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아고물
2화


아저씨의 옆집에 살던 시절.

그러니까.. 사고 이전에.

아저씨는 내가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때면 항상 나를 도와줬다.

친구들과 트러블이 있을 때나, 어려운 숙제가 있을 때 등

그런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혼자 아무도 모르게 키워낸 감정은 아저씨의 집에 들어가자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여주
아저씨. 좋아해요..


백현
.......

여주
아저씨?


백현
헷갈리는 거야. 네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여주
...아니에요.


백현
못들은 걸로 할게.

아저씨는 어떠한 여지도 남겨주지 않은 채 내 고백을 거절했다.

어쩌면 당연한 걸까, 그 날 이후로 아저씨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딱딱해진 말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사고가 난 뒤로 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원래도 잘 가지 않았던 학교였고, 공부보다는 그림이 재밌고 좋았다.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보냈다.

노트가 여러 장 넘어가면, 아저씨가 집에 오고는 했다.


백현
또 청소했어?

여주
네!


백현
청소 해주시는 분 오니까 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여주
그래도.. 기왕이면 깨끗하게 하루를 보내는 게 좋잖아요.

아저씨에게 거절 당한 이후로 마음 속에서 불안이 싹을 트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내가 부담스러워서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제 아저씨는 내가 완전히 싫어졌으면 어떡하지? 그 불안감은 온갖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더이상 혼자가 되는 건 싫어.

여주
아저씨! 나 어때요?


백현
놀러 가냐. 일 하러 가지.

여주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하잖아요! 괜찮아요?!


백현
그럭저럭.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마친 여주는 한참 동안이나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머리를 만지기도 했다.

그런 여주를 바라보던 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묵묵히 아침을 먹었다.


백현
밥 안 먹어?

여주
너무 긴장 돼서 먹으면 바로 체할 것 같아요.


백현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하지 않나.

여주
오늘만 패스할래요.

여주는 그렇게 말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백현
(저거 아까도 입었던 것 같은데..)


백현
데려다줄게.

여주
정말요??


백현
대신 오늘만이다. 가까우니까 내일부턴 버스 타고 가.

여주
왠열.. 대박이다. 고마워요!!

결국 제일 처음에 골랐던 옷을 입은 여주는 백현이 밥을 다 먹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신었다.

일하러 가는 게 그렇게 좋을까.

백현은 잔뜩 신이 나 있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여주
나 아저씨 차 처음 타 보는 것 같아요. 맨날 보기만 했지..


백현
그런가.

여주
담배 냄새 나요.


백현
...아니거든??

여주
나는데ㅡㅡ..

나름 관리한다고 했는데 티가 났나. 백현은 머쓱한 듯 방향제를 하나 더 꺼내 붙였다.

여주
(아저씨 담배 피는구나.. 냄새가 전혀 안 나서 몰랐는데)

차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담배 향이 의외였다.


백현
한여은이 이상한 짓 하면 말하고, 회사에 이상한 사람 있으면 말 해.


백현
일도 열심히 하고.

백현은 여주가 나쁜 말은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최근에 힘든 일을 많이 겪어 약해져 있는데, 되도록이면 좋은 것들로 여주 주위를 채워주고 싶었다.

한여은 회사에 이상한 놈들이 없어야 하는데.. 퍽 걱정스러웠다.

여주
나 오늘 예뻐요 아저씨??


백현
못생겼는데.

여주
...너무하다.

여주가 삐졌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입을 삐죽 내밀었으나 백현은 본 척 만 척 운전을 계속했다.

한번 정도는 예쁘다고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여주는 괜히 창밖을 내다봤다.

여주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안녕히 가시던가요.


백현
참 나...

예쁘다고 안 해줘서 그런가. 여주는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차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런 여주에 백현은 피식 웃으며 여주가 회사로 완전히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백현
(나도 출근하자 출근..)

여주
안녕하세요!! 김여주입니다! 아직 열아홉이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잘 부탁드려요.

???
헐 너무 귀여워..

???
세상에 나랑 8살 차이야 참말이냐..

???
몇 년만에 신입이냐 반갑습니다 여주님ㅠㅠㅠㅠ

엄마야..

여주는 엄청난 환대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여주
(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나.)

네 명 남짓한 사람들 사이에 여은은 없었다. 아직 출근 안 하셨나보다.

박언니
자. 우리 직원들 소개도 할게요. 내 이름은 박안나인데 그냥 박언니라고 해줘요.

박언니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은 스물아홉 살이고, 그래도 제일 어려보이죠?


박찬열
양심이 있으세요 박누나?

박언니
조용히 하세요. 방금 시비 건 쟤는 여기서 제일 어려요. 스물하나.


박찬열
박찬열이에요. 제일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하면 돼요.

그러자 발끈한 준면이,


김준면
뭐래. 그건 나지.

그런 둘을 힐끔 흘겨본 민석은 팔짱을 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김민석
..유치해.

여주
(다들 보통이 아니시구나..)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소개가 계속 됐다.

정리를 하자면, 29살 박안나 (박언니)


28살 김민석.


26살 김준면.


21살 박찬열.

여주
(이름을 언제 다 외우지..)

여주는 속으로 계속 이름들을 되뇌었다.

언젠간 외워지겠지..?


박찬열
사장님은 한시간 쯤 뒤에 오실 거예요. 워낙 날로 먹으셔서..

박언니
방금 그거 사장님한테 일러도 되나?


박찬열
박누나 진짜 치사해..

박언니
여주 양이 뭘 보고 배우겠냐.

여주
아.. 저.. 반말하셔도.. 되는데..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여주에게 꼬박꼬박 반말을 하는 직원들이 여주는 꽤나 신기했다.

어쩌면 처음 만난 사이니까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맙게 느껴지는 게 씁쓸하기도 했다.

박언니
그럼 그럴까??

그 뒤로도 한참이나 수다가 계속 됐다.

덕분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일을 안 하고 이렇게 떠들기만 해도 되나 싶을 정도여서, 여주는 슬쩍 눈치를 보다 질문했다.

여주
일은 안 해도 되나요..?


김준면
됐어. 어차피 신작 발표까지 넉넉해서 괜찮아 괜찮아.

여주
대박 좋은 회사네요...


김준면
꿀 직장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열리더니 옷을 멋지게 빼입은 여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주를 발견한 여은이 활짝 웃으며 여주에게 다가갔다.


한여은
여주 왔구나!!

여주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한여은
오구. 직원들이랑 인사는 했어?

여주
네! 다 했어요!


한여은
흠.. 그래? 텃세 부리진 않았겠지?

여은이 회사 직원을 뽑는 데에 있어 실력보다 우선으로 보는 것은 인성과 성격이었다.

그게 안 맞으면 일을 못 한다더라


한여은
오늘은 솔직히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민석이가 회사 구경시켜주면 되겠다. 작아서 구경할 것도 없기는 한데..


김민석
내가 왜.

사장님한테 반말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여은에게 반말을 하는 민석에 여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만 놀란거야? 나만? 자신과 같은 반응을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봤으나 직원들의 표정 역시 덤덤했다.


한여은
네가 제일 할 일 없잖아.


김민석
....귀찮게. 따라와.


한여은
30분은 돌아야 된다?


김민석
(1층짜리 회사를 어떻게 30분 동안이나 돌라는 거야)

민석이 낮게 중얼거리자 여주는 더 민석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여주
(무서워..)

여주의 얼굴에 무서워가 딱 쓰여있는 걸 발견한 민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김민석
보다시피 1층이 우리 회사.


김민석
여긴 휴게실이고, 저기도 휴게실. 그리고 저 쪽도 휴게실.

여주
...다 휴게실인가요?


김민석
회사에서 사장 성격이 보이는 법이지.

뭔가 납득이 되어버렸다..

여주는 민석의 말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작다고 했지만 한바퀴를 도는 데에 꽤나 오래 걸렷다.

민석이 천천히 걷기도 했겠지만 정말이지 작다고는 할 수 없을 듯 했다.

이런 회사도 있구나.. 새삼 놀라운 여주였다.


김민석
..너는 어쩌다 한여은한테 픽업 당했냐.

여주
아.. 제가 아는 분이 사장님이랑 친구여서..


김민석
그러냐.

여주
넵.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민석에 중앙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둘이었다.

여주의 손에는 민석이 자판기에서 뽑아준 코코팜이 들려 있었다.


김민석
..잘해보자.

민석은 처음으로 여주에게 웃음을 보였다.

여주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따뜻한 인상으로 변하는 게 놀라웠다.

간만에 일찍 한 퇴근이었다.

여주의 첫 출근을 축하하는 케이크도 백현의 손에 들려 있었고, 집에 다다른 백현은 혹시나 여주가 올까 서둘러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차마 옷 벗을 틈도 없이.

`카톡!` 여주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뭐 보나마나 올 때 메로나.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겠지.

백현은 대수롭지 않게 잠금을 풀고 카톡을 확인했다.

[아저씨! 저 오늘 회식이요! 저 환영회래요!] 오후 8시 26분

[저녁은 혼자 먹어요ㅠㅠ] 오후 8시 26분


백현
..밥 다 해놨는데.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케이크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잔뜩 놓여 있는 식탁을 보며 백현이 중얼거렸다.


백현
(초코 케이크 맞아 이거? 왜 이렇게 써.)

얇게 자른 케이크 조각들 중 하나를 입에 넣은 백현은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