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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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에게 짙은 여운과 감동을 남겨주는 작가로 유명한 나. 하지만 감동적인 글을 쓰는 내 인생에 감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하는 일이라곤 그저 글 쓰는 일뿐. 얼어붙은 일상에 갇혀 있는 건 나도, 독자들도 똑같다.
흑빛도, 잿빛도 빛이지만 빛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왜 빛인 걸까. 내 인생은 잿빛이고, 잿빛은 빛나지 않는다. 그저 내 책만이 빛날 뿐, 빛나는 책을 쓰는 작가는 흑빛 세상에 갇혀 있다. 대체 언제쯤, 이 잿빛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언제쯤 나에게도 감동이란 것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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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어 서점에 갔던 날. 베스트셀러는 물론, 소설 부문 1위에 올라가 있는 내 책을 보며 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베스트셀러는 어릴 적부터 이루고 싶던 꿈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 모습을 보아도, 내 책을 만져도 기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긍정적인 감정이란 없었다. 맨 위에서 빛나는 저 책 한 권 때문에 내 인생이 흑빛으로 물들었으니.
나는 눈앞에서 내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다. 서서 유심히 책을 들여다보는 한 남자, 그는 어딘가 나와 닮은 것 같았다. 외적인 부분이 닮은 게 아닌, 흑빛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초점 없이 책을 훑는 눈, 감정 없는 손짓 모두. 나는 충동적으로 그 사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 괜찮아요?”
충동적인 행동에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내가 그 말을 꺼낼 상황 따위는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 또한 잿빛 세상에 갇혀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있었으니.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나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라도 구원하길 바라는 나의 마음인 걸까. 그저 오지랖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을 위해 나를 이미 버린지 오래다.
“…”
그의 입꼬리는 한쪽으로 살짝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는 알았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치도록 힘들지만 괜찮냐 물어보는 사람에게 할 말이 없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상태만 봐도 괜찮냐는 말이 나올 수준은 아니었기에.
“… 괜한 걸 물었네요, 질문을 바꿀게요.”
“왜 힘드신… 거예요?”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훌쩍거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다른 사람에게는 오지랖이라고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남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홀로 잿빛 세상에 갇혀 빛을 보기 위해 발버둥만 치던 그를, 나는 알아보았다. 초면이라고 해도 나는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아닌 걸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다.
“자리 옮길까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던 나의 책을 다시 꽂은 뒤 밖으로 향했다. 그는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저 나를 믿고 따라와 주는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뉘엿뉘엿 져가는 노을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상념이 스쳤지만, 뒤로 한 채 그 남자를 보았다. 여운이 남았는지 아직도 훌쩍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등을 살짝 토닥여 주었다.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나는 살짝 미소 지어 주었다.
“… 나 힘든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 책 읽는 분들은 거의 힘든 서사를 가진 분들이더라고요, 표정도 그렇고.”
“… 맞아요, 그분 책은 감동과 위로를 건네주거든요.”
“음… 저는 어릴 때부터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해서 무용을 전공했어요.”
“대회에 나가지 않을 때는 연습 하지 않고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게 보통인데, 저는 강박 때문에 매일 연습 해야 하거든요.”
“뼈가 부러지거나 뒤틀려도, 발톱이 들려도, 피가 철철 흘러도… 춤에 매진했어요.”
“… 전 트라우마가 있어요, 저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죽는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요.”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 친구가 자꾸 생각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춤을 추거나 책을 읽는 거예요.”
“그 작가님 책은 몇 번을 읽어도 여운이 짙게 남고 위로가 되거든요, 감동은 물론.”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모두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 그게 작가님이 위대하다는 증거예요.”
“… 제가 부모님도 친구도 없어서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얘기라도 하니 편하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감정이 북받쳤는지 자신의 얘기를 끝없이 털어놓는 그. 그의 서사를 들으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친구를 떠올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춤으로 선택해 매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춤을 추며 자신을 죽이고 있다. 그는 스스로 비가 오는 흑빛 세상에 자신을 가두었다.
“이제 그쪽 얘기도 해주세요, 그쪽도… 힘든 서사가 있는 듯한데.”
“… 저는, 그쪽이 보는 책을 쓴 작가예요.”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짙은 여운을 남겨주는 책을 쓰는 제 인생에 감동이란 없어요.”
“왠지 잿빛 세상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에 답답하고, 숨이 막혀요.”
“베스트셀러와 1위에 제 책이 있어도, 전혀 기쁘지 않아요.”
“그 빛나는 책으로 인해 저는 잿빛 세상에 갇혀 있으니까요. 빛나는 책을 쓰는 저는 하나도 빛나지 않거든요.”
“제가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저도 다른 이에게 감동을 하고 빛을 받으면 좋겠어요.”
내가 내 직업을 밝힌 채 모든 심정을 털어놓자 그는 퍽 놀란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작가가 자신의 부정적인 심정을 밝히니 심히 놀랐을 것이다.
“… 당신이, 그 작가라고요?”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죠? 활기차고 당찬 사람으로 포장된 작가가 우울한 모습이라니.”
“… 네, 그렇네요.”
“하지만 저는 좋아요, 작가님이 제 삶을 더 공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저에게 동질감을 느낀 채 다가오신 걸 수도 있지만, 저는 작가님이랑 진솔한 친구가 되고 싶어요.”
“작가님은 저의, 저는 작가님의 햇빛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위로를 주는 진솔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겪었던 모든 서사를 털어놓은 채 심정을 드러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아직도 흐린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음도 가벼워지고 미소를 짓는 일도 많아졌는데 대체 왜 나는 아직도 잿빛 세상에 갇혀 있는 걸까. 나는 언제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직은 한 줄기의 빛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오직 빛으로 꽉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 나타날까, 나타나기는 할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나는 생각보다 안일했다. 나의 밝은 햇빛이 되어 줄 사람은 가까이 있었다. 내가 잿빛 세상에 갇혀 있던 이유는, 나의 마음이 완전히 열리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다가오는 모두를 내쳤다. 나는 내 자신조차 의심하며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애썼고, 나는 그 마음을 굳게 닫고 있었다. 매일 나를 죽이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나를 잿빛 세상에 갇히게 한 것도 나였다. 그런 나를 잿빛 세상에서 꺼내줄 수 있는 것 또한, 나다.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지민과 함께 한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지민은 이미 춤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춤을 좋아했기에 완전히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지민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날개를 펼쳤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가까워졌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 그에게 느껴졌고, 그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힘든 서사를 극복한 채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었으며, 이미 짙게 새겨진 흔적을 더욱 진하게 물들였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깊게 물들어 감동을 주고 있었다. 잿빛 세상에 갇혀 있던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답고도 밝게 빛나는 햇빛이 되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