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난 쟤 마음에 안들어. 박지민."
"뭐래. 엽떡 안 먹을거면 닥쳐. 이 맵찔아."
기분이 좋지 않다. 가뜩이나 집에서 별로 좋지 않은 말을 듣고 와서 기분이 나쁜데, 내 뒤에서 들리는 말을 듣자니 그 화가 배로 몰려온다. 아이들이 하하호호 웃는 소리만 들려도 짜증이 난다. 평소라면 그렇지 않았을거다.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 지민이랑 사귀는거 아니거든?"
아침부터 저 놈의 소식이 들려서 기분이 나쁜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박지민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민윤아랑 친한것 뿐이지, 쟤랑은 말도 섞어본적 없다. 있다고 해도 선생님 부탁 때문일거다.
분명 나랑 민윤아랑 다녔는데, 저 아이와 윤아가 짝이 되서부터 이랬다. 은근슬쩍 나와 같이 다니지 않는달까. 자꾸 둘이서만 밥 먹으러 가고. 둘이서만 등하교 같이 하고. 같이 논다고 해도 무언가 우리 셋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것 같았다.
은근슬쩍 눈치를 줘보기도 했지만 소문난 넌씨눈 민윤아는 알아차릴 리 없다. 오히려 박지민과 친해지라며 한 대 때리기도 했다. 민윤아는 모든 것들이 박지민에게 맞추어져 있는것 같았으니까.
"지민아. 나랑 있다가 엽떡 먹으러 갈래?"
"그래."
수업시간이 되자 난 잠이나 자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대놓고 저러는것 아닌가. 저 아이들이 하는 모든 말이 내 귀에 쏙쏙 꽃힌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안녕. 김태형."
학원을 가뿐히 제끼고 갈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박지민과 마주쳐 버렸다. 아뿔싸. 오늘같은날에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게다가 분위기도 달랐다. 마냥 밝은 아이일줄 알았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차분해보였다. 하지만 뭐든 난 그냥 얘가 싫다.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다.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갈래?"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점심을 안먹은 탓일까. 배가 꼬르륵 거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박지민을 따라갔다.
같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몇분을 먹기만 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고, 나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끊었다. 두번, 세번, 열번이 넘게 전화가 왔다. 나는 아예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누구길래 전화를 안 받는거야?"
"알 필요 없잖아."
"그래도. 들어는 보자."
의아해하던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단답형으로 답하자 박지민은 끝까지 말꼬리를 늘렸다. 집요한 박지민탓에 나는 결국 답했다. 어차피 박지민인데. 말이라도 해주지 뭐.
"엄마. 아마 학원에 안 갔다고 저러시는 걸거야."
"그럼 받아서 말하면 되는거 아냐? 친구랑 놀고 있다고. 공부하기 싫다고."
"공부가 아니야. 피아노야."
"피아노가 하기 싫거든. 어릴때부터 질색이라."
"그럼, 하기 싫다고 해."
"8살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루도 빠짐없이 했는데?"
"그럼 오히려 말해야 하는거 아니야? 계속 하기 싫었을거 아냐."
얘는 왜 아까부터 자꾸 이런말을 하는거지. 말을 붙이기 싫었다. 그런데 자꾸 말을 하게 된다. 예전부터 느꼈던건데, 박지민은 사람이 어느샌가 말을 술술 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것 같다. 그 무언가에 나도 홀린것 같다고.
"어차피 네가 하는건 네가 정하는건데. 굳이 그걸 가지고 혼나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너, 아까부터 나를 왜 자꾸 도와주는거야?"
"그런건 나중에 알려줄테니까. 일단 집에 가기나 해. 그런걸로 혼나면, 나한테 연락해. 집 말고 우리집에서 자."
우물거리는 사이 박지민은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김태형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학원이라도 잘 다닐거라고 약속했잖아."
"도데체 이 엄마가 잘못한게 뭐길래 이렇게 삐뚤어진거니? 안 이랬잖아. 잘만 다니고 있었잖아."
집으로 가는길,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역시나, 학원에 나가지 않은게 결렸던 거다. 내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엄마는 내게 뺨을 때렸다. 한쪽 뺨이 화끈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머니와 눈을 마주칠 용기 조차 없었다.
분명 상냥하신 분이었다. 늘 나에게 따뜻한 미소와 목소리로 대해주셨다. 집이 기울었을때도 나만은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었다. 정작 자신은 그사람에게 맞았으면서. 항상 긴 소매와 긴바지로 멍을 가리려 애쓰셨으면서.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목소리로 대해주시지 않았다. 목소리는 항상 날이 서있으셨고, 날 안아주었던 따뜻한 손은 이런 방식이 아닌 이상 나에게 닿지 않았다.
"엄마가 아직도 밉니? 이 엄마가 재혼한 여자라 쪽팔리는거니?"
"그러면 말을 해줘야지. 엄마가...!"
"그 말 꺼내지 말라고 했지. 엄마가 쪽팔린게 아니라고."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거니? 피아노가 싫어? 그럼 다른 적성을 찾자. 엄마가 도와줄게."
피아노. 공부. 재혼. 다 싫지 않다. 오히려 좋았다. 엄마가 그사람이 죄값을 치른다고 했다. 이제는 둘이 산다고 했다. 그때도 기뻤다. 비록 한부모 가정이라는 꼬리표가 붙겠지만, 엄마가 행복해 보였다. 누구보다 밝은 웃음을 짓고 계셨다. 나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둘이서 사는게 익숙해졌을때, 친구를 만났다. 민윤아. 항상 밝은 친구였다. 웃는 모습이 어머니랑 비슷해서, 단지 그 이유였다. 우린 항상 같이 다녔다.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좋으셨던것 같다. 엄마가 울상인 얼굴을 하는건 보기 싫었다. 그래서 같이 다녔다. 엄마가 기뻐하니까.
어느날, 윤아와 놀고 있었다. 엄마가 기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잠시 이야기 하자면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나에게 아버지가 생긴다.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다음날 나는 이제 아버지가 될 사람을 만나러 갔다. 번쩍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어떤 사람일까. 엄마가 저렇게 기뻐하시는거면 분명 상냥하고 착한 분이시겠지?
자동차에서 내린 후 보인 아버지의 모습은 180도 달랐다.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셨다. 키가 많이 크셔서 그런지, 아니면 아버지를 보고 활짝 웃으며 걸어가는 엄마를 봐서 그런건지. 괴리감이 들었다.
두분이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엄마가 조잘대고 그 이야기에 아버지는 한두마디 거드는것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모습 조차 좋다며 웃었다. 앞서가시는 두분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나는 이 가족에서 소외되는게 아닐까. 하고.
"공부도 아니야? 그럼 뭔데. 왜 말을 해주지 않는건데. 말을 해야 알거 아니야."
"설마. 아버지 때문은 아니지?"
"설마가 사람 잡네. 맞아. 아버지 때문이야."
"나 아버지 한번도 가족으로 인정한적 없어. 형도 그렇고."
"네가 어떻게 아버지를 그렇게 욕할 수 있어? 너를 위해서 네 형이 네가 다니는 학교로 발령해줬잖아."
"네가 원하는거, 다 네 아버지가 할 수 있게 해주신거야.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래?"
순간 울컥했다. 둘이 살던 그때가 싫다는것 아닌가. 사소한 것으로 웃었던 그때가. 이렇게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설 일도 없을 그때가 싫다는거다.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원망하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난 아직 그때 그대로 어린아이인데.
"예전의 삶이 뭐 어때서? 내가 그때가 좋다는데 뭐 안좋을일 있어?"
"너 진짜...!"
"오히려 실망해야할건 나야.기업을 이어야 한다면서 공부하라고 해서 하루 16시간동안 공부시킨건 언제고."
"갑자기 또 취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고 하루 7시간동안 피아노를 치게 한게. 그게 좋은거야?"
"그건 네가 좋아하니까...!"
"나 피아노 좋다고 한적 한번도 없어. 그냥 한번 쳐보고 싶다 였지."
"하기도 싫은 피아노를 꾸역꾸역 손이 안 움직일때까지 쳤던 그 기분을 엄마가 알아?"
"그런데 엄마랑 아버지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내가 고통받는 5시간동안 엄마랑 아버지는 매일 데이트를 하셨어. 나는 보지도 않고."
"하지만 엄마랑 아버지는 나에게 괜찮냐는 질문 한번이라도 해줬어?"
"이렇게 어린 아이가. 하루에 5시간동안 하기도 싫은 일을 했는데 얼굴이 괜찮았겠어?"
"근데 엄마랑 아버지는 한마디도 안하셨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엄마랑 아버지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었던거야. 둘만의 달달한 로맨스에 빠져서 나는 볼 시간도 없었던 거라고."
"아니야. 우린 그때 너를 돌봐주었어. 놀이공원도, 롯데타워도 가고 싶다 해서 가줬잖아."
"엄마가 가고 싶다 한 곳들이었어. 그리고 보통 부모님들은 그런걸 가지고 돌봐주었다 우쭐대지 않아."
"아이들을 놀아주는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울컥했다. 정말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할줄 알았다.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달까. 내가 뱉은 말을 듣고 상처를 받은 엄마의 얼굴을 보고, 후회했다.
눈물이 맺혔다. 이대로는 보여주고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줄것 같아 충격에 빠져있는 엄마를 뒤로하고 집을 나왔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내 예상이 맞았나 보네."
집을 나와 또 한참을 걸었다. 발은 자동으로 박지민과 함께 갔던 분식집으로 향했고, 그곳엔 박지민이 있었다. 아까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로. 한없이 상냥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그 태도로. 엄마와 다른 태도로.
"야. 너 울어?"

"박지민, 나 이제 어떡해?"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꾹 참고있던 감정이 펑, 하고 터졌다. 박지민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후 나를 안아주었다. 박지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토닥일 뿐이었다.
안기고 싶었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사회는 나를 다 컸다며, 우는건 아이들이 하는거라며 나를 혹독하게 채찍질하기 일쑤였다. 그냥, 맘놓고 울고싶었다.
이제는 사람의 온기가 무엇인지 까먹고 있었다. 그냥, 홀로 서있었다. 외롭게, 위태롭게. 그런데, 가장 받고 싶었던 온기를. 가장 싫어하는 아이에게 받고 있다. 다시 한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날, 박지민에게 안겨 한참을 울었다.
"힘들면 내게 와 말해줘. 다 들어줄테니까."

"야 박지민. 이따가 엽떡 먹으러 가자."
"너 매운거 못먹잖아. 이 맵찔아."
"어허. 못먹는게 아니라 안먹는거라고."
"뭐야. 너희 친해졌어?"

"뭐. 어쩌다보니 친해졌다. 박지민이랑."
그때 이렇게 친해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