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1. 10.
엘리베이터 버튼 칸 위쪽에 붙어있는 숫자가 5를 향해 내려갈수록 손바닥이 바짝 마른다. 묵직하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띵. 5층에 도착했다는 걸 알리며 문이 열린다. 훅 끼치는 익숙하면서도 매번 감회가 새로운 향.
"박지민 병신."
"와 진짜 타고난 미친년."
"응~ 늦었으니까 이따 지갑 장전."
"김연주 사탄이랑 하이파이브 해도 안 이상해 진짜."
"네 면상."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애써 표정을 숨기고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나도 맞장구치기 시작한다. 박지민 넌 어떡해 한 번을 못 이기냐? 김여주 너도 사탄 새끼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걸랑? 어느새 아침 일상이 돼버린 소소한 내기. 우린 이런 작은 일상에서 우린 소박한 행복을 느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자연스럽게 연주가 앞장선다. 가방을 앞으로 바꿔 매는 것도 까먹지 않고. 나와 지민이 나란히 서있으면 연주가 뒤를 돌아 얘기를 시작한다.
"오늘은 빵또아 먹어야지"
"김연주 빵또아 처먹고 점심 못 먹는다에 내 천 원을 건다."
"그럼 난 박지민 손모가지를 걸겠음."
"내 손모가지를 왜 걸어 미친년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2학년 7반 교실에 도착하면 나와 지민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8반으로 향하는 연주에게 손을 흔든다. 수업 망해라! 응 엿 까! 마지막까지 환상의 티키타카를 보여주고 교실로 들어서면 장난스러운 얼굴은 어디 가고 심호흡을 하는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저 행동에서부터 보이겠지만 지민이는 연주를 좋아한다. 1년 전부터 혼자 끙끙 앓다가 올해 초에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때부터였던가. 김연주 쌍둥이 언니인 나에게 칭얼거리기 시작한 게. 짝사랑이 이렇게 힘든 거냐라는 둥. 아파서 그만두고 싶다는 둥.
그럼 난 매번 등을 쓸어내리며 말해준다. 언젠가 꼭 이루어질 거라고. 괴로워도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을 거라고.
"친구라 고맙다."
"계좌 보냈습니다. 친구 비용은 50만 원 보내주세요."
"누구세요?"
그 사람은 더 울고, 더 숨기며 행복을 기다린다고.
".. 근데 걔 아이스크림 먹으면 배탈 날 텐데."
그럴수록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더 아파하니까. 날 봐주길 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가니까.
너는 김연주를 좋아한다.
그리고 난 그런 널 4년 동안 조용히, 지금도 기다린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수학 시간이 찾아왔다. 초반엔 모범생 티라도 내려 필기라는 걸 도전해 봤지만 결국은 한쪽 팔을 쭉 뻗고 엎드려 교과서에다 끄적끄적 그림을 그려갔다. 단순한 하트부터 내 싸인. 졸라맨과 다시 돌아와 단순한 별을 그린다.
"...."
나른한 분위기에 픽 잠들어버릴 거 같아 잠시 시선을 올렸을 뿐인데 박지민과 정통으로 두 눈이 마주쳤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깜짝 놀라 괴상한 소리와 함께 허둥거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조용했던 교실이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하고 수치심 게이지가 쭉쭉 차올랐다.
선생님도 입을 가리고 끅끅거리시다 얼마 안 가 교탁을 치며 애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퍽이나 빠르시네요.
"여주도 창피할 테니 우리 모두 고개 돌리자."
어이구 감사해서 눈물겹습니다. 아주. 정말..
빠르게 자리를 고쳐앉고 얼굴을 지속적으로 쓸어내렸다.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미간을 꾹 누르며 삐죽 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너무 쪽팔려.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헤집어 놓는데 툭 하고 종이비행기가 책상 모서리 끝부분에 떨어졌다. 느릿하게 시선을 올리니 보이는 아까 두 눈의 주인공.
'읽. 어. 봐.'
"...."
읽어보라는 입모양에 조심히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병신.. 이냐? 삐뚤 하지만 또렷한 네 글자와 물음표 하나. 병신이냐? 누구 때문인데. 이를 으득 갈았다. 말문이 막혀 눈으로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뒤통수가 뚫려라 보는데 손등 툭툭 치는 제스처를 반복하길래 시선을 거두고 내 손등을 확인했지만 깔끔했다.
"?"
'뒷. 면.'
아. 뒷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빠르게 종이를 뒤집어 뒷면 내용을 읽어내려간다. 짧은 문장 하나에 심장이 뛰고 얼굴이 훅 붉어지는 게 느껴지는다. 방황하는 시선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툭 떨구고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귀여웠다. 그니까 너무 쪽팔려 하진 말고.
투박한 글씨체로 적힌 문장에 불규칙적인 심장소리가 적나라하게 귀에 맴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 뒤덮었던 창피함은 어디 가고. 몽글거림에 두 발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만 드러났다.
피식피식 웃다가도 그런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바닥에 발을 탁 짚었고. 또다시 귀여웠다, 그 단어가 떠올라 발을 붕붕 흔들거렸다. 설레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단지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머리는 또다시 행복 회로를 작동시킨다.
"... 하아."
귀여웠다. 귀여웠다. 귀여워. 귀여운.
정말 잠깐이었지만 창피함을 느꼈다.
그리고 사소하고 단순한 한 문장에 심장이 뛰었고 미소가 그려졌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시점. 우리의 사소한 일상 사라져버렸다. 정확히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민이 연주를 아는 채도 안 하는 걸 시작으로 나를 티 나게 따라다니며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김연주 이름 한마디면 좋아죽던 그가 너무나 낯설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긴커녕 원망스럽게 마음 한편에서 희망이 피어올랐다. 모른 채 할까 싶었지만 계속 이런 사이가 이어지면 독이 될게 훤히 보여 주말 오후 연주가 집을 비운 시간에 그를 불러냈다.
"둘이 왜 그러는데?"
"...."
"말 안 해?"
"넌 몰랐냐?"
"뭘."

"김연주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입 밖으로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지민이는 경멸의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김연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더 충격이 컸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진지하다 못해 도를 지나쳐 흔한 짝사랑 한번 안 해본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쌍둥이 언니로써도 놀랍고 사람 대 사람으로도 놀라웠다. 이 사실 역시 지민이 모를 리 없을 테고. 아, 그래서 그렇게 피해 다녔구나.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실마리가 느슨해진다.
"와... 존나 판타지 같아."
"...."
"그래서 그렇게 풀이 죽어있었냐?"
"나도 아니까. 걔가 사랑에 얼마나 진지한지."
"진지를 넘었지."
"...."
"근데 확실한.. 너 울어?"

안 울어. 그럼 식탁에 떨어져 있는 물은 침이냐. 내 말에 피식 웃었다가도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묘한 감정이 복받쳤다. 나 진짜 진심이었는데. 지금도 진심인데. 너무 힘들다 이거.
머리가 한대 맞은 듯 멍해졌다. 내 모습. 부정할 수 없다. 영락없는 내 모습이 지금 너에게서 보인다.
짝사랑에 지쳐 혼자 끅끅거리며 눈물을 터트리는 너의 모습에 내가 미세하게 보인다. 그를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난 그냥. 울었으니까. 답답한 이불 속에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울었으니까.
"...."
"그만, 그만 둘까...."
"...."
"1년이 이렇게, 힘든데... 다음은 얼마나 힘들까..."
4년이 힘든데. 그다음은 얼마나 힘들까. 그러게. 난 그 힘든 4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막상 아득바득 버티면 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길래 난 이렇게 널 놓지 못하고 있는 거야.
30분 동안 울던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떠난 후 정적이 이어지다 내 처량한 웃음소리가 그 정적을 깬다. 눈물과 울음이 뒤섞인 웃음소리가 거실을 매웠다. 내 모습이 저렇게 초라하게 보였었다는 게 우습고 불쌍해서.
30분 동안 세상이 무너져라 울던 그의 모습이 이리 마음이 아픈데 4년 동안 저 모습으로 살아온 나는 어땠을지 상상이 안 가서.
지민아. 박지민아. 박지민.

... 지민아.
넌 짝사랑이 힘들다며 울었다.
그리고 난 그런 너를 부르려다 내가 떠올라 목이 메어 울었다.

다음날 지민이는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 나갈 준비를 하던 연주는 후다닥 달려 나와 놀란 눈으로 지민이를 응시했고, 그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연주는 친구들에게 약속을 펑크 내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가고 난 쭈뼛쭈뼛 소파로 옮기며 궁금증에 입을 벙긋거렸다.
"생각보다 멀쩡하지?"
"...."
"그리고 이거."
"초콜릿?"
"어제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거 주려고 온 거야?"

"그것도 있고, 보고 싶어서."
"....!"
사소한 선물에 설렌 걸까 아니면 보고 싶었다는 말에 설렌 걸까. 전자든 후자든 박지민이라 설렜을거다. 보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 걸 알면서도 다시 심장이 뛰었다. 어제 오열을 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야속하게 난 나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다시 시작해 보려고."
"...."
"1년보다 더 오래 한 사람도 있을 텐데. 어제 그렇게 울었던 게 좀... 쪽팔려서."
"아."
"미안하다. 어제 많이 난감했을 텐데."
"아냐. 괜찮아."
"...."
"...?"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피했다. 시선을 아래로 맞닥뜨리는 순간 차가운 손길이 눈에서부터 느껴졌다. 몸을 흠칫 떨며 손의 주인과 눈을 맞췄다. 눈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지나가는 곳곳마다 붉어지는 것 같았다.

"너도 울었어?"
"... 어?"
"눈이 붉어서. 조금 부운 것 같기도."
"... 아."
"지민아! 나 약속 잘 펑크 냈어!!"
연주가 방에서 튀어나와 내 무릎에 올라앉았다. 나이스 타이밍. 센스 있게 튀어나온 그녀 덕분에 번거롭게 변명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안도하며 숨을 고르는 중에도 연주는 쫑알쫑알 거리며 지민이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왜 자신을 피했냐는 둥. 절교하려 작정했냐는 둥. 유치뽕짝 한 이유를 늘어놓는 게 딱 김연주 같았다. 속이 뻔히 드러나는 솔직함. 이것도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지.
".. 둘이 얘기해."
"너는?"
"그냥 방에."
"같이 있어."
"됐어."
"... 그래. 들어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힘없이 늘어지며 주저앉았다. 다시 한번 부드럽던 그의 손길이 손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에 내 심장은 지랄맞게 반응했다. 분명 어제 머리가 깨질 때까지 눈물을 짜내면서 울었던 거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 설렘을 느꼈다.
내 처지는 뫼비우스의 띠. 그 자체였다.
아파하다 웃고 원망하다 미소 짓는. 그러다 또 상처받고 울어버린다.
고통을 회피하려다가 그 잠깐의 달콤함이 그리워 다시 상처를 만들어내는 곳은 아물지 못한다. 더 깊어지고 깊어질 뿐. 고통스러워도 다시 찾게 만드는 강한 이끌림. 초콜릿이 쥐여져 있는 손에 힘이 실린다.
어쩌면. 난 잠시의 짧고 짧은 행복을 누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몇 번을 아파도 계속 맛보고 싶던걸 수 있다.
오로지 작은 달콤함을 느껴보고 싶어 난 과거를 묻는다.
".. 난 너 좋아해. 혼자 좋아할 테니까 부담 갖진 마."
넌 너의 사랑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리고 난 그것도 모르고 아파할 걸 알면서 상처투성이 위에 희망을 덧붙였다.

밝은 파스텔톤의 배경. 서로를 마주 보며 수줍게 웃다가 다정하게 입 맞추는 우리의 모습이 예뻤다. 덧붙일 말도 없이 그냥. 예뻤다. 이 짧은 단어로 정의됐다. 박지민. 김여주. 그 외 아무도 언급되지 않는 대화. 나만 비춰 보이는 짙은 검색 눈동자. 모든 게 우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행복하다.
"여주야."
"응?"

"넌 내가 좋아?"
"... 응."
"그래."
"너도,"
"근데 난 연주가 좋아. 너도 알잖아."
"... 어?"
핑크빛이 맴돌던 배경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시야를 가렸다. 너 알고 있잖아. 넌 내가 연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잖아. 넌 내가 널 사랑했으면 좋겠어? 그럼 과연 행복할까? 잔인한 사실이 날 괴롭혔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고 소리치며 발악해도 끊이지 않았다.
넌 알고 있잖아. 왜 피하려고 해?
공포가 절벽 끝으로 나를 내몰았다. 물음표들이 내 등에 날카롭게 꽂혔다. 고통에 허덕이며 살려달라며 빌었지만 내 앞엔 연주와 시시덕거리는 지민의 모습만 아른거릴 뿐. 그 누구도 손을 뻗어주지 않는다.
"... 그만."
그만. 제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자 배경이 깜깜하지 않았다. 잔인한 사실들 대신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등에는 물음표들이 아닌 땀으로 젖어있었다. 꿈이구나. 꿈인 걸 직감했음에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아랫입술을 치아로 짓누르고 소리를 삼켜도 끊임없이 흐른다.
행복했지만 지옥 같던 꿈.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빌어먹을 꿈.
딱 그 순간이었다. 어젯밤 내가 너에게 초콜릿을 받고 웃던 순간. 후에 잠이 몰려와 침대에 누웠을 뿐인데. 원치 않던 상황을 마주했다. 그만 울자고 다짐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난 이미 두 무릎을 꽉 끌어안아 끅끅거리고 있었었으니까.
난 아무 죄가 없는데. 왜 이런 악몽에 시달리는지. 아. 내 행복을 바라는 게 죄인 걸까? 연주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어땠을지. 내가 연주였다면 지민이 날 좋아했을지 생각한 것만으로도 죄가 된 걸까.
"...."
무엇이든 꿈이 몇 초라도 빨리 머릿속에서 잊혔으면 좋겠다. 다른 평범한 꿈들처럼.
야속하게도 악몽은 새벽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고 피로한 몸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어젯밤 얘기를 잘 마친 건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내 옆을 자리 잡은 지민이와 연주에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에 들어서자 수군거림이 거세졌다. 김연주와 박지민. 저 두 이름이 소문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뜨거운 시선들을 받기 시작했다. 소문의 내용은.
야. 둘이 골목에서 키스하는 거 누가 봤대!
자극적이다. 그래. 청소년들 나이 대에 관심을 쌓을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내가 불안해하는 건, 내 옆에서 아무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둘이었다. 사랑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는 김연주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중요시하는 박지민. 이 둘이, 너무나 태연하다.
"오늘 급식 뭐임?"
"돈가스."
"엇, 그럼 두 개 먹어야지~"
"너 내 거 뺏어 먹는 거 아니지?"
"어떻게 알았지?"
"이러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그들의 행동에 괜히 내가 더 초조해진다. 되려 내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을 정도로. 침묵이 이어졌다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니. .. 하지만 진짜라면? 둘이 어젯밤 내가 잠들어있을 때 입을 맞춘 게 맞는다면?

... 직접 물어보자. 그럼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물으려 몇천 번을 다짐했지만 그런 머리와는 다르게 입술이 달싹거린다. 바로 손만 뻗으면 물을 수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김여주."
"ㅇ,어?"
"어디 아파?"
"... 아니?"
"아닌 거 같은데. 너 평소보다 힘들어 보여."
"... 아니. 괜찮아."
단순한 질문을 계속 망설이며 내뱉지도 못하고 회피하다 마지막 교시가 찾아왔다. 학교 끝을 알리는 종이 들려오고 수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 역시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들어 지민이의 자리로 향했지만, 비어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너였던 걸까.
3층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 창문으로 지민이의 파랑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뛰어가면 늦지 않게 붙잡을 수 있다. 엇박자로 계단을 쉬지 않고 내려오니 금방 1층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내쉬고 고르는 와중에도 난 그를 다시 찾았다.
"지민...."
투둑. 툭. 내 목소리가 많은 잡음 사이로 묻힌다. 파란 우산 아래 있는 지민이 널 보고 말을 잇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옆에 서 연주 때문이 더 컸다.
파란 우산 주위로 형형색색 우산들이 둘러쌓고 있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모든 이유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소문에도 유하게 받아들였던 그들의 모습이. 많은 시선들에 불구하고 지금 당당하게 같이 서있는, 행복해 보이는 저들의 모습이.
두 다리의 힘이 탁 풀리는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얼마 전 악몽이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그 꿈은 내가 죄를 지어 꾼 게 아니었을 수 있다.
나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제 곧 아플 테니, 미리 예측해 보라는 배려. 그런 엿 같은 배려는 필요 없는데 말이야. 입안 여린 살로부터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허탈. 그 자체였다. 4년 동안 짝사랑과 이성 사이에 아슬하게 서있던 담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다.
넌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난 세상을 다 잃은 듯 무너져라 울며 허덕였다.

제일 피하고 싶던 순간이 코앞까지 성큼 찾아왔다. 4인용 식탁. 내려앉은 분위기. 한편엔 내가 앉아있고 반대편엔 지민이와 연주가 머뭇거리며 날 응시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뻔히 알면서도 난 입 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진 게 어느덧 5분을 향할 즘. 내가 아닌 지민이의 입술 열렸다. 나 연주 좋아해. 힘이 탁 풀리며 눈이 파르르 떨렸지만 꿋꿋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때, 내가 너한테 초콜릿 준 날."
"...."
"그날에 다 말했어. 연주한테."
"... 아."
"내 짝사랑도 마음도 하나 빠짐없이."
"...."
"다 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연주가 날 붙잡는 거야."
자신도 날 좋아한다고. 그래서 사귀게 됐어. 소문도.. 부끄럽지만 사실이고. 말 못 해서 미안.
그들은 내가 어떤 반응을 예상하고 저 말을 꺼냈을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서운함과 조금의 배신감. 절대 짝사랑이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했을 테다. 그럼 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축하한다고 웃어야 할지. 배신감이 든다고 화를 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울면서 모든 걸 들어내야 할지.
"미리 말 안 해줘서 서운하지... "
"미안해, 여주야."
나에겐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을까. 단시간에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냈고, 내가 택한 것은,
도망.
자리를 피하듯이 도망쳤다. 내 이름이 불려와도 뒤돌아보지 않고, 연락이 와도 개의치 않고 발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걷고 또 걷고 발에 통증이 느껴져서야 멈춰 선다.

"...."
처참한 결말을 예상하고 시작했던 사랑인데. 슬프다. 아프고, 아프다.
열네 살의 김여주야. 이 이기적이고 바보 같은 여주야.
열네 살의 김여주가 시작한 짝사랑을 끈질기게 열여덟 살의 김여주가 안고 있는 게 싫었다. 몽글거림과 사랑이란 궁금즘에 했던 사랑이 날 망쳐가고 있는 게 미치도록 미웠다.

박지민. 널 아직도 사랑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독이 되고 있는 거 같아서. 널 잊기로 했다. 절대 쉽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언제까지 어깨를 들썩이고 입을 틀어막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 여주야."
넌 날 불렀다.
그리고 난 널 잊으려 대답하지 않았다.

"여주야. 김여주."
"...."
"문 좀 열어봐. 응?"
"...."
"얼굴 보고 얘기하자."
"...."
내 도망은 끝나지 않았다. 난 방에서 연주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지민이의 연락을 거절했다. 깜깜한 방안, 초점 없는 내 눈동자가 거울로부터 반사된다. 그때 꿈과 비슷했다. 말 그대로 '비슷'이다. 꿈은 잔인한 사실로 모든 걸 가렸다면, 지금은 현실을 보고도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았다.
정리하겠다고 그렇게 침묵했으면서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만. 김여주만 정리한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관계. 열여덟의 김여주도 과거와는 다를 건 없었다. 이기적인. 애초에 안될 걸 알면서도 시작한 일인데, 끊임없이 희망을 건다.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민아...."
이기적인 나는 널 놓아주지 못한다.

"김여주. 식탁에 밥 차려놨어."
"...."
"... 오늘은 나와서 먹어. 참아주는 것도 한계니까."
"...."
"친구 만나고 올게."
그러니까 제발 나와서 밥 좀 먹어.
띡. 띠디딕. 도어록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서야 난 방문을 열었다. 방문만 열었을 뿐인데 밝은 빛이 쏟아진다. 햇빛 하나 안 들어오게 꽁꽁 생활해온 탓이었다.
방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겉모습을 살폈다. 거울에 보이는 나는 조금, 어쩌면 많이 엉망이다. 수척한 피부, 초점 잃은 눈동자. 힘없이 고개를 툭 떨궜다. 일주일 만에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구나. 사랑이 이만큼 사람을 망가트릴 수 있구나. 새삼 다시 깨달았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바닥에 꽂힌 시선을 올리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동시에 난 그대로 굳어버리고 헛숨을 들이킨다.

".. 여주야."
"...."
"너, 왜 이렇게..."
"...."
"... 망가졌어."

박지민. 지민이가, 내 앞에 서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갈구하던 그가 내 눈앞에 선명하게 서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지민이의 눈빛이,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했다. 넌 아직도 모르는구나. 내가 왜 이러는지.
다시 도망가려 했다. 말라비틀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전까지만 해도.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며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애써 감추려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지만 그런 손을 저지하는 지민이의 손길에 완벽히 무너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툭하면 속마음이 튀어나올 거 같아 울면서도 입이라도 틀어막으려 했지만 내 두 손을 꽉 붙잡아버린 지민이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울음을 토해내며 말이 우수수 쏟아졌다.
"내가, 널 좋아해..."
"... 여주야."
"4년 전부터...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

"네가, 연주를, 좋아하는 걸 알아도.. 계속 욕심나서..."
그래서 숨었어.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근데 지금은 너무 아파.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네가 보고 싶었는데, 널 보면 내가 힘들어. 자괴감이 들고, 연주한테도 너한테도 미안해서 못 보겠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아무것도 못하겠어.
".. 여주야."
"...."
"여주야."
"...."
".. 얼마나 힘들었을까."
"...."
"고생했어. 나 좋아하는 거."
"...."
좋아해. 이 말이 뭐라고 웃고 울었을까. 정작 내뱉으면 스쳐 지나가는 말 중 하나인걸. 우린 뭐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앓았던 걸까. 지민이는 내 울음이 멎기까지 계속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고생했어. 수고했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주며.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4년 동안 꾸준히 봐왔던 얼굴. 지민이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난 매번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봐왔으니까. 연주를 볼 땐 어떤지. 날 볼 땐 어떤지. 어느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박지민 너는 지금마저 날 친구 이상 이하도 아닌. 딱 김여주로 보고 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난 고개를 돌려 오롯 앞만 보고 걸었다. 걷다 보면 뒤에서 날 붙잡아 사랑해 주길 바라며.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 뒤를 돌았을 땐. 사랑은 어디 가고 회의감만이 날 뒤쫓아오고 있었다. 허무함과 상실감. 그 감정만.
사랑은 자해라고 한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이 짝사랑이라면 더더욱.
그만 아프고 싶다. 하지만 널 놓지 못한다. 사랑을 멈춰야 자해를 멈출 수 있지만 사랑을 멈추지 못해 이 지경까지 이르었다. 처음부터 지민이를 몰랐다면, 지금의 김여주는 멀쩡했을까. 처음부터. 처음. 아, 난 왜 이걸 이제서야 생각해냈을까.
"... 지민아."
"응. 여주야."
"... 난 널 지우지 못해."
"...."
"난 지금도 널 너무 좋아해."
"...."
지민이를 잊는 게 아니라 그를 좋아한 날 잊으면 된다.
난 너무 이기적이라, 그를 놓아주지 못해서 짝사랑을 시작하던 열네 살의 김여주부터 지금의 김여주를 잊으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내 팔목에 머무르던 그의 손을 겹쳐 쥐었다. 그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집안을 채웠고 한결 차분해진 분위가 돈다. 허덕임이 멎고 마음이 꽤 추슬러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입을 벙긋거리지도, 우물쭈물 거리지도 않고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
"지민아."
"...."
"박지민아."
"응, 김여주야."
"넌 꼭 사랑받고, 하면서 살아."
"...."
".. 정말 좋아했어."
넌 혼자 시작하지도, 설레지도 상처받지도 끝내지도 마. 나처럼 바보같이 모든 걸 혼자 하지 마 지민아.
많이 좋아했어. 정말 많이. 난 그 순간들은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 말의 끝으로 지민이의 시선이 다시 내 눈으로 향한다. 아무 말 없이 서로 마주 보다, 난 조심히 두 팔을 벌렸고 지민이는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친구로서. 넌 정말 좋은 친구야. 그렇게 연주가 차려놓은 밥이 차게 식을 때까지 우린 서로의 등을 쓸어내리고, 눈물을 흘려보냈다.
넌 날 친구 김여주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난 그런 널 사랑한 날 지우기로 했다.

다음날.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으로 내려가려 짐을 챙겼다. 당일 선택한 일이었지만 부모님은 빨리 오라며 반겨주셨고 오히려 연주는 울며 막아섰다. 지민이 그녀를 겨우 말렸지 안 그랬으면 아마 난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을거다.
"이렇게 갑자기 가는 게 어딨어!"
"... 미안하다고."
"씨이... 갑자기 가는 게 어디있냐고오..."
"... 너 울어?"
"안 울어!"
"와 박지민인 줄."
"지랄...."
김연주. 다 들린다. 연주를 끌어안고 있던 지민이 조곤조곤 속삭이자 연주는 기겁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영락없는 모습들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산행 기차가 도착하고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가서야 내가 떠난다는 게 실감 났다. 자존심은 개나 줘버린 연주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지민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가만히 응시했다.
"나 간다."
"응. 잘 가."
"김연주, 너 박지민 귀찮게 하지 마."
"여름, 방학 때 꼭 갈게에에..."
"... 오지 마."
"갈 거야."
"오지 마!"

"김연주랑 안 갈 테니까 너 빨리 가라. 기차 출발하겠네."
알겠어. 나 간다. 기차에 들어서고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열하는 김연주와 박지민. 연주는 예상했다만 지민마저 눈물을 보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또 울겠네.
나에게 손을 흔드는 지민이를 빤히 쳐다봤다. 두 시선이 서로의 눈에 머무른다. 잘 가. 짤막한 그의 입모양에 난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좋아했어.
기차가 출발하고 저 둘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서야 억누르던 감정이 쏟아졌다.
난 이제 박지민을 좋아했던 김여주를 잊으러 간다.
같은 짝사랑. 다른 결말.

넌 짝사랑으로 달콤함을 느끼고 씁쓸함이 남았다.

그리고 난 짝사랑으로 씁쓸함을 느끼고 새로운 달콤한 사랑을 준비하러 널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