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에필로그 (9), 그 후, 여주이야기 (3)


두번째 결혼생활이 마무리된 이후 여주는 조용히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진이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협소 주택으로 이사왔다.

첫번째 결혼에서 합의기간 동안 잠시 정국의 빵집에서 몇 개월간 일을 도왔던 것이 마음 정리에 큰 도움이 되었던 여주는

정국의 일을 도울 겸 찾아가게 되었다.


국
누나! 어서와~~~

정국은 여주가 일하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여주는 낮에는 정국의 베이커리에서 빵을 진열하고, 매출을 정리하는 소일거리를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지냈다.

도제방식으로 빵을 굽는 직원들만 뽑고, 딱히 카운터를 보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던 정국은

여주가 일을 도와주자 분점을 내는 등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더러 여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단골 위주의 가계여서 여주는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2호점에서 윤이 일하게 된 몇 달 뒤, 여주는 정국과 윤이 교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여주는 마음이 좀 정리되고 나자 조금씩 글을 쓰는 일도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석진은 지민의 요청에 아프리카에 가서 난민이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그들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여주는 종종 화상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곤 하였다.

화상을 통해 친해진 타냐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던 여주는 타냐의 이야기를 동화로 내면서 다시 동화작가로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이 때 집필한 타냐 쓰리즈는

훗날, 태형이 아프리카 일행에 합류하고, 난민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할 때,

함께 유럽이나 영미권 국가들에도 소개되었고,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 여주의 작가 커리어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한편 윤이와 정국은 결혼식 없이 부부가 되겠다고 선언하였고, 석진과 여주는 이를 지지해주었다.

둘은 출산계획을 세워서 가족을 꾸렸고,

윤이와 정국의 아이들이 태어나자,

어릴 때부터 행복한 가정, 육아 등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던 여주는 윤이의 아이들을 종종 돌봐주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윤이는 민선생님과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국이와 여주의 보살핌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이전에 겪었던 공황장애나 순환성장애의 증상이 거의 사라지고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여주는 좋은 친구이자 이모로서, 자신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지내려 했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유여주
그리고.. 나도 행복지고 싶었는데.. 다시 돌아왔네..

여주가 침대에 눕자 문득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무척 따듯하게 느껴지며 마음 한 켠이 울컥했다.

삑삑삑삑..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여주는 얼른 눈물을 닦고 거실로 나왔다.


석진
어...? 너가 와있었구나... 반갑다야...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석진이었다.


유여주
뭐야.. 올꺼면 미리 알려주지.. 청소라도 한번 더했을 텐데..


석진
잘 지냈어..?

오랜만에 만난 석진은 얼굴에 주름도 늘고 이마 가까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들이 있었다.

여주는 석진의 나이든 모습을 보며 지나간 시간들이 실감났다.


석진
방에 내 짐 좀 갖다놓고 나올께~ 피곤해서.. 밥먹긴 그렇고 차라도 한 잔 할까..?

여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
어떻게 된거야..? 거실에 있던 짐은 뭐고..?


석진
너.. 올해 초부터 선 봤던 사람이랑 같이 산다고 하지 않았어..?


유여주
그게.. 다 끝났어.. 오빠..


유여주
나는 아무래도 누구랑 같이 살 운명이 아닌가봐..

여주는 씁쓸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석진
여주야...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

석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여주
그냥.. 진짜 이번에는 평범하게... 나도 윤이처럼 아이들도 갖고.. 그렇게 살려고 했는데,


유여주
아이가 안 생겼어..


유여주
시댁에서는 난리고.. 그이는 자기 집안을 버릴 수가 없대..


석진
뭐라고..? 이런 ㅆ...


유여주
아니야.. 그래서..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시댁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지긋지긋하기도 해서 짐싸서 나왔어.

화를 내며 일어나려던 석진을 여주가 말렸다.


유여주
집도 다 그이 줄꺼야... 그 집에 좋은 기억도 별로 없고... 그이가 안됬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정기간 지나면 법적으로도 우리는 완전히 끝나겠지..

오랜만에 돌아와 윤이의 아이들을 볼 생각만 하고 있던 석진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유여주
전에 혼자 살던 집은 결혼 전에 이미 정리했고.. 신혼집은 그이에게 주기로 했으니까.. 지낼 곳이 없네....


유여주
그래서.. 나.. 한동안 여기서 지내도 되..?

여주의 목소리는 지치고 힘이 없었다.


석진
여주야..굳이 떠나지 않아도 되니까.. 지내고 싶은 만큼 지내.. 너 쓰던 방도 그대로고..

힘이 없어보이는 여주의 모습을 보며 석진이 천천히 말했다.


석진
음... 나랑 같은 층 쓰는 거 불편하면, 윗층에 윤이방을 써도 되고.. 편하게 해..


유여주
그래.. 알았어.. 고마워...

여주는 쓸쓸하게 방으로 돌아갔다.


석진
...

여주는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가 정기적으로 자신이 살았던 보육원의 어린 아이들에게 작가로서 동화를 읽어주러 가기 시작했고,

석진이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의 행사에 작가로서 참여하고,

또한 자신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자전적 글도 써냈다.

석진은 여주와 함께 지내면서 이전에 여주가 기억을 잃고 집에 머물던 그 때처럼 서로 식사를 챙겨주기도 하며, 일상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같이 영화를 보고.. 함께 쇼핑을 하거나 시장에 장을 보러 갔으며,

어떨 땐 옛 추억에 잠겨 와인을 한잔 할 때도 있었다.

둘의 관계는 딱 그만큼이었다.

몇 해 뒤 지민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석진과 윤이와 정국이 그리고 아이들,

태형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딱히 방문할 사람도 많지 않았기에, 장례는 소소하게 치뤄졌다.


아이들
이모~~~

장례식장이 어색했던 아이들은 오전에 볼 일을 보고 조금 늦게 온 여주를 반겼다.


유여주
아이고.. 얘들아..

여주는 아이들을 한번씩 안아주고는 바로 윤이를 안아주었다.


유여주
지민이 아저씨 소식에 너가 가장 많이 놀랐겠다...


유여주
어쩌니...

윤이는 생각보다는 표정이 밝았다.


윤
아니야.. 우리 삼촌.. 은퇴하면 누군가에게 해꼬지 당해서 죽을 것 같다고 맨날 숨어서 살꺼라고 했는데


윤
거기서 아이들도 구하고.. 마을도 다시 세웠잖아..


윤
그 정도면 정말 잘 살다가 돌아가신 거 아닐까.. ㅎㅎ

윤이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지만, 씩 웃었다.

어릴 때부터 지민을 알던 윤이에 비해 옆에 있던 태형의 표정은 정말 비통하고 슬퍼보였다.


김태형 빅토르
사람은 모두 한번은 죽어야하니까... 그 의미가 중요하겠지만...


김태형 빅토르
지민이는 좀 무모했어요..


김태형 빅토르
내가 상황이 나빠서 돌아가자고 할 때도 그렇게 안 돌아간다고.. 흑...

태형은 유일한 친구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감싸안았고,

옆에서 보다못한 국이가 태형을 잠시 안아주고 어께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김태형 빅토르
/그렇게.. 떠나야한다고 말하는데도 /


김태형 빅토르
/듣지도 않고.. 아 진짜 나쁜 새끼... 흑.../


김태형 빅토르
..흑흑...


국
빅토르 형사님...


국
어릴 땐 정말 무섭기만 했는데.. 이렇게 눈물이 많은 분이셨다니..


국
오랜만에 뵈서인가.. 정말 달라보이네요..

국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태형은 국이 품에서 오열 했다.

국은 태형이 오열하는 동안, 말을 이어갔다.


국
난 이만하면 우리 삼촌 잘 살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


국
우리 셋 중에 유일하게 가족도 찾았고..


국
엄청 예민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국
난 삼촌이 자랑스러워... ㅎㅎ


윤
그래 우리 삼촌... 옛날 모습 생각하면... 헛되지 않게 잘 가신거야...

어린시절 죽음을 가까이하고 지냈던 탓인지 윤이와 국이는 지민의 죽음 앞에 재법 덤덤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윤이의 아이들이 신경쓰였던 여주는

아이들을 데리고 장례식장 앞의 주차장으로 나왔다.


유여주
그래도 누가 죽은 건 슬픈 일이기는 해.. 그치...?


아이들
으응......... 그런가...

아이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유여주
너네도 삼촌이랑 영상통화는 해본 적 있었을텐데..


유여주
최근에는 못 했으니까 기억이 안 나려나..


아이들
잘 모르겠는데..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하구... 엄마 키워주신 분..?

여주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도 괜찮다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장래식장 앞에 있던 벤치에 않았다.


아이들
이모는 그런데 결혼 안해...?


아이들
야, 그런거 엄마가 물어보면 안된다고 했잖아,

아이들 둘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유여주
아니야, 물어봐도 되는데..?


유여주
이모는 너네 봐주려고 결혼 안 하는 건데...?


아이들
우와~~~ 진짜...??

아이 하나는 좋다하고, 하나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살고 나서 진짜 행복해졌다고 하던데,


아이들
이모는 지금 같이 사는 사람 없잖아..


유여주
아닌데? 이모는 석진 아저씨랑 같이 살아..


유여주
그리고 이모 행복해..


유여주
너네도 있고, 윤이도 있고..

문득 지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막 피기 시작한 봄날의 벚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여주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해피엔딩은 아니잖아 ㅎㅎ


유여주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고 있는 걸로 충분한 그런 사랑도 있는 거지...


아이들
이모랑 우리처럼...?


유여주
딩동댕! 정답... ㅎㅎ


유여주
그러니까 이모 할머니되면 너네가 나 챙겨줘야해 알았지..?


아이들
당연하지!!!


유여주
산이라서 그런가, 바람이 차다.. 우리 다시 들어갈까...?

여주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여주이야기 fin.

세 편 안에서 끝내려니 분량이 길어졌네요.

함께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마지막 석진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