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관전중

눈을 뜨고 나면 꿈속은 현실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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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미러는 왜 이런 재질로 만들어진 거지?

미러 바닥에 가만히 앉아서 실없는 말만 했다. 미러 속을 공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넓은 공간 때문에 말이 둥둥 울린다.

아까 김석진을 만난 경험을 떠올리면 다시 나가서 누군가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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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흐음.

그동안 조금이라도 학습적인 고민을 해야지! 나는 자리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미러를 쭉 한 바퀴 돌았다.

바닥은 투명하고 재질은 알 수 없는 호수라. 내 글에는 호수라는 것만 써져 있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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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어쩌면 이것도 전정,

아. 안 됨. 조심. 말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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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어쩌면 이것도 그 사기캐가 제작해 놓은 거 아닐까.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니는 데 재능 있는 것 같던데.

나는 미러의 벽을 쳤다. 역시 굉장히 튼튼하구만. 이렇게 튼튼하고 투명한 벽일 필요가 있나?

반대쪽도 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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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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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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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니니가갑자기들어와서, 놀랐으니까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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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인기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사기캐!

반대쪽 벽을 치려고 뒤를 돌자 전정국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몹시 편안해 보인다.

아 근데, 나 어제, 얘한테 유사 고백... 그러니까 ㄱ백 같은 걸 들었는데.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아 눈을 큼직하게 뜨고 전정국의 토끼 같은 눈을 마주했다. 절대 쫄면 안 된다. 한예화.

난 기싸움의 세계 서열 0 위. 할 수 있음.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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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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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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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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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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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안 가냐?

심히 진지한 표정을 하고 전정국의 말투와 똑같이 말했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넌 맨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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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수업 안 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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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미안한데 지금 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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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미친. 나 두 시간이나 밖에서 쓴 거야?

사실 이제 핸드폰이 생각날 것도 딱히 없긴 하지만, 핸드폰도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두 시간이라니 이런 잉여짓이 어디 있겠나 싶었다.

아, 갑자기 무지 슬퍼진다. 자기계발이라고는 하나도 안 하고 있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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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수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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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쨌지... 아, 핸드폰만 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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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뭐야. 그게.

생각해 보니 핸드폰만 있으면 해결될 일이 천지였다. 사진도 찍을 수 있고, 마음껏 딴짓할 수 있고, 비록 와이파이는 당연히 없겠지만 녹음이나 녹화라도 하면...

... 잠깐. 그래.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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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야!

손을 뻗으며 단말마를 지르자 전정국이 눈에 칼을 세운다. 사기캐도 놀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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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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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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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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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녹음. 녹음. 녹음! 여기 녹음기는 있을 거 아냐! 없어?

전정국의 깔끔한 미간이 구겨진다. 어떻게 이런 무협 만화 주인공 같은 짓을 해도 잘생겼냐, 너는.

단어로만은 설명이 안 될 기세가 낭낭해서 퍼뜩 손을 미러의 차가운 공중에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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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이렇게, 이렇게 네모낳고. 말하면 그게 녹음되는 그러니까, 기록되는! 아, 왜 그런 기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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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기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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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그래애!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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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

표정에서 감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생각이 없다면 없어 보이긴 한데.

... 진짜야? 진짜 없는 거임? 아니 무슨 놈의 대륙에 기계가 없대?

아. 얘네 마법 쓰지.

... 그래도 무슨 기계가 없어! 1 초에 한 번씩 감정을 바꾸는 신기술을 사용하며 전정국을 노려보는데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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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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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기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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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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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알아듣게 얘기를 좀 해.

전정국이 댓발 튀어나온 입술로 뻐끔거리고, 나는 그런 그를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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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사나! 사나가 분명히 뭔가 기계 쪽에는 능통할 거야, 아버지가 무기장이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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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무기랑 기계는 결이 좀 다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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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무슨 상관이야!

옛말에, 아니 대한민국 말에... 칼보다는 펜이 강하고 펜보다는 키보드가 강하다고 했지.

그리고 키보드로 없는 소리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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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조작된 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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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허.

튀어나온 쌉소리에 전정국이 헛웃음을 지었다.

난 한때 명탐정 삐난과 소년 탐정 김전삐를 굉장히 열심히 챙겨 본 경험이 있다. 이럴 때 뭘 해야 하는지 굉장히 잘 알고 있지.

그래, 사연 있는 악역이 되는 거야!

안 그래도 나는 각종 꼬리를 친다는 오명을 달고 있는 참이지. 내가 김태형을 너무 사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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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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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 그만 좀 읽어! 지금은 작전 타임이야.

아무튼, 너무 사랑하는 거다. 김태형을 너무 사랑하는 바람에 이여주한테 폭언을 하고 그 녹음기를 교무실이나 광장 앞에 놔두는 거지.

그리고 녹음기 위에 올려져있는 메모 한 장...

레임 한예화 인성 수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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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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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나 녹음기 구하러 갈게!

나는 급하게 미러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니까... 어쨌든 시도는 했다. 전정국이 공중에 둥둥 뜬 내 팔목을 붙잡아 멈추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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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야, 나 사나 찾으러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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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김태형을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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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 작전이지 그게 다! 다 거짓말이야!

완전히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사건건 내 몸을 다치게 하는 사건들의 릴레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잘생긴 놈을 짝사랑하는 것 정도야 포기할 수 있지.

내가 지금 급급한 건 녹음기를 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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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너 혹시 사람 목소리 기록하는 능력도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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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내가 앵무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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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그래? 그럼 꺼져!

나는 손을 뿌리치고 미러 밖으로 튀어올랐다.

아, 퇴학당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조금만 기다려요 벨라 언니~

작중 사나는 무기장이인 아버지를 두고 있다. 실런의 유명한 무기장이인 아버지와 중앙 스팀 장치 제어를 맡는 메카닉 어머니.

기계에 능통하지 않을 수가 없지!

물론 우리 엄마도 공부를 잘 했지만... 그에 반해 나는 그저 그런 중딩이었지만... 그건 지구고 여기는 판타지 행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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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 엄마 보고 싶다.

엄마, 엄마 딸 지금 유리에 대가리 맞고 퇴학하려고 수업 매일 째고 있어... 당연히 엄만 한예화 같은 딸내미가 더 좋겠지만 보고 싶다.

속으로 장황한 영상 편지를 쓰고, 나는 사나와 모모의 호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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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사나! 물어볼 게 있어. 잠깐 들여보내 줘!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는데, 대답이 없다. 문을 열러 나오는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이렇게 방음이 잘 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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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사나, 문 좀 열어 줘.

문을 열러 걸어오는 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설마 내가 자퇴하려고 노력하는 걸 얘한테 말 안 해서, 소문으로 들었고... 나한테 삐친 거면?

미친 그건 진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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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사나, 내가 사실은, 퇴학당하려고 자꾸 수업 째고 그랬던 건데... 소문으로 퍼질 줄은 몰랐어, 그건 말 못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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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근데 진짜 중요한 일이거든! 진짜 진짜로! 나랑 얘기 좀 해, 다 설명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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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니가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일이야.

휑하니 빈 복도에는 내 목소리밖에 울리지 않았다. 아니, 사나 양반. 이게 무슨 일이오... 내가, 내가 뻘짓을 했다니.

격렬하게 쪽이 팔린 나머지 세게 딛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예화의 얇은 신체가 흐무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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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우... 축복받은 몸이라고 운동을 안 한 게 문제였네. 앞으로 달리기도 좀 하고 그래야지...

하긴, 나는 방금 크게 외친 것처럼 수업을 째고 있다. 얘는 수업 하고 있을 텐데 헛짓거리를 했네. 참...

들고 온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옷의 장식술을 만지작거리며 쿠션이 붙은 문에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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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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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악!

순간, 문 너머로 작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서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사나의 목소리다.

내 목소리가 안 들렸던 건가? 아니면, 지금 누구랑 얘기를 하고 있나?

문에서 귀를 떼니 소리가 안 들리기에, 문에 손과 귀를 밀착시켰다. 지금 누가 문 열고 나오면 좆되겠는데...

흑흑. 사나 미안해, 염탐질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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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난... ... 없어, 너처럼 예화를... ...

???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어? 조지안이 우리를 배신했다고! 너도 한때는 한예화한테 당한 게 있었을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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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야! 무슨 말두 안 되는 소리야 그게!

???

생각해 봐, 한예화... ... ... 다 네가 준 거 알아.

아니, 안 들리잖아! 나한테 뭘 줬다는 거야 이 미친.

사나는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 한 명과 대화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싸운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으니까.

그런데 왜 싸우고 있는 거지? 수업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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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 미안한데 지금 쉬는 시간.

나는 몇 분 전에 전정국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아, 맞다. 쉬는 시간이랬지. 한예화 이 빡대가리... 전정국도 미안하다.

???

... 그래, 한예화는 아니더라도... ... 한이 있을 것 아니야?

와, 진짜 더럽게 안 들리네. 내 볼을 문에 구겨질 정도로 꽉 누르고 나는 안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한예화 캐리어의 무기들, 다 네가 빼돌려서 준 거잖아. 박지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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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아메리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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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메리 카프?

그, 미친 백금발? 걔가 왜 강다다를 대동하지 않았지...?

... 설마 벌써 배신 때리는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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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좆됐다.

너무 늦어 버렸다. 라테아르가 아메리의 도움을 받아 강다다의 뒤통수를 치는 순간은 굉장히 마지막, 그러니까 이여주가 남주와 사귀기 직전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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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너희 어머니가 코어 스팀을 관리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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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밀어 버리면 아무도 모르겠네. 미나토자키 가문 싹 다 뿌리 뽑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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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적당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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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왜? 당하기 싫어? 그럼 한예화를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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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내가 한예화를 반쯤 죽여 버리고... 그 대단한 전정국을 라탈에게 목 매게 할 테니까.

나는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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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자키 사나

절대 협조하지 않을 거야. 지민이가 옛날에 나한테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예화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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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그래~ 어련히 그러시겠지. 그럼 너희 집안도 싹 다 무너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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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카프 영지가 얼마나 넓은지 알지? 집사들 중에 몇 명만 보내도 너희 죽여버릴 수 있어. 그 대단하신 전정국이 안 넘어오나 보자고.

나는 다리로 바닥을 세게 딛고 문을 걷어찼다. 안에서 놀란 사나의 비명 소리와 문으로 뛰어오는 아메리의 발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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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 카프

씨바, 누가!

나는 아메리 카프의 눈을 붉게 만들었다.

그 짜증나는 아가리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장면이 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