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03. 우연의 확률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

제 3화. 우연의 확률

기둥을 따라 둥글게 이어진 계단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온 사라는, 1층에 발을 딛자마자 멈춰 서서 이곳을 둘러봤다.

식물원 구석에서 계속해서 돌고 있는 물레 방아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서로 스치는 이파리들의 소리를 들으며 창문 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포슬포슬 내리고 있는 하얀 눈송이들.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지켜보던 사라는, 방금까지 지민과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향하는 손이었지. 정국에게로 향하는 통화 버튼을 누르기 위해.

"응, 이제 가려고. 너 어디야?"

정국이 알려준 주소에 해당하는 레스토랑으로 도착한 사라. 그 짧은 새에 눈이 많이도 내린 모양인지, 어깨 위에 작은 솜 같은 눈송이들이 제법 쌓였다.

레스토랑 내부를 찬찬히 훑어보다, 자리에 앉아있는 정국이를 발견하고서는 그곳으로 향했다. 음식은, 주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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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파스타랑 피자 시켰어.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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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당근 괜찮지. 내가 둘 다 얼마나 좋아하는데-.

앞에 놓인 물티슈로 손을 닦던 사라. 겉옷을 벗어두기도 전에 나오는 음식에, 행동조차 멈추고 감탄사 연발하며 음식에 시선 고정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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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보기만 해도, 가격대를 알 것 같은데?

사라가 조심스레 정국을 바라보면, 제 일 아니라는 듯이 마냥 해맑게 웃는 그. 이미 결제를 마쳤는지, 영수증을 공중에서 흔들어 보였다. 내 돈 아닌데,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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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부족한 것 같으면 더 시켜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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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어, 아니 아니. 괜찮아, 그렇게까지는….

다시 직원을 부르려 일어나려 하길래, 사라가 다급히 그런 그를 앉혔다. 충분해, 이것만 다 먹어도 내일 아침은 건너 뛸 수 있어.

·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는 두 사람 사이. 둘은, 지금을 만끽하며 접시를 하나 둘 비워가는 중이다.

그때 포크에 면 돌돌 말아서 야무지게 먹고 있는 사라를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는, 이내 수저를 내려놓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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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나 말할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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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응? 지금?

꽤 어두워 보이는 정국의 표정에, 사라 또한 마찬가지로 포크를 내려놓고서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너 뭐 나한테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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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런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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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러면?

사라가 내심 마음 졸이며, 정국이만 쳐다보고 있었을까. 끝내 미안하다고 말문을 여는 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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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오늘은 너 혼자 가야 될 것 같아.

갑자기 이 근처에 있는 대학교 선배가 연락 왔다. 술에 절여진 목소리로 자기 좀 데려가래. 여기 어딘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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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누구? 내가 아는 선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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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모르지. 같은 동아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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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지금 바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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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옆에 선배 한 명 더 있대. 자기는 일이 있어서 곧 가야 하는데,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는 옆에 있겠다네.

아-. 정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라는 물을 마시기도 잠시, 잔을 다시금 내려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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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근데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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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야… 내가 널 못 데려다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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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뭐야…ㅋㅋㅋ 언제부터 네가 날 그렇게 챙겼다고.

난 혼자 가는 거 좋아. 진-짜 괜찮으니까 사과는 사양할게요. 픽, 웃음 지은 사라가 말하자- 덩달아 정국이도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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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길치 한사라… 좀 걱정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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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됐네요-. 지하철, 버스만 갈아타면 되는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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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네 걱정이나 해, 너야말로 집에 어떻게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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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 선배 차 몰고 가야지, 뭐-.

등받이에 기대며, 냉수 벌컥벌컥 들이키는 정국이에 사라가 흠칫했다. 그 선배는 술 마실 거면서 차는 왜 몰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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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내 말이.

그렇게 몇 분을 더 이야기하다, 머지않아 정국의 핸드폰에서 울린 벨 소리.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정국이는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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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래- 수고가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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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 오늘 리포트는 내가 팀장님한테 메일로 보내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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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알았어, 너도 바로 집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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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어, 운전 조심해-

사라를 향해 가볍게 손 흔들어준 정국이가 점차 테이블에서 멀어지고… 어느새 레스토랑 출입구에 다다르더니 다시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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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집 들어가서 연락해, 바로 잠들지 말고.

그리고선 겉옷은 입지도 않고 여전히 팔에 걸친 채로, 전화기 손 모양을 만들어 제 얼굴 옆에서 흔들어 보이는 그였음을.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눈이 제법 내리긴 했지만… 살갗에 닿는 바람이 낯설어서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

차갑게 바짝 말라가는 건조한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자, 그나마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는 눈길을 걸으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 고요한 이 순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 길을 지나다니며 꽁냥거리는 연인들은 제외하고.

그렇게 생각을 비운 채로 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문득, 아까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는 거 있지. 지민이 말이야.

···

오랜만이네요, 우리. 라는 몇 안 되는 글자에 너의 진심이 눌러 담겨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았다.

너도 그 말을 큰 고민 끝에 꺼냈겠지만, 나도 그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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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러게.

어이없고, 바보 같았던 건- 대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는 것.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금 말을 걸어오는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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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방금 좀 미련 남은 사람 같았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넘긴 너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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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아니요, 전혀.

정확히 그 말을 끝으로, 서로를 마주한 채 서 있던 우리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스럽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거든.

너무나도 시시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당혹스럽기만 한 지금.

예상했듯이, 정해진 말들이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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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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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그럭저럭, 지냈어요. 지민 씨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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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글쎄요, 난 잘 모르겠네.

아까부터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거 있지. 난 내 탓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더 미안해 미치겠더라.

그렇게 생각의 늪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리기도 잠시, 얼마나 더 걸은 건가 싶어 왔던 길을 다시 뒤돌아 보는데… 많이도 왔네.

오죽하면 지하철역도 지나친 걸 모르고서.

아차 싶어,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는데… 발끝에서 제법 거슬리는 느낌이 났다. 시선이 아래를 향하면, 아니나 다를까- 풀려있는 신발 끈.

괜히 단화 신고 왔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릎을 굽혀 앉아, 풀린 끈을 다시 묶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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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라

……기분 별로네.

별다른 징크스가 있는 것도,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신발 끈만 풀어지면 불안한 마음이 생기곤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단단히 틀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꽉 묶은 신발 끈을 보며 이제 일어나야겠다 싶었을까.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또 다른 신발이 있었으니.

피해 가면 될 것을, 내 앞에 왜 멈춰 서 계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고개를 들려 하니까… 그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직도 그렇게 묶네."

낯익은 목소리도, 낯선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자체만으로도 단번에 누구임을 알 수 있는 그런 목소리.

순간 온몸이 굳게 얼어버렸다. 일어설 힘도 빠져버리고, 뒤늦게서야 부는 바람에 실려오는 낯익은 향수 향은… 머리를 종 울리듯이 울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향임을 무의식적으로 먼저 알아버린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내 발목을 붙잡던 사람이 내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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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그렇게 묶으면 계속 풀린다니까.

김태형. 한때 나의 마음을 앗아갔던 사람.

그리웠지만, 보고 싶지는 않았던 사람.

한때 나의 추억을 파고든 사람,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