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공식 [연재 중단]

03. 거슬리기 시작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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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공식




W. 망개찐떡














“…하, 목 아파.”


내가 눈을 뜬 건 목이 타는 듯한 갈증 때문이였다. 어제 대체 얼마나 마신건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대략 인당 소주 세 병씩은 당긴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도 미쳤지… 일어나자마자 손을 뻗어 물을 찾았다. 휘적휘적, 몇 번을 뒤적여도 잡히지 않는 물병. 어라, 이상하다 난 항상 침대 옆 테이블에 물병을 두는데…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우친 나는 눈을 번떡- 하고 떴다. 몸이 허전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게…


“미친?… 나 왜 속옷만 입고있ㅇ,”


이불을 들쳐 몸을 확인한 난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나 설마 어제 원나잇 한거?. 여기 우리집 아닌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혹시나, 어젯밤 원나잇한 상대가 있을까 싶어서. 최대한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한 곳에 모여있는 옷 뭉텅이들. 나는 속으로 비명을질렀다. 미쳤어, 미쳤어. 아무리 전정국이 그리워도 그렇지, 아무남자랑 자다니… 옷을 집어들었다. 우선, 이 집을 나가야했다.


“잘잤나봐.”


옷을 입으려 이불을 끌어내리려던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여야만 해. 제발…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른 남자랑 원나잇 한거여도 되니까, 제발 ‘그 녀석’ 만은 아니길. 혼신의 기도를 하고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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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정국이다. 입 밖으로 욕지기가 나오려는 것을 겨우 틀어막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어쩌다 이 녀석의 집에 오게됬는지, 그리고 내가 재랑… 잤는지. 한참을 기억을 더듬어봐도,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정말 하나도. 


“저기 혹시… 내가 너랑 잤,”
“잤냐고?.”


와, 필터링 따위 없네. 망설이지도 않고 말하는 정국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나 정말 무슨 실수라도 한건가, 라는 생각에 괜히 어깨가 움츠려 지는데 무방비하게 들어나있는 어깨를 본 정국은 벽에 기대있다가 잠시 멈칫- 하고서 제 머리를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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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어?.”
“…하아, 아니. 안 잤다고.


짜증스러움이 담긴 말이였다. …뭐, 안 잤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니, 옷은 왜… 눈동자를 살살 굴려가며 옆에있는 옷 한번, 정국이를 한번 번갈아가며 쳐다보니, 설마 내가 벗겼다고 생각하는거야?. 라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표정이 살벌한게… 무슨 말을 못해요. 


“…뒤돌아있어.”
“뭐?.”
“뒤돌아 있으라고, 옷 갈아입게…”
“옛날에 이미 다 봤는데, 내숭은.”


뺨을 붉히며 나는 소리쳤다. ‘옛날에 봤느니 뭐니 같은, 외설적인 얘기 하지말라고. 미친놈아!!.’ 옛날에 본건 본거고, 지금은 지금이였다. 아무리 사귀었던 사이라고 한들, 헤어진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경과한 것도 경과한 것이지만, 지금의 미묘한 감정으로 맨몸을 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른것에 깜짝놀란것도 잠시, 정국은 한숨을 쉬더니 뒤를 돌아서 방을 나갔다. 울컥했다. 옛날에 다 봤다고해서 안 부끄러운게 아닌데. …하아, 미치겠다. 요즘따라 감정이 오락가락하는게. 스트레스 때문에 갱년기가 일찍 찾아온 건 아닌가 싶다. 


“밥 먹어.”


방을 나서자마자 찌개를 식탁에 내려놓는 정국이 턱으로 의자를 가르켰다. 설마… 같이 밥 먹으려는 거야?.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술 먹고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전남친과 나란히 식사라니.  잠시 머뭇거리자, 정국은 한숨을 짓더니 다가와 등을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식탁 의자에 앉게 된 나는, 앞에 놓여진 내 몫의 밥을 내려다보았다.


“… …”
“술 퍼마셨으면, 밥도 먹어야지.”


어쩔 수 없이 포슬포슬한 밥을 입 안에 넣은 나는, 앞에 놓인 찌개를 내려다보았다. …김치찌개. 정국이와 내가 사귀던 시절, 자주 해먹던 것이였다. 등록금 내기도 빠듯했던 시절. 집에 있는 김치만으로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게 바로, 김치찌개였다. 다른 재료 안 넣어도 맛나던 김치찌개. 이상하게 김치찌개에 손이 안 가더라. 너와 나의 추억이 담겨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네가 해준거라 그런가. 밥만 입에 우겨넣고 있으니, 식탁에 앉은 네가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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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뭐가 문제인데.”
“…뭐?.”
“너 밥 먹을때 불편하거나 슬프면, 무조건 밥만 입에 우겨놓고 보잖아. 내가 널 한 두번 보냐.”
“… …”


뭐가 문제냐니. 당연히 이 상황이지… 턱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킨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다. 진짜 문제다. 5년전 헤어진 전남친.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이별 후유증. 그리고 다시 만나 나란히 먹는 이 상황까지. 모든게 문제였다. 


“그건 그렇고.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제 우리 집 앞에 앉아있었잖아. 설마 기억안나?.”


이건 또 무슨소리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나를 발견해서 데려온게 아니였던가?. 내가 찾아왔다고?.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않은 나는 눈동자를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내 집은 아니였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가구들도 그렇고.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걸까… 나는 말도안되지만, 혹시나 해서 집 주소를 물었다.


“…저기, 여기 집 주소가 어떻게 돼?.”
“그건 왜.”
“…잔말말고 얼른.”
“…YK 오피스텔 9층, 901호.”


맙소사.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전정국이 왜 내가 찾아온거라 생각하는건지와, 집이 익숙해 보였던 이유가. 모든 의문이 풀리니, 더욱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집이 바로 앞인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아있었다 생각하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머리를 감싸자, 넌 내 머리카락에 국이 빠지는 것에 더 신경쓰는 듯 했다.


“야!… 머리카락.”
“…하아, 미쳤지. 미쳤어.”
“뭔데 그러는데?.”


부엌에서 냅킨을 가져와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의문을 표하는 너에, 나는 됐다며 손을 저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나. 앞집에 이사왔던 사람이 전정국이라니.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정국의 행동이 짜증났다. 헤어졌는데, 왜 끝까지 이렇게 자상한건지. 사람 오해하게. 나는 밥 먹다말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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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집에.”
“밥 먹다말고 가긴 어딜가. 다 먹고가.”


아니, 안된다. 이러다 진짜 이성을 잃어버리고, 전남친이고 뭐고 사고치면 어떡하나. 게다가, 더이상 저 행동에 오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리는 음성에도 여전히 꿋꿋히 짐을 챙기니, 미간을 찌푸린 넌 손목을 잡아왔다. ‘뭐하는거야. 내 말 안들려?.’ 가차없이 네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출근해야지. 밥 먹을 시간이 어디있어.”
“밥 먹을 시간은 아직 있어.”
“너랑 나랑 같니?. 난 지금 집 가서 준비해야 돼.”
“지금 집에 가는 것보다, 여기서 준비해서 출근하는게…”
“…앞이야.”
“뭐?.”
“…우리 집 바로 앞이라고. 902호.”


정국도 많이 놀란 듯 말이 없었다. 너한테도 충분히 설명이 됬겠지. 나는 가차없이 돌아서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이 미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정국은 쿵- 하고 닫혀버린 현관문을 보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빨개진 귀하며, 두 뺨이 현재의 기분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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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시발. 또, 나 혼자 착각한거야?…”


수치스러움이 온 몸을 타고 올라왔다.


















* * *




몰려오는 수치심을 간신히 정리한 나는 회사에 출근했다. 이직한 회사, 그리고 바뀐 팀원. 정말 좋았다. 하지만, 변수라고 하면… 시선이 건너편 책상에 앉아있는 여주를 향했다. 윤여주 하나 겠지.


처음에 이직을 마음 먹은 데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전 회사가 좆같아서. 갑질하는 상사와, 추근덕거리는 중년 부장. 몇 번을 싫다고 말했는데 몸을 들이대는 아줌마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이직을 마음먹었다. 그때 이직을 알아보고있던 중, 눈에 띈게 이 회사. 와일드 컴퍼니였다. 평가도 좋고, 연봉도 쎄고 부가 시설까지 최고이기 선택한 회사였다. 그래서, 이 곳에서 새출발을 하려고 했던건데. 차여주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여주씨, 기획 파일 사장님께 전해줄 수 있을까?. 나 아직 일이 안 끝나서 말이야.”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오랜만에 본 넌 여전히 치열하게 살아가고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하고 다니면서. 문득, 네가 헤어짐을 말한 그때가 생각났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그때. 굳이 묻지 않아도 우린 서로의 상태를 알고있었을 그때. 너와 난 심신이 지쳐있었다. 하루에 알바 여러개를 해도 등록금을 내기 빠듯했었고, 등록금을 내고나면 생활비가 없었다.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연애?. 가능할리가.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금전은 더욱 쪼달렸다. 이제는 기숙사를 나가 새 집을 구해야했었고, 취업도 했어야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멀어진 사이. 딱히,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처음 네가 찾아와 이별을 말했을 때 조차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이였달까. 처음 몇년은 미치도록 일했다. 편의점은 기본이고, 택배 상하차 그리고 인형 탈쓰는 알바까지. 안 해본 알바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년을 돈 버는데 시간을 썼을까. 조금 여유로워지고 취업을 하고나니, 네 소식이 궁금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대학 동창들을 수소문해 알아보려고 시도도 해보긴 했으나, 연락이 안된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실패에 돌아갔다. 그제서야, 점차 불안해졌다. 여주의 사정을 모두 알고있는 나는, 혼자서 망상 회로를 돌렸다. 가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나 정말 무슨일이라도 생겨서 안 좋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소식을 더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마음을 먹었을 때 쯤, 이직을 했고. 이직한 곳에서 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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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씨, 조심해요. 위에 물건 떨어진다.”
“아… 고마워요. 도현씨.”


책장 위에서 자료를 꺼내는 여주의 등뒤로 도현씨. 라는 남자가 다가와 자료를 대신 꺼내줬다. 그 관경을 본 나는 눈 꼴이 다 시려워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었다. 꺼내줄 것이면 그냥 꺼내주지, 왜 하필 등 뒤에 가까이 붙어서 꺼내주는데?. 펜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차여주, 저런 스킨십에 진짜 약한데… 여주 한 번, 도현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도현이란 사람, 사람 좋아보이긴 한다. 내가봐도. 얼핏봐도 어울리는 것 같기도하고. 이젠 내가 추해보이기까지 했다. 헤어진지 5년이나 지난 여자를 잊지못하는 내가.


“여주씨, 여주씨가 추천해준 영화 진짜 재미있었어요.”
“아 그 ‘마님은 돌쇠에게 싸커킥을 날렸다’요?.”
“네. 처음에 제목듣고 응?. 했는데. 조선판 로코라서 그런지 정말 재미있더라구요.”
“맞아요. 저도 제목 처음보고 의아하긴 했죠ㅋㅋㅋ.”


일부러 들으라고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자료 받았으면 빨리 자리로 가서 일 할것이지, 책장 앞에서 지금 뭐하는건데. 눈치가 없는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건지. 여주와 도현은 계속 눈 앞에서 알짱거리기시작했다. 탕비실에서도, 구내식당에서도, 심지어는 화장실 앞에서 까지 기다려주는 도현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지금 두 사람 뭐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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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지금 여기서 뭐하세요.”


니네 여기서 뭐하냐.



















[찐떡이의 사담]
여러분, 저 오늘 밥 먹다가요. 일어나는데 모서리에 찍혀가지고, 허리에 예쁜 홈이 하나 파였어요. 얼마나 아프던지, 피가 다 나더라니까요?. 흑흑. 

여러분은 위, 아래, 옆 잘 보고 다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