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5.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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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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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현관을 나서자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석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집 안에 남아 있던 답답함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시간, 7시 58분이었다. …아직 닫을 시간은 아니네. 석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순간,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네비게이션조차 굳이 설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엑셀을 밟는 발은 조금 더 과감해졌다.

 

골목 입구가 보이자, 그의 시선이 먼저 창가를 찾았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익숙한 조명, 흐릿하게 보이는 화분들의 실루엣. 석진은 차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문을 열었다. 걸음은 빠르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지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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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주는 계산대 위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불을 한 칸 줄였다. 시계는 이미 여덣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원래라면 더 일찍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지만, 석진이 방문함으로서 어느새 습관처럼 늦춰진 마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천천히 마감정리를 하였다. 여주는 앞치마를 벗어 걸고,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쨍—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여주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아, 저희 오늘 판매는 끝났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방문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익숙한 얼굴을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냥 정중하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

 

 

“....!”

 

 

뒤에서 팔이 닿았다. 아니, 닿은 정도가 아니었다. 단단한 힘이 허리를 감싸며, 여주를 그대로 끌어당겼다.

석진은 그대로 여주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망설임도, 예고도 없이.
석진의 고개는 쇄골 근처에 닿고, 얼굴이 그녀의 어깨에 깊숙이 묻혔다.

 

숨이 스쳤다. 빠르고 거친 숨결이, 여주의 옷깃과 피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한 번, 아주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꽃향이 먼저였다. 가게 안에 늘 퍼져 있던 향이 아니라, 여주에게서만 나는 냄새였다.
비누와 흙, 물기와 햇볕이 섞인 듯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향.

 

석진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붙잡는다는 느낌보다, 놓치지 않으려는 몸짓에 가까웠다.
마치 오늘 하루를 버티게 만든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에서 확인하려는 것처럼.

 

여주는 숨을 삼켰다.
석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 무슨일이 있었구나.
그제야 알았다. 이건 충동도, 장난도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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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의 팔에 걸려 있던 힘이 서서히 풀렸다. 방금 전까지 여주를 감싸고 있던 압박이 조금 느슨해졌고, 그의 숨결도 거칠던 리듬을 잃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여주는 그 변화를 느끼고도 몸을 빼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그의 품 안에서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가까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서로의 온기가 닿을 만큼. 여주는 양손을 들어 석진의 얼굴을 잡았다. 급하게 달려온 탓인지 그의 뺨은 차가웠고, 이마에는 미세한 땀이 맺혀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체온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석진은 그 손길에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다시 여주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어딘가 멀리 가 있던 눈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 틈새로 피로와 혼란이 엿보였다.

 

여주는 그의 얼굴을 놓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 빛이 안좋아.”

 

 

여주의 물음에 석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아직 얼굴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말을 더 어렵게 만드는 듯했다.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군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네.”
“자주 못 올 것 같아요.”

 

 

여주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그 작은 변화에도 석진은 바로 알아챘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 온다는 건 아니고요. 사실..”

 

 

말을 고르듯 천천히 이어가던 그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걱정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여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마음이 변한 건 절대 아니니까.”

 

 

여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석진은 괜히 더 긴장한 듯 말을 덧붙였다.

 

 

“문자… 보내면, 바쁠 때 말고는, 그냥 지금처럼 받아줘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도요. 가끔이면 돼요. 부담 안 될 정도로.”

 

 

여주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분위기를 깨려는 웃음이라기보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비장해요?”

 


손을 천천히 내려 그의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잠수 타는 것도 아니잖아요.”

 

 

석진은 그제야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게…너가 오해할까 봐.”

“오해 안 해요.”

 


여주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석진 씨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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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여주도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은 듯 웃으며 계산대를 정리했고, 석진은 말없이 마감 정리를 도왔다. 물통을 비우고, 바닥에 떨어진 잎을 쓸어 담고, 셔터를 내리는 마지막까지 함께였다. 가게 문을 닫고 나서도 그는 한참을 서 있었다.

여주가 집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에 들어설 때까지, 석진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여주가 몇 번이나 뒤돌아 손을 흔들고 나서야, 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차로 향했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 조용했던 공간에 엔진 소리만 낮게 울렸다.
앞좌석에는 김남준이 앉아 있었다. 오래 함께한 비서이자, 석진과는 형·동생이라 불러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집으로 갈까요?”

“아니 사무실로.”

 


짧은 대답이었다. 남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차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석진이 입을 열었다.

 

 

“형.”

 

 

그 한 마디에 남준의 시선이 백미러로 잠깐 옮겨왔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호칭이었다.

 

 

“내가 당분간 여기 못 오게 될 거야.”

 

 

남준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석진이 스스로 말을 이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고를 좀 해줬으면 해.”

“뭐를 말씀이십니까.”

“그녀에 대한건 전부.”

 


석진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뭐 하는지, 누구 만나는지. 사소한 것도.”

“…선 넘는 일은 아닐까요.”

 

 

그 질문에 석진은 웃지 않았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그는 보던 폰을 끄고 남준이 쳐다보던 백미러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정해.”

 

 

차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남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를 보고 있었지만, 이미 꽃집도, 여주도 없는 방향이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는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절대 놓을 생각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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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는 고속도로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고, 그 빛이 석진의 얼굴을 잠깐씩 비췄다 사라졌다. 석진은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한 지점에 고정된 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질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형.”

 

 

낮게 부른 목소리에, 남준이 백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석진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 쪽, 지금 어디까지 정리됐어“

“공식적인 선에서는 깨끗합니다. 회계 감사, 회사 자금도 그렇고 전부 문제 없어 보이게 정리돼 있고요”

“.......“
“누가 봐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정도로.”

 

 

그 말에 석진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제야 시선이 창밖에서 남준 쪽으로 옮겨왔다.

 

 

“그럼 공식 말고는.”

 

 

남준은 석진의 말을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서류 파일을 꺼내 뒷좌석으로 넘겼다. 석진은 한 박자 늦게 파일을 받아 들고,손끝으로 표지를 눌렀다.

 

 

“고맙스럽게도 비공식 쪽으로 빠져나간 자금이 있었습니다. 해외 페이퍼컴퍼니 하나. 짧게 치고 빠진 게 아니라, 몇 년 동안 반복된 패턴입니다.”

 

석진은 말없이 파일을 넘기고 있었다. 종이 위에 인쇄된 숫자들과 법인명, 계좌 흐름이 일정한 리듬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규칙적이었다. 해외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 하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는 몇 년 동안 거의 같았다. 계열사에서 용역비, 컨설팅 비용, 투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빠져나간 돈이 중간 회사를 거쳐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사라졌다. 석진의 손이 한 장에서 멈췄다. 숫자가 적힌 부분이었다.

 

총액, 87억.

 

이 양반 많이도 빼돌렸군. 그는 아무 표정 없이 그 숫자를 한 번 더 눈으로 훑었다.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대신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이미 예상 범위 안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건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입니다.”
“.......”

“흔적을 일부러 쪼개놔서, 더 들어가면 늘어날 가능성도 있고요.”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을 덮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위를 가볍게 눌렀다.

 

 

“지금 이걸로는 아직 부족해.”

 

 

남준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은 다 보이네.”

“언제 쓰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내가 먼저 흔들리면 안 돼.”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흘러갔다. 그 불빛들 사이 어딘가에, 그가 지키고 싶은 것과 무너뜨려야 할 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석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가 놓이고 있었다.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날 밤, 석진은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