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YSS : 생존일기]

EP 2. 나락

photo

EP 2. 나락





죽기 직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소리는 다행히도 그들에게 닿은 듯 했다. 다급한 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이내 현관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폭격기 소리보다 약해 귀를 싸매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한 양의 먼지와 함께 현관문이 부숴지고, 그토록 바라던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 살았구나.







"저기요!! 제 말 들리세요?!!"

"들리시면 무슨 말이라도 한 번 해보세요!!!"




눈물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사람의 음성이 이토록 반가운 줄 몰랐다. 성대와 입술이 마르고 굳어버려서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남은 힘을 쥐어짜내 겨우 팔 하나를 까딱일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다행히 그들의 눈에도 띄었는지, 곧바로 나의 맥박을 짚더니 살아있다며 소리쳤다.




"살아있어 오빠."
"외관상 큰 상처도 없고, 
오랫동안 못 먹어서 그런 것 같아."


"그럼 빨리 구역 밖 막사로 데려가자."
"북한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목소리와 호칭을 보아하니 남자, 여자 한 명에 남매 사이, 혹은 오빠 동생 사이인 듯 보였다. 막사니 구역이니 알 수 없는 얘기가 오고갔지만 물어볼 힘도, 의지도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순식간에 나의 어깨를 들쳐메고 업은 뒤 여자에게 쓸만한 것이 있나 보라고 말했다. 맘 같아선 이리저리 다 알려주고 싶었지만 애꿎은 잔기침만 계속 나와 환자 취급을 받았다.




"진정하세요. 저흰 수색대니까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친절하고도 강단 있는 목소리, 저절로 믿음직스러워지는 그의 말에 나는 완전히 경계를 풀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놀란 듯 나의 몸을 툭툭 치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이내 삐- 하는 이명이 들린 후 완전히 몸에 힘이 빠지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전쟁 8일차, "사람"에게 구조되었다.








_2022년 1월 26일 /수요일

photo

"으음..."




얼마나 지난걸까, 굉장히 오랜만에 맞이해보는 밝은 빛이 창 틈새로 쏟아져왔다. 일어나자마자 느껴진 것은 코를 통해 들어오는 맑은 공기. 먼지와 매연, 폭격 잔해라고는 1도 섞여있지 않은 신선한 공기에 절로 눈이 뜨여 마음껏 숨을 들이마셨다 쉬었다를 반복했다. 썩어 문드러진 폐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 같을 때 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밝은 목소리로 날 맞이했다.




"오!! 일어나셨네요?!!"




깔끔한 무채색 옷의 남자, 20대 중반쯤 보이는 앳된 외모의 그를 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딘지 익숙한 말투와 듬직한 목소리,

날 어둠 속에서 구해준 일행 중 한 명이었다.




"...감사합니다."


"네? 뭐가요?


"저... 살려주신 분, 맞으시죠?"


"...아...!! 기억 하시네요?"
"그때 갑자기 쓰러지셔서 정신없이 왔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에이 아니에요!
"다 살자고 그러는건데,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긴 대화도, 나의 음성도 오랜만이었다. 목이 많이 쉬었던 탓에 대화를 더 이어 나가지 못하고 켁켁거리자, 남자는 후다닥 물병을 집어들더니 나에게 권했다. 오아시스에서 건져올린 샘물 마냥 시원했다. 내 모습에 물이라도 잘 먹으니 다행이라며 웃어보인 그는 내 옆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많이 놀랐죠?"


"음... 낯설긴 했어요."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고..."


"처음 오신 분들은 대게 다 그렇죠."




남자는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아직도 영문을 잘 모르던 나는 그저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이에 직접 보는게 더 쉬울거라며 그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 한 광활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photo

"이곳은 생존 막사예요."


"...생존... 막사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들이었다. 들판 하나를 다 잡아먹을 듯 넓디 넓은 막사와 튼튼히 고정되어 있는 줄들, 그리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대체 이런 곳이 어디에 존재했던 건지 몰랐던 내가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남자는 입이 떡 벌어진 나를 보더니 천천히 구경하며 소개 시켜주겠다고 산책을 권했다. 체력은 쓰레기 같았지만 오랜만에 맡아본 상쾌한 공기가 꽤나 기분 좋아 제안을 수락했고, 우린 그렇게 막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생존자들이 살아가는 막사예요."
"원래 살던 만큼엔 못 미치겠지만, 
옷도 식량도 있을 건 다 있어요."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저랑 여동생이 이래봬도 건축학과 출신이거든요."
"저희도 집이 다 사라지고 난 뒤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이 막사를 만들고 생존자들을 데려오고 있어요."




그의 말을 대충 요약해보면 이러했다. 남자의 이름은 김석진, 여동생의 이름은 김유진. 남매는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시고 늘 둘을 의지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전쟁 발발 직후 집이 폭탄에 맞아 폐허가 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이 생존막사라고 한다.

근처에 아직 파괴되지 않은 전화국이 있어 희미하지만 전기도, 와이파이도 잡히고 근처의 마을을 모두 털어 식량과 옷가지, 비상용품, 사람들을 모아왔다는 것이다. 새삼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도 추진력과 실행력이 엄청나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전쟁통에서 말이다. 



"처음엔 저랑 여동생만 있던 막사였는데,
어쩌다보니 생존자 분들까지 들이고 있네요."
"물론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후회는 없어요."


"...그럼 이곳이 발각된다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거죠?"



예상치 못 한 나의 질문에 석진은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깊은 산 속이고 우리 국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며 그는 나를 안심 시켰고, 나도 불안한 마음은 잠시 접은 채 이곳 생활에 익숙해 지기로 했다. 

이곳의 룰은 간단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노약자, 아이들, 환자들을 제외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근처에 나가 식량이나 쓸만한 물건들, 따로 편성된 수색대는 생존자들을 데려오고 그에 합당한 하루 치 식량과 보금품을 석진, 유진 남매로부터 받는다. 

나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석진의 배려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달라진 전쟁 9일차가 지나갔다.







_2022년 2월 1일 / 화요일

photo

이곳에 온지도 벌써 6일째가 되었다. 나는 점차 일을 하기 시작했고, 막사 안의 사람들과도 조금씩 친해졌다. 이전에도 딱히 둥근 성격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전쟁중인 것 치고 예민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사람들 틈에 잘 녹아들 수 있었다. 

그리고 석진과도 급격히 친해졌다. 그의 나이는 27살, 얼마 되지 않는 동갑 친구라며 사근사근하게 대해주자 나도 저절로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의 동생인 유진과도 자주 숲 속을 탐색하러 나가면서 어느새부턴가 말을 트게 되었다. 

또한 이따금씩 들어오는 나 같은 생존자들이 바깥 상황을 조금씩 알려주었다.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때에 따라 막사를 옮길수도, 여차한 상황의 계획을 세울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photo

"오늘은 컨디션 좀 어때?"



한가한 점심시간. 오늘따라 배가 고프지 않아 밥은 패스하고 산 중턱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던 중, 석진이 어느샌가 주먹밥 두 개를 들고 다가와 자연스레 옆에 착석했다. 갓 만든 듯 아직 따뜻한 주먹밥을 건넨 그는 뭐라도 먹어두라며 나의 체력을 걱정했고, 나는 순순히 받아들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고작 밥, 참기름, 김가루만 있었지만 꽤 맛있었다.




"경치 좋지, 여기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리 군이 딱 막아서고 있는 곳 중 하나래."


"유일하게...?"


"...아..."




아차, 하며 입을 막은 석진이 뭔가 잘못 됐다는 듯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저 당황스러웠던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이기만 했고, 이내 낯빛이 살짝 어두워진 석진이 후-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photo

"사실...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진 않아."


"...왜?"


"어제 북쪽에서 들어온 생존자들이 말해줬는데, 
북한군이 남한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생존지를 찾아
무너트린 뒤 수용소에 잡아넣고 있대."


"북한군이...?"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턱 끝까지 온 상태야."
"유진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아마 조만간 막사를
옮기게 될 수도 있어."


"...그렇구나."



예상외로 덤덤한 반응에 석진은 나의 눈치를 살피며 괜찮냐고 물었다. 하긴, 이런 사실이면 누구라도 놀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 평이한 반응이라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고,
지금은 또 더욱 그런 상황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지금 당장 적군이 처들어온다 해도 이상할 것 없잖아."


"......"















"그냥... 살고 싶어."










그렇다. 지금은 아무리 나아진 생활이라 해도 전쟁통 한가운데, 아무리 군대가 지키고 있는 지역이라지만 언제든 뚫려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다. 당장 저 경계선 너머의 무법지대에서는 또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 당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그나마 멀쩡한 생활과 소통이 가능한 이 생활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우리 군도 슬슬 기세를 뒤집고 있댔어."


photo

"꼭 살아나갈 수 있을거야."


"...응."




나의 말에 다정스레 대답해 준 석진은 무릎을 훌훌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과 들판의 풀들을 흩날리게 했고, 덕분에 한 폭의 그림마냥 꽤 볼만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굉장히 오랜만에 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 때, 












photo

펑-














산 뒷편에 있는 막사에서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까만 연기가 치솟았다. 한순간 불어오는 후폭풍에 둘 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서로의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댑다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만은 제발 아니길.















제발.























유난히 길게 껴지던 비탈길을 오르고 또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온 우리는 무작정 막사를 향해 뛰었다. 이미 타오르는 듯한 연기와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막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졌고, 이내 우리는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photo

"꼼짝 마!!!"

"고개 숙여!! 항복해!!!"

"잡아!!!"




북한군이 처들어 온 것이다. 이미 막사는 난장판이 되었고 사람들은 북한군에개 붙잡히거나 바닥에 쓰러져 제 몸을 가누지 못 하고 있었다. 그와중에도 연신 울려대는 폭격음과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한껏 목청을 높였다.




"...이, 이거 무슨 상황이야?!!"


"나도 모르겠어... 우리가 없는 사이에 언제 이렇게...!!!"


"야!! 우선 도망가야지!!!"


"그치만...!! 유정이랑 사람들은!!!"





우리는 이 상황에도 실랑이를 벌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얼른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찬 내 머릿속은 김석진을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목소리가 더 높아지려는 찰나, 김석진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먼저 나의 손목을 놓았다.





"그럼 너라도 가!!! 난 유정이부터 구해야겠으니까!!!"


"시발... 미련한 새끼야!!!




김석진은 그 말을 끝으로 난장판이 된 막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어떻게든 그를 막아보려 애썼지만 이미 석진의 모습은 연기 속으로 사라진 뒤였고,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막사 반대편 산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뛰어가던 나의 뒷 편으로 작은 눈물 방울들이 함께 날리고 있었다.



















photo

"헉... 헉..."




무작정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총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팔이 긁히고 상처가 나도 아픈 것도 모르게.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하아... 하아..."
"따돌린건가...?"




어디쯤까지 달렸을까, 더 이상 뛰지 못 할 정도로 숨이 차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걸음이 멎었다. 위기를 벗어나고 보니 그제서야 김석진과 유진이, 사람들의 얼굴이 점차 떠올라 입술이 말라왔다. 지금이라도 가야하나 싶어 1초에도 몇천 번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그 순간, 





photo

탕-













"...으... 으으..."











총알이 내 옆의 나무를 비껴갔다.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선 온갖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는 중이었고, 눈 앞엔 온갖 장비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내 앞을 서서히 에워싸고 있었다. 느낌 상으로 좋은 편은 분명 아니었다. 




"잡아."

"네!!"




시발, 놔. 놓으라고!! 몇 번을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 입엔 이미 재갈이 물려지고 있었다. 굵은 밧줄로 내 몸을 꽁꽁 묶은 그들은 나를 거의 끌다시피 하여 죽도록 올라왔던 산비탈을 다시 내려갔고, 이내 사람들이 이미 가득 차있는 커다란 군용차에 나를 마지막으로 태운 뒤 막사를 빠져나왔다. 

군용차가 그곳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바라본 막사의 풍경은 모든 것이 부서진, 예전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것이 뒤집히고 또 뒤집힌 그 날이, 그렇게 허무한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갔다.












_2022년 2월 2일 / 수요일

photo

군용차는 날이 새도록 달리고 또 달려 이내 민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망한 땅에 다다랐다. 바퀴가 서서히 멈추는 듯 하더니 이내 차는 금방 세워졌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북한군이 들이대는 총부리에 몸을 움찔거리며 일렬로 섰다. 거기에 내가 있다는게 무척이나 분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서자 담뱃대 하나를 입에 문 웬 장교가 나타나 돌하르방 마냥 우뚝 솟아나온 배를 매만지며 우리를 스캔했다. 뭘 보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온 몸이 묶인 입장에서는 호랑이 앞 하룻강아지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장교는 한참 우리를 바라보더니, "너, 너, 너." 하며 손가랏으로 몇 사람을 지정해 다른 곳으로 보냈다. 나를 포함한 남은 사람 열댓명은 다시 위협을 받으며 또 다른 어딘가로 옮겨져갔다. 














터벅- 터벅- 약 한 시간을 걸어 모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멈추었다. 행렬의 맨 뒤에 있던 나는 앞의 풍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photo

인간이 만든 곳 중 가장 악명스럽고 잔인한 곳, 














포로수용소에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