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해가 웃을 때

《노란 해가 웃을 때》 1화

돌아온 좌의정 댁 공자


오늘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바람도 햇살도 사람의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듯이 느릿했다.


뜰에 핀 진달래는 이미 반쯤 시들어 있었고

문지방 아래 햇살은 조용히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붉은 명주실은 손끝에서 차분히 풀려나가고

바늘은 천을 꿰며 점잖게 움직였다.


이 시간은 늘 고요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딱히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불쑥 찾아올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 평온한 흐름 속에서 나는 지금의 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웃음이 헤픈 것도 아니고 

세상일에 괜한 기대를 거는 바보도 아닌 사람.


조용히, 얌전하게. 다만 ‘나답게’ 살아가는.


그게 내가 되기로 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기씨.”


누군가 조용히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마당 쪽에서 소화가 서 있었다.

나를 부르기엔 조금 망설인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사랑채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화는 작게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영감 어르신께서, 아기씨를 찾으십니다.”


나는 천천히 손에서 바늘을 내려놓았다.

붉은 실이 손등에 살짝 걸려 느슨하게 흔들렸다.


“…그래. 가볼게.”


대답은 담담했지만 왠지 마음속엔 파문이 잔잔히 일기 시작했다.


사랑채로 가는 길

걸음은 천천히 이어졌다.


마당 끝 돌담 아래 작은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며 나는 생각했다.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하지만 별일이 아니라면 굳이 아버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실 이유가 없었다.


사랑채 문을 여니 아버님은 마루 끝에 앉아 계셨다.

늘 그렇듯 곧은 허리와 말없는 눈빛.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그래. 앉거라.”


말씀을 건네시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차는 식어 있었고 향은 절반쯤 날아가 있었다.


“…좌의정 댁 한공자가 돌아왔다.”


그 이름에 손끝이 저릿했다.


“…누가요?”


“한노아. 네 정혼자 말이다.”


그 말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한노아.

어릴 적 양가가 맺은 혼인 약조.  

혼례를 올리기도 직전에 떠나버린 사람. 

그 이름 하나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말했다.


“그 분께서는 몇 해 전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그래. 그 뒤로는 조정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지.

외가 쪽 연을 따라 청국에 머무르다 지난달 조정에 인사 올렸다.”


나는 아버님의 말 속에서 조정이라는 단어를 짚어냈다. 

그리고 그제야 다시 상기되었다.

한노아는 좌의정 댁의 적장손이었다.

조선을 떠받드는 사대부 가문, 그 맥을 이을 유일한 후계자. 나는 그 이름 앞에 늘 조심스러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떼면 감정이 나올까 봐 무서웠다.


“약조한 혼례를 올리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마치 사전에 정해진 명령을 옮기듯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절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애가 죽은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몇 년을

단 한 장의 서찰도 없었다.


정혼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사람.


그 사람이 돌아왔단다. 그리고 혼례를 올리겠단다.


나는 손끝을 꼭 잡았다.


이름은 고왔다. 그리고 얼굴은 참, 말이 안 되게 생긴 애였다.


살결이 희고 머릿결은 태양을 받은 밀처럼 부드러웠다. 눈매는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반쯤 감겨 있었다. 


“그간, 그분과는 아무런 연이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것 아니냐.”


나는 그 말이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돌아왔으니 다 잊으라’는 듯한 말.


그 아이는 애초에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 이다. 

그 자유로움은 나와 다르다.


나는 단 한 번도 어디에도 가지 못했는데-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가.

나는 기억했다. 어릴 적부터 듣던 말들을.


‘한씨 댁은 나라를 받치는 기둥 같은 집안이다.’

‘사대부 중에서도 높은 줄에 속한 이들이다.’

‘좌의정 대감께서 황공하게도 인연을 맺어주셨지.’


정혼자라는 이름 아래 나는 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애가 떠난 뒤에도 그 애가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어도 

그 애가 ‘혼례를 치르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쪽이었다.


“…혼례는 언제입니까.”


나는 결국 그렇게 물었다.


아버님은 내 표정을 들여다보지 않으셨다. 다만 차를 한 잔 더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곧 상견례 자리가 잡힐 것이다. 본가에서 먼저 오겠다 하더구나.”


‘본가.’

좌의정 댁 대궐과 가까운 언덕 위의 기와집.

그 문 앞에 다시 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나는 이 혼례를 피할 수 없다.


방으로 돌아오자 

소화가 가만히 나를 살폈다.

말을 하려다 입꼬리를 삼키듯 입술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내가 먼저 입을 열자 소화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혼자님이… 정말 돌아오셨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으니 혼례를 올리자고 했다.”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마치 그 몇 해는 없었던 것처럼.


나 혼자 그 시간에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


소화는 한참 말이 없더니 조용히 말했다.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속상하다—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지금 기분이 더럽다.


그 애가 사라졌을 때, 나는 열이 났고 이틀을 앓았다.

그 열이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저 바보였고 그 애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아기씨께선 어릴 적 그분 좋아하셨습니까?”


나는 붉은 실을 감으며 말했다.


“응. 걔는 말할 때마다 뻔뻔했고 무례했고 어이가 없었어.”


소화가 눈을 깜빡였다.


“…좋아하셨다는 뜻인가요?”


“얼굴이 예뻤거든.”

“근데 그건 얼굴이 예뻐서였지. 성격은, 음. 죽이고 싶을 정도였어.”


소화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입을 막았다. 

나는 그 표정이 조금 웃겼다.


잠깐 웃었던 마음은 금세 가라앉았다.  


현실은 다시 혼례였다.


혼례 준비가 본격화되기 전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오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오늘 그날이 되었다.


_______


방문 너머로 낯선 목소리들이 오갔다.  

좌의정 댁 하인들의 발걸음은 기척부터 달랐다.  

구두소리 하나에도 거만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속으로 셀 수 없이 이름을 되뇌며.


한노아.

한노아.

한노아.


그 이름은 마치 독처럼 서서히 퍼지는 소리였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이쪽으로 드시죠.”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발뒤꿈치로 천천히 땅을 누르듯이. 

그래, 그 애는 늘 걷는 것부터 다르던 아이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애를 다시 보았다.


햇살이 마당 끝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 아래 한노아가 서 있었다.


달라진 게 있었다. 


어릴 적보다 키가 훨씬 커졌고

얼굴은 기가 막히게 잘 자랐고 


웃음은 여전히.


사람을 아주 천천히 무너뜨리는 웃음이었다.


“ㅇㅇㅇ.”


그 애는 익숙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말투 그 목소리 그 장난스러운 어조.


단 한순간에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이군.”


나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인데 갑자기 혼례를 올리겠다 하신답니까.”


그 애는 웃었다.

익숙하게 아주 예쁘게.


“지금 와서 물러서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지 않겠는가.”


“…체면이 문제입니까.”


“그대가 싫다면 안 하겠다. 하지만—”


천천히 그는 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정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말했다.


“…나. 그대가 싫어할 얼굴은 아니지 않나?”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라 알고 있다만. 그럼, 그리 받아들여야겠군.”

“오늘은 그저 네 얼굴을 보러온거야. 다음엔 정식으로 들르지.”


노아는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고

늘 그렇듯 느긋한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겉으로 예의는 갖췄지만 여전히 무례했다.


얼굴이 마음에 드냐고?


그 애는 몇 해 전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왔다.

그 사실이 나를 분노하게 만든 건, 맞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얼굴이 여전히—


숨 막히게 예쁘다는 것.


…망할.


1화 돌아온 좌의정 댁 공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