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 홀릭

[글] 질투가 없는 곳엔 사랑도 없다, 모짜렐라맥치킨

모짜렐라 맥치킨 작성


질투가 없는 곳엔 사랑도 없다.

*

오늘이, 그....영하 몇 도라더라. 눈을 뜨자마자 잠결에 언뜻 확인했던 숫자가 가물가물했다. 어쨌든 그 수치가 중요한건 아니였다. 확실한 건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춥다는거였다.

덕분에, 줄곧 주머니에 넣어두었음에도 손이 꽁꽁 얼어붙어버린 탓에, 도어락 위에서 몇 번 헛손질했다. 손목에 걸린 마트 비닐봉지의 무게도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보다도 이 다음에 펄쳐질 상황이 신경에 거슬렸다. 안에 있을 룸메이트가 예민한 시선으로 현관을 노려보고있을 장면이 벌써 눈에 선했다. 추운데 어떡해, 그럼. 그러나 비밀번호를 틀리기는 커녕 버튼을 누르는 박자마저 매번 똑같은 녀석을 떠올리며 꿍얼거림을 목 뒤로 삼키고 겨우 잠금을 해제했다.

기계음과 함께 돌아간 잠금장치가 반짝 불을 밝혔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익숙한 현관 앞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양치를 하고있었는지, 화장실 문 밖으로 삐죽 고개을 내밀고있던 정태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쏙 몸을 숨겼다. 이젠 인사도 안 하겠다 이거지. 확 화가 치솟았으나 꾹꾹 감정을 눌러 참았다. 장을 봐 온 것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뒤 신경질적인 손길로 비닐을 벌렸을때였다. 안에 들어있던 귤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때굴때굴 굴러갔다.

나는 순발력을 발휘해 그 귤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귤은 야속하게도 주인의 손을 떠나 화장실 문 앞까지 굴러가고 말았다. 정확히는, 작은 투룸 바닥에 보드마카로 주욱 그려져있던 검은색 선 너머까지....

양치를 마치고 나오던 정태호가 그 앞에 턱 멈추어 섰다.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태호는 허리를 숙여 잘 익은 주황색 귤을 주워들었다. 순간적으로 입에서 '저 또라이가?' 라는 욕설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모면했다. 

"잘 먹도록 할께."

"ㆍㆍㆍ그거 바닥에 굴러떨어진 거거든?"

정태호는 대답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선을 넘어왔으니 이제 이 귤은 제 물건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는 정태호의 등을 보자 화가 치솟았지만, 언성을 높이고 싶지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덜 정리된 비닐봉지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방으로 들어와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당장 따라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문밖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외투를 던지듯 벗어놓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 유치한 싸움이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 채였다. 원래도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였고, 정태호는 집안일에 깐깐해서 잔소리가 원래도 심했지만, 이번 싸움의 계기는 그것보다 훨씬 싱거웠다. 애초에 싸울 만한 이유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수준이였다. ㆍㆍㆍ그래. 인정한다.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내 잘못이였다. 내 잘못이긴 한데.....

*

말싸움의 발단은 정태호가 같은 수업을 듣는 후배에게서 받아온 선물로부터 비롯되었다.
잘생긴 외모 덕분인지, 원래도 잔뜩 사심이 담긴 선물들을 한아름씩 가지고 왔었지만, 오늘은 그 날따라 왠지 신발장 앞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곰인형과 꽃다발이 아니꼬워 보였다. 게다가 식탁 위에서 떡하니 자리 잡은 하트 무늬 편지와 수제 케이크를 봤을 때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샤워를 하고 나오던 정태호에게 대뜸 언성을 높인 것은.

정태호로써도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한번도 이런 일로 입을 뗀 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화를 냈으니까. 공용 공간에 이런 물건을 둘 거면 미리 양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술술 뱉어내던 나는 몇 마디를 주워 삼키다가, 그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간수할 자신도 없으면 그냥 버리던가."





퉁명스러운 중얼거림에 정태호도 덩달이 불이 붙은 모양이였다. 매서운 말투로 곧장 대거리를 했다. 언쟁은 한참을 더 오갔다. 내 공간 네 공간이 어딨냐며 싸우던 것이 결말은 바닥에 보드마카로 찍 선을 긋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선 안은 내 공간, 이 선 너머는 네 공간.

*

정태호와는 건너건너 소개를 받아 처음 만나게 됐다. 당연히 연애적인 소개는 아니였고, 룸메이트로써의 소개였다. 그 후 같이 투룸에서 살게 되면서 얼굴을 맞댈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태호가 나를 룸메이트로 받아들인 것도 월세와 관리비를 아끼기 위함이겠지. 내가 그 녀석의 특별한 무엇이었기 때문에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웃기지도 않은 일이였다. 그냥저냥 데면데면한 사이임에도 내가 정태호에게 딴 마음을 품어버리고 만 것은.

처음 그 녀석에 대한 감정을 자각했을 때부터, 구태여 고백을 할 생각은 정말로 없었다. 정태호라면 나를 분명 내쫒거나 본인이 짐을 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나는 남은 기간동안 내 마음을 숨길 생각이였다. 녀석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내 손으로 끊고싶지 않았다.

*

나는 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아니, 애인 사이도 아니고, 남은 기간동안 사이좋게 지내도 모자를 판에 이딴 수준 낮은 싸움을 하다니. 절로 미약한 한숨이 섰다. 정태호도 질렸을까. 금방이라도 이 문을 열고 그에게서 룸메이트를 그만 두겠다는 소리가 나올꺼 같아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뭐 어쩌겠어. 인과응보구만.


한참 뒤 문을 열고 거실로 발을 내딛었을때, 굳게 닫힌 정태호의 방문을 힘 없이 응시하다가 다시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나빠졌다. 그 원인은 정태호도 아닌 나란걸 알았을때, 나는 문득 정태호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ㆍㆍㆍ

수요일은 특히 성가신 날이였다. 그 날은 정태호와 나, 둘 다 일 교시 강의가 있었으니까, 아침부터 필연적으로 얼굴을 맞대야했고, 당연하게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너, 방금 넘어왔지?"

"아, 안 넘어왔다고!"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하며 나는 그를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들어갈려고 했다. 팔을 뻗은 정태호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야! 나 지각..."

"넘어왔으니 내꺼잖아. 그게 약속 아니던가?"

허, 어이없는 헛웃음이 터졌다. 살짝 넘어간 오른 발이라도 잘라줘야 하나? 나는 내 옷을 쥔 녀석의 손을 잡았다. 정태호가 흠칫 놀라며 나를 째려봤다.

"너도 손 넘어왔거든?"

"이건 니가 억지로..."

억울하면 없던 일로 치던가. 웃으며 덧붙이고 나서는 몸을 돌리려고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정말로 지각이였다. 그러나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내 어깨를 붙잡은 건 정태호였다.

"나 아직 합의 안 했다?"

ㆍㆍㆍ진짜 미치겠네. 아무래도 유치하게 구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좀 있다 수업 끝나고 와서 얘기해."


...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왔을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태호는 오늘 아무 일정이 없다고 알고 있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팀플이나 술자리 같은 게 생긴거겠지, 그렇게 추측할 뿐이였다. 정태호와 나는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였으니까.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책을 몇 편 읽을때까지도 정태호는 들어오지 않았다. 시각은 열한 시를 지나 열두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ㆍㆍ기분이 갑자기 울적해졌다. 배게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태호를 좋아한다. 좋아하지만...가망이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달랬음에도 욕심은 조금씩 자라났다. 질투가 났다. 그 녀석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차라리 내가 그 선을 넘어버리면. 나는 네 것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저 너머 선을 성큼 침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감정은 오직 '질투'뿐 이였으니까.


ㆍㆍㆍ

적막을 깨고 도어락의 소음이 들려왔다. 언제나 정갈하게 울리던 기계음이 한 번 삐끗했다. 평소보다 느린 박자로 숫자 키패드가 입력되고,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너 술 마셨어?"

좁은 문틈으로 알코올의 향이 확 끼쳐왔다. 술을 많이 마신건가. 좀처럼 취하지 않는 녀석이라 조금 놀랐다.

"김현민..."

입술을 꾹 물고있던 정태호가 아주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언제나 덤덤하던 정태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정태호에게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어라 반응을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농담처럼 지금 너 선을 넘어온 것 아니냐고 대꾸하며 그를 방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그러나 정태호가 기다린 것은 내 대답이 아니였는지, 그가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가지마."

"뭐?"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절로 얼굴이 굳었다. 녀석이 말을 하면 할수록 내 머릿속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술은 왜 마시고 온거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분 좀 풀어. 내가 잘못했ㆍㆍ"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던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쓰러지는 정태호를 받았다. 기분을 풀다니, 그런 수식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명백히 잘못한 일이였다. 시비를 건 것도, 사과할 결심도 못한 것도 나였다.  불현듯 목이 따끔거렸다.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쓸데없는 기대감이 몰려왔다. 

ㆍㆍㆍ

나는 내 무릎을 덮은 더운 체온을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이나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그를 일으켜 세우기엔 힘이 부족했다. ㆍㆍㆍ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흘러내린 정태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거실이 조용해서 심장 뛰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내 심장 소리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는지, 왜 나에게 나가지 말라고 한건지. 당장 정태호에게 묻고싶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술기운에 발갛게 달아오른 정태호의 뺨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장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이건 질투 안 하기로 했다. 그야, 정태호는.

선을 넘어와 버렸으니까. 서로의 공간을 침범한 건 모두 상대에게 주기로, 그게 정태호와 나 사이의 약속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