말을 했어도 욕을 먹었을 것이었다. 성적도 하위권인 애가 하고 싶다는 게 있다 하니까. 조금은 한심해 보이겠지.
"참, 오늘 너 상담했지. 어땠어?"
"어?"
"뭐 좀 선생님이랑 좋은 얘기 나눴어?"
태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좋은 얘기라 할 것도 없었다. 대학 학과 얼른 생각해 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잠깐이지만 표정이 굳었다. 주아는 그런 태형을 보다가 조심스래 입을 열었다.
"조각 얘기, 선생님께 해드렸어?"
누구보다 빠르게 태형이 자리에서 튕겨 올랐다. 그리고 주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태형의 눈동자에는 혼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당황과 혼란과 겁에 잔뜩 질린 눈이었다. 태형이 이런 반응을 보임에도 주아는 태연했다. 심지어 그냥 말을 이어버렸다.
"저번에 너희 할머니가 와서 참외 먹으라고 하시길래, 잠시 들어갔다가 너 방 봤어."
"그럼, 다."
"응."
태형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건데, 마음이 복잡해졌다. 먹던 아이스크림은 다 먹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시켜버렸다. 태형의 손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떨리고 있었다.
"미술 쪽으로 가면 계속할 수 있을 텐데, 왜 선생님께 안 말씀드린 거야? 너 정도면 미대 실기로 붙겠다 싶던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조각에 필요한 칼이 그렇게 많은 줄 이번에 처음 알았어."
"아니라니까."
태형은 조각을 했다. 나무, 얼음, 천, 집의 벽, 무언가를 새기거나 깎을 수 있는 것이면 어디든지 열중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어렸을 때라 그런가, 처음 칼을 잡고 조그만 배를 만든 것을 제외하면 어릴 적 조각했던 것에 대한 기억은 거의 희미했다. 하지만 진득하게 계속 했었다. 화장한 날에도, 낙옆이 떨어져 걸을 때 소리가 바삭한 날에도, 흰 날개를 단 솜뭉치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에도, 오늘처럼 폭포가 쏟아지는 날에도. 태형은 늘 조용히 조각해왔다. 어떤 날은 거대하게 하나 만들고, 어떤 날은 열쇠고리 만큼이나 작은 것 하나.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가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느낌을 좋아했다. 어쩌다 시작한 줄도 모르던 게 이제 장래를 정해야 하는 나이까지 붙었다. 솔직히 이걸로 대학을 간다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태형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작품에는 다른 작품들이 메세지를 전하는 것처럼 무언가가 전해진다는 게 없었다. 그게 싫었다.
"딱히 조각을 진심으로 하는 거 아니야."
"그래? 되게 활기차 보였는데."
"뭐?"
"응? 아, 너 파도 조각한 거 있잖아."
"파도?"
"정육면체 윗부분 조각해서 파도 만든 거."
"아."
"그거 진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예뻤어.
주아의 눈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하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슬슬 구름이 햇빛을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잠시 지나가는 비였던 걸까. 태형은 주아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조각으로 대학 간다고 하면 선생님도 분명히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해. 넌 아직 누구에게도 네 작품을 보인 적 없잖아. 아직 시작도 안 해본 거야."
"아니, 난."
"남들보다 자신 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야. 아직 없으면 찾으면 되는 거고. 너는 조각을 생동감 있게 한다는 재능이 있어. 난 그 부분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네 조각은 뭐랄까, 나무 조각에 생명을 불어 넣는 느낌이야."
"조각은 나무에만 하는 거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난 딱히 할 생각 없어."
"시작이라도 해보고 포기하지? 이대로 뒷걸음질 치면 또 뭐 할 건데? 내가 지금까지 봐온 김태형은 이런 애가 아닌데. 힘들어도 끝까지 우리 따라 달리던 김태형 어디 갔나."
"아니."
"갑자기 이래서 당황스러운 거 알아. 하지만 널 이대로 두면 너 혼자 어떻게 못 할 것 같았어. 원래 이런 고민이나 성장은 그냥 둬야 한다고 하지만, 난 이번 한 번만 너 도와줄래. 몇 년을 봤는데 이정도는 괜찮잖아? 그동안 네가 워낙 경계가 심해서 말 제대로 한 적도 많이 없고. 우리 이렇게 대화한 것도 되게 오랜만이야."
주아는 저 혼자 주절거리다 일어선 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대화를 이어가려는 순간, 주아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태형이 참 가까이 있었다.
"왜. 계속 말해."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왔어. 혹시 화났어?"
"화난 것 같아?"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태형의 입술이 순식간에 주아의 입술을 덮었다 떼어졌다. 떼어낸 후 둘의 거리는 아직도 가까웠다. 주아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태형의 동작이 더 빨랐다. 갈 곳 잃은 채로 들려 있던 주아의 손을 꼭 잡은 태형은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다가 비어 있는 제 반대쪽 손으로 등에 있던 가방을 잡아 열었다. 작은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만들어 둔 앞주머니. 태형의 손이 그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 들린 건 작은 나무 조각을 단 열쇠고리였다. 나무 조각이 하고 있는 모양은 파도. 주아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가만히 벌렸다. 그때 태형의 집에 갔을 때 봤던 거대한 파도 조각. 축소한 것처럼 똑같았다. 태형이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다.
"아쉽다."
"뭐?"
"숨겨뒀다가 제대로 주려고 했지, 난."
"그게 무슨."
"너, 학교에서 일부러 나 기다린 거지."
"어?"
"나 자는 거 보고 밖에서 내내 기다린 거잖아."
"아니거든?"
"바보."
"뭐!"
태형이 킥킥 소리내며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주아는 멈칫했다. 태형이 작지만 이렇게 소리내서 웃는 건 손에 꼽힐 정도로 보기 힘들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봐온 저도 정말 본 적이 얼마 되지 않았다. 활짝 웃는 것도, 소리 내어 까르르거리는 것도. 웃음이라는 것 모두 태형은 제가 진정으로 행복할 때만 보여주었다. 그리고 처음 주아가 그 모습을 본 건 아마 제가 어릴 때 사탕을 선물했을 때.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은 겨우 두 번째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웃는 태형을 보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되다니.
"기분 좋은 일 있어?"
"당연하지."
"뭔데?"
"첫뽀뽀."
이번에 벌떡 일어난 건 주아였다. 주아가 일어나자 태형도 따라 일어섰다.
"열쇠고리,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이야."
"... 응."
"그리고 송주아."
"응?"
주아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태형은 그대로 직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저지하는 주아가 빨랐다. 다가가는 것에 실패하자 태형은 미간을 구겼다. 그런 태형을 보며 주아는 상큼하게 말했다.
"내 입술 비싸."
"그게 뭐야."
"더 원하면 당장 내일 선생님께 미대 실기 볼 거라고 말씀드려."
"너 나 싫어?"
"왜 싫어 바보야."
"그럼 너 나 언제부터 좋았어?"
주아는 잠시 입을 닫았다. 어떻게 말하면 이 강아지가 포기하고 내 말을 들을까, 하는 고민 중이었다. 근데 여기서 생길 변수는 무궁무진했다. 저 순수한 미소에서 도대체 어떤 늑대 새끼가 튀어나올지. 주아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폈다. 그리고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오늘 내가 너 왜 기다렸겠냐. 이제 말 들어라."
"사귀자."
"바보야, 고백 타이밍이 틀렸잖아."
"왜, 사귀자."
"미대 실기 볼 거지?"
"사귀자."
"조각 앞으로 포기하면 안 된다."
"사귀자, 응?"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가자."
"사귀, 응? 뭐?"
"안 가?"
"송주아, 너!"
"내일 선생님한테 말하러 교무실 갈 때 같이 가. 너 또 어디로 샐 지 어떻게 알아."
"네, 네!"
주아는 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맑았다. 뒤에서 조용히 손을 잡아오는 태형의 큰 손이 따뜻했다. 뒤를 돌아보니 보기 드문 미소를 옅지만 확실하게 띄우고 있었다. 이 감정은 절대 갑작스럽게 생긴 게 아니다. 그건 태형도 알고, 주아도 안다. 그냥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가 짙어 알아차리지 못했달까, 그런 것 뿐이다.
바닷 속 깊은 곳을 잘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들쑥날쑥 모르는 것과 배울 것 투성이인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기 자신조차 바다이다. 하지만 우린 바다를 겁내지 않는다. 친해지면 그 어떤 것보다 흥미로운 것이 바로 바다이니 말이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 나란 녀석을, 상대를 좋아하는 나란 녀석을, 앞으로 나아갈 나란 녀석을. 이해하는 순간,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건 더 많아질 거라는 걸 알아챈다.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품고 지내왔던 예쁜 감정을 우선해서 천천히 주변에 전해준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바다에서는 모두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니까. 자기 자신과 친해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흥미롭게 집중하면 된다.
수줍게 손을 맞잡은 두 아이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비가 그쳤으니 쓸 일이 없는 빨간 우산은 여전히 남자 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나란히 걸어가는 여자 아이의 가방에는 부드럽고도 정교한 파도가 달려 있었다. 둘 사이의 공기는, 시원하고 편안했다.
파도는 자유롭고, 나는 네가 좋다.
물 흐르듯 살아갔던 나에게 너란 존재란,
아무리 거대한 폭풍우가 와도 흔들린 하나 없던 깊은 바다 속 심해를 뚫는 신비한 생명체다.
장마가 다가온, 시원한 열 여덟의 여름에.
불현듯, 당연하게도.
너와 똑같은 처음을 담았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응원이나 댓글 한 번씩 부탁드릴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