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저격

순백 결핍

앙칼진 목소리가 유치원 복도에 울려 퍼졌다. 김남준이 내 손을 세게 붙잡고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 밑을 붉게 물들이고서는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내 품에 본인을 들이박았다. 그러더니 잡고 있던 한 쪽 손을 자신의 등 부근에 옮기고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어른들 사이에서 난 그냥 김남준의 등 부근을 토닥였다. 엄마가 남준이 잘 챙겨주라고 했으니까 예쁘게 대해줘야지. 그 생각 하나 만으로 김남준을 끌어 안았다. 그 썩어빠진 애정결핍과 집착이 어떤 일을 초래할지 상상조차 하지 않은 채로.
















Gravatar
순백 결핍













정하얀. 특이하다 못해 놀림당하기 딱 좋은 이름이었다. 다만 하얀은 그 이름이 자신에게 붙여질 때부터 김남준과 함께 지내, 혼자 동 떨어질 걱정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남준의 부모가 맞벌이었기에 남준을 혼자 두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리하여 그들의 친구인 하얀의 부모에게 부탁하여 남준을 하얀의 집에 자주 머무르도록 했을 뿐. 처음에는 남준이 하얀을 보자마자 세차게 울음을 터트려 하얀의 엄마가 꽤나 애를 먹기도 했었다. 잠시 당황했던 하얀은 꼭 붙잡고 있던 엄마의 다리를 놓고 남준의 앞으로 걸어갔다.



"네가 남준이야?"

"..."

"친구 할래?"





고사리 같은 손을 눈 앞에 내밀자 남준은 단 한치의 고민도 없이 단숨에 하얀의 손을 움켜 쥐었다. 눈에 고일 틈도 없이 눈물 방울이 거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짧디 짧은 그 잿빛 손가락과 그에 비해 새하얀 손바닥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이는 하얀이 남준의 손을 잡고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남준은 유독 하얀에게 집착했다. 하얀을 원하고, 하얀과 함께 하길 바라고, 하얀 곁에 저 말고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 불순하고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다가도 정신 차리라며 머리도 자주 쥐어 뜯을 때부터 결심했다. 앞으로 하얀이 하는 모든 행동에 관심을 가지지 말자고. 그게 무려 열여섯 때의 다짐이었고, 방금 성인이 된 1월 1일에는 이런 다짐을 했다.





"좋아해."

"뭐?"

"좋아한다고···."




절대 정하얀 앞에서 술을 먹지 말자. 지독한 우정이라고 생각했고 하얀에게도 이 결론이 더 수용하기 쉬울 것 같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준은 불가항적인 순백에 기어코 무릎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이건 모두 하얀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결말은 취중고백이었고 이 일은 다행히 쓰레기 같은 그녀의 주량과 필름에 의해 없던 일처럼 흘러갔다. 오로지 자신만 기억하는 흑역사와 다름 없었다.



다만 그렇게 일이 지나간다고 해서 남준의 마음이 다잡아진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긴 커녕 하얀을 볼 때마다 커지는 마음에, 한때 도주까지 감행한 적이 있을 정도로 순백에 대한 집착이 커져갔다. 하얀이 조금이라도 집에 늦게 들어오면 제아무리 옆집이더라도 하얀의 집에 머물러 있거나 1층 현관을 서성였고, 하얀이 술 자리에 갔다면 기어코 술집을 찾아내 하얀을 직접 집까지 데려왔다. 이로써 남준은 스스로 세뇌를 멈추고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Gravatar
"또 늦네, 술고래 새끼···."



나 정하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집착하는 것 같다.









***






하암. 하얀이 짧은 하품을 하며 고개를 둘러보았다. 나 어떻게 침대까지 걸어온 거지. 온몸이 쑤시는 데다가 위가 역류라도 하는 듯 온통 속을 긁어놓고 있어서 얼큰한 걸 먹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토기가 일어 구역질을 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술을 잘 먹는다지만 역시 3일 연속은 무리였나. 오늘도 또 가야 하는데···.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는 라면 냄새에 조심스레 방문을 열면 익숙한 등치가 주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주방에서 당장 나와."

"나도 라면은 끓일 줄 알아."

"됐고 내가 할 테니까 먹기나 해."



익숙한 그 등치가 김남준이라는 걸 알아챈 하얀은 식겁하며 남준을 소파에 앉혔다. 아직 계약 기간도 한참 남은 집을 다 태워먹고 싶지 않았으니까. 라면 정도는 끓일 줄 안다며 툴툴거리는 남준을 챙길 새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라면을 지키기 위해 가스를 끄느라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말했지. 우리 집 오는 건 좋은데 제발 주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냉장고에 컨디션 있어."

"그래 그건 고마운데 주방은,"

"라면에 콩나물도 넣었고."

"그래 알겠다고. 근데 주방은,"

"아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사 왔어."

"헐."



남준은 하얀을 너무 잘 알았다. 어떻게 해야 잔소리를 피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결말이 감사 인사로 끝나는지는 무려 예전부터 터득한 방법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콩나물이 잔뜩 들어간 라면과 아이스크림 하나를 까먹어야 속이 진정되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아침부터 일어나 온 슈퍼를 돌아다닌 남준이었다. 나도 참 지극정성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 오늘 공강이야?"

"아니. 너 때문에 재수강 하게 생김."



천천히 라면을 먹던 하얀의 동작들이 서서히 느려졌다. 쟤 지금 뭐라고 했어···? 남준의 말대로라면 자체 공강 뭐 이딴 거라도 했다는 소리인데 이미 남은 결석 일수는 다 채운 걸로 알고 있으니, 진짜 남준이 재수강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미친놈. 육성으로 내뱉자 어차피 너도 재수강 해야한다며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깔깔 웃어대는 남준이었다. 죽여버릴까. 이를 바득 갈면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는 집에 가보겠다며 도망갈 추세를 보였다.



"어딜 가."

"아씨, 내가 너 이 버릇 좀 고치라고 했지."

"아, 미안."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후드티 모자 부근을 확 잡아당겨 남준을 붙잡자 예상대로 우당탕 넘어져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하얀을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모자를 잡으면 당연히 미끄러지지, 이 띨빵아. 미안하다며 남준의 소매에 매달려 애교를 부려대자 한동안 붉은 뺨으로 구시렁거리더니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 보이는 속을 왜 굳이 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남준은 투명했다. 적어도 하얀한테는 그리 보였다.



Gravatar
"돌겠다, 진짜."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남준의 모습은 그저 짝사랑을 하는 한 청년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다만 자각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었다. 김남준은 정하얀에게 '집착'하고 있다. 그 말은 즉슨 정하얀의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있기를 바랐다는 뜻이었다. 때때로 스스로도 자신이 미친놈 같다는 걸 알면서도 집착을 멈출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수순이었다.



집이 망했다. 정확히는 가정의 내부가 망했다. 두 분 다 맞벌이셨지만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당한 재산이 생기면 이혼하기 위한, 자신을 지킬 돈이었고 남준에게 돌아오는 관심이란 한치도 없었다. 어린 남준에게 그런 결핍을 남겨둔 채 하얀의 집으로 보낸 것부터 문제였다. 처음 느껴보는 따스함에 무한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기한 없는 집착의 서막이었으니까.



"한 번만 더 까불면 진짜 절교할 거야."

"··· 너도 날 버릴 거야?"

"갑자기 뭔 소리야."

"너도 날 버릴 거냐고. 나는, 난 이제 너 밖에 없는데 너도 나를, 나를···."



장난스럽게 꺼내는 말에도 남준은 웃을 수 없었다. 하얀을 처음 만난 그날부터 이미 하얀은 남준의 하루, 어쩌면 그 이상인 인생을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하루는 온통 너 뿐이야. 책에서 나올 법한 인용구가 남준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정말이야. 내 하루에 네가 없다면, 나는···. 남준이 숨도 못 쉬며 헐떡였다. 와중에 말장난 하다 갑자기 울어버리는 남준을 본 하얀은 5살 그 유치원 복도처럼 남준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품 안에 가득 차는 남준과 그때 그 남준이 겹쳐짐과 동시에 괴리감을 느꼈다.



"버리지 마."

"안 버려, 안 버려."

"네가 날 버리면 난,"

"······."

Gravatar
"그냥 죽어버릴 거야."



정말 굶어 죽어버릴 거야. 너의 싸늘한 시선에 수천 번을 베여 사랑과 정에 목말라 비틀어진 채로 쓸쓸하게 죽어버릴 거라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버릴 거야.



광기 서린 눈과 당황 어린 눈이 맞닿았다. 비록 조곤히 내뱉는 말이었지만 하얀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이라도 저가 남준은 떠나면 죽어버릴 것 같은 어투라서. 진짜 이 녀석이 금방이라도 시체처럼 싸늘해 질 것 같아서 장난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 뿐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버려."



그리고 누군가는 오직 이 한 마디로 삶의 이유가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남준이 하얀의 어깨에 눈가를 비볐다. 회색 후드티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너무 갑자기 발진했나. 늘 생각하던 말이지만 육성으로 꺼낸 건 처음이라 뒤늦게 눈치를 보는 남준을 본 하얀은 그저 웃어 넘겼다.

어색한 그 웃음 속에서 남준은 거리감을 느꼈다.



아까 우리 집을 나섰던 김남준이 다시 초인종을 눌러 우리 집을 찾았다. 무슨 일이래. 문을 벌컥 열자마자 보이는 남준에 웃음을 보였다. 밖에서 말하는 줄 알았더니 다시 거실로 들어와 이것저것을 늘여놓는 게 아닌가. 뭔가 살펴봤더니 노트북부터 논문까지 이것저것 쌓인 종이 뭉치가 가득했다.



"너 뭐 하냐."

"어차피 설거지랑 청소 같은 건 해야 하니까 그거 할 김에 네 집에서 하루 동안 살게."

"나 오늘 집에 없는데."

"어디 가는데."

"신환회. 안 가려고 했는데 가은 언니가 오래서 가려고."



자신의 말 이후 이어지는 답변에 이유를 물은 남준은 하얀의 말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얀의 정신적 지주이자 유일한 여자 지인인 가은이 불렀다면 자신이 붙잡아도 무조건 갈 것이란 건 알 수 있었으니까. 노트북 충전기를 전기 코드에 꽂은 남준이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도 늦어?"

"잘 모르겠는데 일찍 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2시 안으로는 들어와."

"왜?"



의도 없는 순수한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해. 네가 보고 싶으니까,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오라고 해? 네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생을 포기하고 싶어지니까 날 위해서라도 빨리 오라는 그런 이기적인 말을 꺼낼 위치가 아니었다. 적어도 남준에게 하얀은 무기한적인 갑이었다. 을을 자처한다는 것은, 하얀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감히 갑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을은 없다.



"아니야. 그냥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와."

"빨리 올게."



철컥하는 문소리와 함께 남준은 또 다시 남겨졌다. 자신의 집도 아닌 하얀의 집, 라면 냄새가 가득한 그 집에. 눈가가 마르기도 전이었다. 시뻘겋게 짓눌러진 눈 밑이 제법 애처로웠다. 아, 벌써 보고 싶다.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살짝 물어뜯었다. 흘러나오는 피 마저 쓸쓸했다. 적어도 미친놈처럼 보이지는 말아야지. 입술 끝에 맺힌 핏방울을 혀로 쓸어내린 채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놓인 냄비 하나를 벅벅 닦아댔다. 그러고는 홀로 무언가 또 다른 목표를 찾아냈다. 이것만 하면 정하얀이 올 거야. 설거지만 하면, 청소만 하면, 잠만 자면, 저녁만 먹으면, 이 과제만 끝내면, 전화만 오면, 내가 잘 기다리기만 하면···.



-아 남준아. 나 가은이야.

-"아 누나.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지. 다름이 아니라 하얀이가 많이 취해서 데려다 주려고 하는데 집 주소 좀 불러줄래?

-"그냥 제가 갈게요."



Gravatar

내가 잘 기다리기만 하면? 정하얀은 나의 기다림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다가가야지. 내가 알려야지. 내가 널 이렇게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내가 너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하루를 채웠다고. 무의식적으로 뜯은 입술과 손톱이 전부 평범과는 어긋나 있었다. 너에게 잠식되고 싶어. 정하얀을 위해 살아가고 싶어. 다급하게 입은 후드의 끈이 수평도 맞추지 못한 채 휘청이고 있었다. 볼캡을 단단히 눌러쓴 뒤 집을 나서면서 한참을 생각했다. 네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갈 거야. 난 너 없이는 절대 안 되니까.



"정하얀 어디 있어요?"

"아, 여기···. 어? 있었는데?"

"네?"



인간을 넘어 동물적인 직감이 퍼뜩 다가왔다. 정하얀은 술 마실 때 밖으로 잘 안 나가는데. 불안해지는 마음에 여전히 입술만 물어뜯고 있을 때 쯤, 누군가 뱉는 한 마디에 남준은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간만이었다, 이런 더러운 기분은.



"아까 정우 선배가 데려가지 않았나···?"

"아 맞아. 둘이 아이스크림 사러 간다고···."



아, 시발. 남준이 육성으로 내뱉었다. 이래서 너 혼자 술 약속 나가는 게 불안한 거야, 하얀아. 입술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다만 이번에는 처치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상처 난 부분을 다시 이로 짓누르며 하얀의 짐을 모두 챙긴 채 가게를 나섰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그놈의 정우 새끼는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정하얀이 걔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이미 나한테 한 대 정도는 맞을 각오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야? 이를 바득 갈았다.


동네 근처 슈퍼를 돌아다녀도 가게에 다시 돌아가 봐도 하얀은 없었다. 하얀의 흔적이 사라질수록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핸드백을 뒤져 하얀의 휴대폰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하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들리는 멜로디에 남준은 미친 듯이 뜀박질을 했다. 남준은 어쩌면 자신이 더 빨랐어야 할지도 모를,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질 수 없는 장면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아 선배, 잠깐만요···!"

"하얀아."

"하지 마세요···!"



강제였다. 누가 봐도 강제가 분명했다. 그 뒤로 드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뜀박질 하던 걸 그대로 이어 정우 새끼의 얼굴에 주먹을 수십 번 꽂아댔다. 하얀이 자신을 발견하고서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걸 본 뒤로는 정말 절제할 수가 없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죽이고 싶다. 남준은 정우를 때리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대체 왜 나는 정하얀의 옆에 있지 못하는 거지. 정하얀에 대한 원망과 김정우를 향한 증오심이 주먹질을 멈출 수 없게 했다.



"그만해, 남준아."

"개, 같은, 새끼."

"그만하라고 김남준!"



앙칼진 목소리에 자동적으로 온 몸이 굳었다. 정우가 남준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인식된 남준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정하얀이 지금 무슨 짓을 당한, 애초에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마치 의식을 잃기라도 한 것 마냥 기억이 소각되었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증오심에 불이 붙어 기꺼이 나를 삼킨 탓일까. 남준의 불어 터진 입술에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정우의 발버둥에 스친 줄만 알았더니 꽤나 세게 맞은 것 같았다.



"남준아."

"난, 나는 그러니까···."

"난 괜찮아. 도와줘서 고마워."



하얀은 경찰에 신고해둔 채 남준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나도 참 파란만장한 인상을 사는 구나. 시침이 어느덧 숫자 3을 향하던 시간이었다. 남준은 아직도 두려웠다. 경찰이 자신을 구속할 지도 모른다는 걸 이유로 삼은 불안감이 아니었다. 하얀이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봐. 혹은 무서워 할까 봐. 자신의 직속 선배를 죽기 직전까지 팬 저를 원망이라도 할까 두려워 떨리는 동공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

"너도 빨리 자야지. 어서 가자."



슬슬 일어나려는 듯 남준을 달래던 하얀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하얀의 옆에 쭈그려 앉은 남준은 하얀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하얀이 고맙다는 말을 한 이후로 모든 경련이 멈췄다. 다시 한 번 깨닫는 점이지만, 하얀 없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다. 남준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Gravatar
"그냥 좀 알아채주면 안 될까···."



아직 술이 덜 깨 몽롱한 눈빛이 남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뭘 알아채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남준의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오늘 오전처럼 눈물이 맺히다가도 이를 잔뜩 가는 것이, 아까 정우에게 짓던 표정과 유사했다. 나한테 저런 표정 지은 적 한 번도 없었는데. 하얀은 술이 번뜩 깼다. 빌어먹을 김남준은 기어코 흑역사를 다시 생성시키고는 한다. 그때 그 말투, 그때 그 표정으로 그리 아득하게.



"나 너 좋아해."

"뭐?"

"진짜 좋아한다고···."



좋아한다는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애달팠는지 두 번을 웅얼거리고는 이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야, 너 울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남준의 어깨를 톡톡 치는 하얀은 여전히 순백이었다. 남준이 그렇게도 탐내는 그 무한한 순백. 고백 같은 건 그래도 좀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어쩜 두 번 다 이렇게 찌질하고 부족한 건지···. 남준은 자책을 거듭했다.



"······."

"근데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뭐? 예상치 못한 답변을 내뱉은 하얀은 대체 뭐가 놀랍냐는 듯이 굴었다. 그녀의 반응은 당연히 그랬어야 할 것이다. 남준은 햐얀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얀보다 우선시 하지 않았고, 애초에 하얀은 남준이 자신을 절제하기로 마음 먹었던 16살 그 즈음에 둘 사이가 친구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생각했던 둘의 사이는 주종 관계였지만 지금은 뭐랄까···.



"쌍방이야."

"뭐가."

"너랑 나 말이야."

"··· 그게 무슨."

"나도 너 되게 좋아하는데."



예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 감히 저런 대사라니. 이런 표정에 이런 말이라니. 쭈그려 앉아 있던 남준이 하얀을 올려다보다 그녀의 발언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남준은 자신의 손 마저 벌벌 떨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본인만 느낀 것은 아닌지 하얀도 어느새 남준의 손끝이 떨리는 걸 목격하고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깍지를 꼈다.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우리···."

"사귈래?"

"대박···."



남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 혹시 꿈 꾸는 건가. 아까 정우 새끼 때리고 구치소 끌려갔다가 거기서 잠 들어서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냐···? 아득해지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장면은 감히 꿈에서라도 상상해서는 안 될, 어쩌면 죄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나 되게 집착도 심하고···."

"잘 알지."

"결핍도 있고···."

"그것도 잘 알지."

"네 생각보다 나는 널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데 그것도 괜찮아?"

"야, 내가 먼저 고백했어. 자꾸 헛소리 말고 빨리 손이나 제대로 잡아."



느슨하게 풀려있던 깍지가 하얀의 한 마디에 의해 단단해졌다. 가느다란 하얀의 손가락이 남준의 모든 신경들을 다 자극하는 것 같았다. 하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5살 그때 그 잿빛 손가락이 저의 맑은 손가락과 교차되어 맞닿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저도 꿈 같았다.



"왜 안 해?"

"뭐를."

"키스 말이야."

"해도 돼···?"



답답한 한숨을 짧게 내쉰 하얀이 먼저 남준의 목을 끌어 입을 맞췄다. 남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건 정말 꿈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고.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딱딱하게 굳어있는 남준을 보고 살짝 웃은 하얀은 남준의 허황하게 떠도는 손을 제 허리에 얹었다.



그 뒤로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의 허리와 남준의 손이 맞닿은 순간부터는 그저 그 순간에 듬뿍 빠진 것처럼 굴었다. 입맞춤을 끝내고도 이마를 꼬옥 붙이고 있던 남준이 그동안 수백 번 연습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심장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남준아."


달큰한 목소리가 좁은 골목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