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영혼의 발자취

10. 이상현상, 다가오다. (4)

눈동자 위로 물감이 떨어진 것처럼 시야는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고, 마치 섬광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뇌까지 뚫고 들어오는 격한 눈부심이 심히 고통스러웠다.

아, 시신경이 불타는 느낌이다. 점점 시야가 트일 때까지,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엎어진 자세 그대로 가만히, 시야가 트이길 기다리며 외쳤다.

 

“하민아! 하민아!! 너 괜찮아!!?”

 

섬광탄이 왜 무기인지 몸으로 느끼는 이 순간이 고문이 따로 없어, 눈물이 찔끔 흐르는 것을 팔뚝으로 벅벅 비비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서 생긴 몸의 통증은 어느 정도 사그라든 뒤였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평소보다 반토막 이상 낮아진 시야에서 주변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 이, 이게 뭐야?”

 

뭔가 터졌을 때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겠거니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생경한 광경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민이 주변으로 반경 2m 정도의 붉은 빛이 나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 내 발치 앞까지 그 붉은 영역인지라, 그가 날 세게 밀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 원 안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붉은 영역 한 가운데에, 하민이가 낚싯줄 같은 끈에 칭칭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최악의 상황만 가정되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손을 덜덜 떨었다. 한 걸음 떼어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오지 마요!”

 

다행히 의식을 잃었던 건 아닌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벌떡 들어서 내게 외쳤다. 그 외침을 듣고 나서야 긴장으로 경직된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참고 있던 숨이 트인 것도 순간이었다.

 

“휴우…. 괜찮아? 이건 아까 그 녀석들이 설치한 함정인 걸까?”

“아무래도…. 여기에 발을 묶어놓으려 한 모양인데요.”

 

긴장이 풀리고 나니 주변을 살필 여유가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땅에는 넘어가면 큰일 날 것만 같이 생긴 선이 기분 나쁘게 빛나고 있었다.

원의 동, 서, 남, 북  네 군데에 내 팔뚝만 한 굵기의 기둥이 높게 세워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낚싯줄로 포박된 하민이가 쓰러져있는 모양새였다.

뭔가 하민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기분이어서 보기가 영 좋지 않은걸.

음, 보통 판타지에서 이런 기둥이 마법진 같은 걸 만드는 매개체로 쓰이던데, 혹시?

 

“이걸 부수면 이 함정이 없어지지 않을까?”

 

손바닥을 기둥에 가져다 대니, 겨울철 대리석 바닥을 만지는 듯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단순하게 이걸 만지는 것만으로는 딱히 큰 위협은 없었다.

맨손으로 부수려고 도전했다간 기둥이 아니라 내 뼈가 박살이 날 것이 분명했기에, 쓸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아, 잠시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소화전 근처에 놓인 빨간색 소화기였다. 공공장소라면 어딜 가든 놓여있는 그거!

유레카! 저걸 휘두르면 이 정도는 금방 부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도도도도 달려가 냉큼 소화기를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들고 휘두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간다! 채봉구 스매시!”

 

빨간 소화기의 윗부분을 단단하게 잡고 기둥 하나를 부수기 위해 달렸다.

달리는 에너지를 파워로! 이얍! 간다!

 

‘쾅!’

 

돌 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둥이 박살이 났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기분 나쁜 색으로 빛나던 검붉은 선의 빛이 조금은 사그라든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클리셰가 정답이구나. 역시 이 기둥을 부수면 되나 봐.

 

“형, 머리 좋네요.”

“이 정도 쯤이야!”

 

이 기세를 몰아 옆에 있는 기둥도 부수기 위해 열심히 뛰어 소화기를 휘둘렀다. 채석장 돌 캐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덤으로, 여기까지 오면서 반 이상은 하민이의 도움을 받았는데, 인제야 내가 큰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싶어 기쁜 마음도 살짝 있어 정말 신명 나게 돌기둥을 때려 부쉈다.

 

“두~울! 세~~~엣!”

 

출구가 코앞인데,

 

“라스트!”

 

얼른 같이 나가야…!

 

“형. 저기….”

“으어?”

 

마지막 기둥 하나를 박살 내고 이젠 다 했다는 생각에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는데, 하민이가 곤란하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들고 있던 소화기를 땅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니, 전부 부쉈다고 생각했던 기둥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안색이 절로 창백해졌다.

 

“뭐, 뭐야? 이거.”

“형이 세 번째 기둥을 부수려고 뛰어가던 때, 첫 번째 것이 전부 복구됐었어요.”

 

그 말이 사실인 듯, 방금 부쉈던 마지막 기둥 파편이 허공에 떠올랐다. 점점 부서진 조각이 맞춰져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시야에 담겼다.

돌기둥은 복구되고, 내 마음은 부서지고. 절망적이다.

 

“…. 이 함정을 없애려면, 형 말대로 기둥을 부수는 게 맞긴 한 것 같아요. 문제가 있다면, 기둥이 복구되기 전에, 네 개를 거의 동시에 부숴야 한다는 거죠.”

 

포박된 채로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하민이가 기둥을 훑어보며 말했다.

 

“…. 안 되겠다. 형 먼저 밖으로 올라가요.”

“뭐!?”

“함정이 발동된 이상,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까. 차라리 함정에 안 걸린 형이라도 빨리 나가는 게 맞아요.”

 

 

자신을 두고 가라는 소릴 담담하게 하는 목소리를 듣자, 생각이 멈추고 피어오른 두려움이 다시 심장이 거세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민이를 두고 혼자 가라고?

 

‘왜, 이번에도 저 애를 혼자 두고 가려고?’

 

…. 누구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뇌 내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이런 곳에?

하민이만 혼자 두고,

어떻게?

 

“내, 내가 조금 더 열심히 뛰어볼게. 그럼 재생되기 전에 다 부술 수 있을지도 몰라.”

“형, 고집부릴 때가 아니에요.’

‘그래, 도망쳐봐. 그럼 저 애는 또 너희를 그리며 평생 혼자 남겠지.’

 

누가 도망친대?

 

‘겁쟁이. 도망쳐야지. 저 애는 너와 달리 강하니까. 누구랑 다르게 혼자 둬도 괜찮을걸.’

 

자꾸 들리는 환청에 울컥해서 더더욱 혼자 갈 수 없기에, 다시 한번 소화기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 도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질책하는 것 같은 그 말투는 분명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속내엔 절대로 저 아이를 혼자 둬서는 안 된다는 뼈가 있는 듯한 말이 숨어 있었다.

 

‘쾅’

 

한 번.

 

‘쾅! 쾅!’

 

두 번.

 

‘쾅! 쾅! 쾅!’

 

…. 세 번.

 

“형, 안된다니까.”

 

여덟 번째쯤 도전했을 때, 기도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체력이 떨어질수록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두 개쯤 더 부쉈을 때, 체력이 다해 바닥에 추하게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소화기에 힘을 싣고 휘두르면서, 빠릿빠릿 다리를 움직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네 개를 동시에 부수는 건 역부족이었다. 빠르게 해봤자 네 번째 것을 부수려 휘두르는 순간 첫 번째 기둥이 복구되었다.

 

“헉…. 헉…. 왜, 왜 안 되는 거야….”

 

바닥에 엎어져서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힘을 쓰며 거세게 달려서 그런지, 뺨을 타고 땀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봉구는 다리가 참 빠르구나.’

‘우리 반 달리기 1등은 봉구에요!’

‘3반 채봉구 학생! 이어달리기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지금까지 달리기가 빠르다고 칭찬받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뭐 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느려서 성공조차 해내지 못하고 있는데.

 

“한 번…. 한 번만 더.”

“형. 그만….”

“할 수 있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두 다리로 몸을 버티는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천천히 돌아옴과 동시에 몸이 휘청거렸다.

 

‘쿠구궁-’

 

하지만 운명은 내게 절망만을 안겨주려 하는 모양이다. 아까 전처럼 지진이라도 난 듯,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요란하게 흔들리고 별 탈 없이 끝났던 아까 그 흔들림과 달랐다는 거다.

 

“형 어서 위로 올라가!!”

 

이번에는 진짜로,

 

“쓸데없이 고집 부리지 마!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민이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빨리 가!!”

‘그래, 도망가. 넌 아무것도 못 하잖아.’

 

싫어. 안 가.

 

‘바보 아니야? 머리통도 깨 먹더니, 이번에는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몰라. 그런 거.

 

‘지금 네 속도로는 함정을 깨부술 수 없어.’

 

알 게 뭐야.

 

‘저 애는 지금 네 목숨 살려보겠다고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너는 그걸 내던질 셈이야?’

 

몰라. 모른다고.

 

“싫어!!”

 

아는 건 단 하나뿐이야.

 

“나는 너 두고 절대 못 가!!”

 

저 아이를 묶고 있는 기둥을 다시 한번 부쉈다. 하지만, 아무리 부수고 부숴도. 내 느린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점점 현실이 나를 진흙탕에 처박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로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뺨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허겁지겁 달리느라, 하민이의 표정이 어떤지는 볼 수 없었다.

끊임없이 뛰어다녀서 귓 속에서 삐- 소리가 들리며 눈앞이 캄캄해질 무렵,

아까보다 더 선명한 환청이 귓가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들어왔다.

 

‘도움이 필요해?’

 

도와줘.

 

‘어떤 도움을 원해?’

 

하민이와 함께 도망칠 수 있게 해줘.

 

‘진심이야? 어찌 보면 저 애는, 너와 만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내 심장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

 

저 애를 절대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하고 있으니까.

 

‘좋아. 네 생각 잘 들었어.’

 

체력을 다 써서 까맣게 변해버린 시야에, 누군가가 나타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뻗어진 손을 동아줄이라 생각하여 덥석 잡아 일어서니,

나의 귓속으로 계속 환청을 들려주던 존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같이 구해보자고. 우리 ‘막내’를.’

 

그는 예전에, 꿈에서 보았던. 사이버펑크 시티를 빛과 같은 속도로 빠르게 누비던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