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튜닝의 끝은 정국
@미필이
01
생각보다 꽤 복잡했던 이혼 절차를 밟는 데에 소요한 1개월은 결혼을 준비했던 일보다 더 별것 아니었다. 전정국..., 그러니까 지금의 전남편과 이혼하기로 의사를 결정한 이후 그와 마주 봤던 것은 과연 짧다고 말할 수 없는 2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사용했던 신혼집을 정리하고 난, 의무적으로 만나야 했던 겨우 2번 정도였다. 전정국과 나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기에 더 빠른 속도로 진행 된 이혼이었다.
아, 전정국과의 이혼 사유는 오로지 단순한 가치관 차이에서 오는 대립 때문이었다. (내 추측일 뿐이다.) 부산에서 홀로 상경해 서울에서 꽤 길게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나와는 달리, 부모님께서 서울에서 큰 사업을 하시던 전정국은 부족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게 그와 나에게 사람 대 사람으로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자라온 전정국은 우리가 만나기 시작했던 대학교 2학년의 나이부터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또 해주며..., 그렇게 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전정국의 행동이 유일한 애정 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게 싫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다는 회의가 들어서. 그게 이유였다.
전정국과 나는 21살에 만나 25살 정도까지 연애를 이어왔다. 25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26살로 넘어갈 때 쯤엔 길었던 결혼 준비를 마치고 끝내 그와 결혼을 했다. 전정국과 집을 합친 지 2년이 다 되었을 때 쯤엔 전정국은 그저 서류를 내밀며 우리 이혼하자, 그렇게 말했다. 아마 내 생에 있어서 가장 어이없고 또 잔인했던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그에게 이혼 통보를 받고 나서 정신 없이 겨우 생각했던 그 통보의 이유는 다름 아닌 '전정국의 바람' 뿐이었다. 내가 잠시 연수를 나갔을 때. 아마도 나는 전정국이 내가 잠시 없던 틈에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아무튼 나와 전정국은 그의 일방적인 통보로 인해 28살의 끝자락에 이혼을 맞았다.
"이주야."
"어?"
"...그냥. 미안하다고."
"아..."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그저 끄덕거렸던 그때의 대화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마도 1년 전 쯤 나눴던 전정국과의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이혼의 마지막 절차까지 깔끔하게 끝낸 후는 우울했다. 우울했다는 것만큼 적당한 단어가 없다. 딱히 하고 싶지 않았던 그와 마지막으로 떨떠름하게 나눈 짧은 대화는 결국 집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나를 멍청하게도 엉엉, 울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 통보를 받았을 때는 '이혼'이라는 상황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전정국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지긴 했었나 보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자그마치 내 인생의 8년이나 되는데..., 아무래도 이혼을 하고 난 뒤 나에게 전정국은 욕받이면 욕받이였지 지금까지도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도 전정국이 미친 듯이 밉고 끝없는 원망의 대상인데.
아직도 전정국과 함께 공유했던 우리의 8년이 그에게는 그렇게도 쉬웠는가... 아직까지도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해본다.
02
- 이주야, 어쩌지. 내가 지금 바로 가기가 좀 곤란한 상황이라서...
"아, 그러세요. 근데 저도 시간이 늦어서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 오늘만 부탁할게, 딱 오늘만! 고마워 이주야!
저기! 띠띠띠-
말이 꼴 우습게 끊겼다. 바쁜 일이기는 개뿔, 친구들이랑 술 처마시다가 나한테 들킨 것도 한 번이라 내가 속냐? 며칠 전부터 돈 사정이 말이 아니게 비어서 결국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다음 타임 알바가 웬 미친년이 아니었는가. 지금은 바쁘다느니, 사정이 있어서 아무래도 지금 본가에 가봐야 한다느니, 같잖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세우면서 나에게 일을 미루는 상황이 일주일 전 쯤부터 이어지자 골머리를 앓는 일도 자연스레 잦아졌다. 속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라 곧 소리라도 지를 뻔했던 감정을 꾹 누르고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를 직접 쥐어 잡았다. 나름 이성을 되찾기 위한 방법이었다. 오늘만큼은 정말 안 된다고 얘기하려는 걸 눈치라도 챈 건지, 저쪽에서 멋대로 전화를 먼저 끊은 것 때문에 혼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가 굉장히 민망하게 들렸다.
뒤끝이 꽤 있는 성질이라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긴 지 조금 된 것 같은데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늦은 시간까지 하는 알바 때문에 피로함은 더불어 알바와 병행하고 있는 내 본업이자 돈벌이인 광고 작업 (...) 일 때문에 몇 년 전부터 문제였던 내 손목은 아무리 고정 밴드를 칭칭 휘감아놔도 덜렁덜렁하더니, 하루가 머지않아 곧 떨어져 나갈 듯했다. 이러다 손목까지 못 쓰게 되면 그 때서는 서른살 넘게 먹고 알바나 해야 하는 건가... 영혼 없이 계산대 쪽에 있던 손목밴드를 하나 꺼내 계산하고 다시 손목을 고정하다가 딸랑딸랑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에 침울함을 애써 감추고 어서 오세요~ 따위의 말로 손님을 반겼다.
"계산할게요."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내 기계적인 인사에 고개를 까딱 구부리던 검은 모자를 코까지 눌러쓴 남자는 거침없이 계산대 쪽으로 순식간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대뜸 콘돔 두어 개 정도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물론 이 남자의 행동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여태껏 알바를 하면서 이것을 사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재차 쓸어내리거나 감추려고 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당당한 경우는 처음 봐서 되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잘못된 교육의 폐해.) 이제 곧 겨울이 다가와서 그런가 방금까지만 해도 울긋불긋하던 하늘이 금세 새카매져 계산을 함과 동시에 재빨리 밖을 쳐다보다 괜히 빼꼼 삐져나온 남자의 눈을 마주쳤다. 얼굴이 상기 된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말보로 골드도 하나 주시겠어요."
"아아, 네! 총 8500원 입니다."
가격을 듣고 주머니를 더듬더듬 거리던 남자는 금방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지갑이네. 남자가 꺼낸 지갑은 익숙한 디자인의 지갑이었다. 너무 친숙했던 나머지 잠시 어라? 했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나는 편의점 알바생이니까..., 정신이 딴 데로 새지 않도록 혓바닥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깨물고 카드를 건네받았다. 카드를 건네받아 계산을 하고 있으면 남자는 콘돔을 왼손에 걸치듯 들고 담뱃갑은 본인의 후드티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결제 완료 되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카드를 건네자마자 캡 모자 끝을 잡고 고개를 대충 숙여 인사를 건넨 그 남자는 위태롭게 손에 매달려있던 콘돔을 손에 쥐고 편의점을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음, 또 불금이라고 막... 어우. 남자 몸 좋긴 하던데. 아, 내가 지금 여자친구 있어 보이는 사람한테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뒤를 돌아 나가려는 남자의 겨우 뒷모습을 보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내가 정말 외롭긴 한가보다. 하긴, 전정국이랑 헤어진 이후로는 돈 번다고 미쳐 살았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잠시만, 어? 언제 생각이 다시 침울한 쪽으로 향했는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찰나의 순간 투명한 편의점 문밖으로 보이는 사람은 누가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에게 꽂혀있는 남자의 시선을 순간 의식하자마자 홀린 듯이 그 남자에게 손을 뻗어 붙잡았다.
"저! 손님!"
"...네?"
"그.. 어..."
어.... 그러니까요... 그게.......
나도 모르게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라 음성을 내뱉고 있는 저도 너무 당황스러웠다. 적당히도 푹 눌러 써 코는 보일 듯 말 듯 했던 검은 모자를 손 끝으로 살짝 들어 올린 남자는 내가 저에게 말을 걸었음에도 계속 창밖을 쳐다보는 것이 이상했는지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뒤돌아보았다. 뒤따라 잠시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어쩌지!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아오, 입이 문제지 입이!! (ㅠㅠ) 별로 길지는 않았지만 꽤 민망한 정적이었음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손님한테 실수한 건가? 오지랖 부린 거겠지? 하는...,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급한 마음에 뻗었던 아픈 손목이 아려옴으로써, 상황을 빠르게 무마하고 싶은 마음에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남자는 놀란 듯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부탁 받아서, 산 거에요."
......와, 진짜 닮았다.
답답했는지 들어 올렸던 모자를 금방 벗어버린 남자는 곧 후드티에 달려있던 모자를 집어썼다. 그 틈을 타 잠시 보였던 이목구비는... 아차싶게도 전정국을 많이 닮아있었다. 미련한 안이주 (본인)는 아직까지도 전정국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모조리, 그리고 빠짐없이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얼마나 미련했는지, 전정국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면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도 손님의 말에 응하기 보다는 전남편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는 내 꼴이 우스웠다. 이렇듯 항상 전정국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에 침울함이 물밀듯 밀려와, 금방 생각을 접고 내가 고개를 숙였을 때에 마스크를 잠시 벗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생각으로 고개를 번쩍하고 들어 올렸다.

".....아"
전정국이다.
분명했다.
거의 1년 만에 마주 보는 얼굴이었는데도 그와 내 눈이 정확히 마주치자마자 나는 그가 전정국임에 확신했다. 카드를 건네받을 때 잠시 느껴졌던 익숙한 향수 냄새도, 왜인지 모르게 친숙했던 지갑도 모두... 그가 전정국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전정국임을 깨달았을 때는 당장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전정국은 나를 알아보긴 한 걸까? 푹 숙인 고개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이를 1년 넘는 시간 동안 원망하면서 살아왔고, 전정국이 미웠는데. 그랬는데 나는 왜...
겨우 이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턱, 미어오는지.
"...아 그... 죄송해요...! 괜히 붙잡아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겨우 그 차가운 한마디를 내던진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편의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나는 너 하나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조차 힘들고 있는데 너는... 충분히 날 잊고 잘살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이제까지 나 혼자 바보였다는 생각에 그대로 이마를 카운터에 박고 별 추잡스러운 소리를 다 내면서 엉엉 울었다. 이혼하고 나서는 분명히 그이를 확실히 잊고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전정국을 눈앞에 두니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8년 동안 나만 그렇게 사랑한다, 좋아한다 했던 전정국이 겨우 1년 만에 만난 나를 못 알아봤다.
"...쓰레기."
얼마나 꽁꽁 감싸 놓았는지 딱딱하기 그지없었던 (거의 돌멩이) 오른쪽 손목의 고정 밴드가 흐물렁해질 때까지 콧물, 눈물 그러니까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을 미친 듯이 닦아내면서 전정국에 대한 쌍욕을 읊어대었다. 늦은 새벽이라 오는 손님이라곤 술에 취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 뿐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방금 전정국처럼 멀쩡한 손님들이었다면 어떤 미친 여자가 편의점 카운터에서 막 울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며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려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만큼 전정국이 편의점에서 나간 지 1시간이 지나도록 나 안이주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이 불도록 울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 잠도 다 잤네."
전정국은 항상 나를 미련한 사람으로 만든다.
03
"언니...?"
"......헉!"
이게 무슨 일이지. 누군가 내 등을 조심스럽게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비몽사몽 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계산대에 꼬라박았던 얼굴을 들었을 땐... 원래 내 다음다음 타임이라서 자주 마주치지 못했던 고딩 알바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와... 나 울다가 그대로 머리 박고 잔 거야? 안이주 지독하다 지독해. (...) 눈이 퉁퉁 불어있는 상태로 딸뻘인 애를 똑바로 쳐다보기는 괜히 민망해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들고 다니는 안경을 급하게 챙겨 썼다.
"미안합니다아...ㅠㅠ"
"인수인계 제가 할게요! 들어가서 쉬세욤!"
천사 아가야.. 고맙다 (ㅠㅠ) 지금 시간에 알바를 마치고 바로 학교를 갈 생각인 건지 교복 차림인 아이가 안쓰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아침인지 새벽인지 아직은 꽤 하늘이 새카맣고 와중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슬슬 몸이 아파오는 것 같아 대충 인수인계를 도와주고 손에 초콜릿 하나 쥐여준 다음에 어서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초콜릿을 사주는 김에 아침도 대충 지금 때우려고 전에 자주 먹곤 했던 삼각김밥도 두 개 정도 챙겼다. 편의점에서 빠져나와 바로 집으로 걸어가려고 했건만, 아직 아침이라기엔 또 쌀쌀해서 걸음을 멈추고 콜택시를 부르려 주머니를 뒤졌다.
"으으 추워.."
핸드폰을 꺼내려다가 손이 시려워 잠시 주머니에서 손을 머물렀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반팔에는 안 추운 날씨였어서 집에서 급하게 나왔던 지라 달랑 반팔 반바지 하나 걸치고 왔는데 금방이라도 뼛속까지 얼어버릴 느낌이었다. 입으로 바람을 호호 불면 금방 입김이라도 나오는 날씨였음. 와 뭔데 택시가 주변에 하나도 없어? 아침인데? 눈을 잔뜩 찡그리고선 시간을 확인했는데 어라, 아직 시간이 새벽 3시 뿐이었다. 그럼 방금 고딩은 공부하다가 알바하러 온 건가..., 쌀쌀한 날씨인데도 아직 비몽사몽하고 혼란한 정신을 깨지 못 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잠에 깊게 들었던 것 같았다. 새벽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꽤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원래 이렇게 늦게까지 일해?"
"...?"
누구...,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훅 들어오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란 기색을 애써 묻어두고 시선을 뒤로 돌렸을 때는... 금방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던가. 몇 시간 전인지 모르게 어색하게 마주했던 전정국이, 뭔지 모를 눈으로 나를 차분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진짜 황당했다. 1년 동안 원망했던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전정국 눈동자와 잠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계속 편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든다는 게 그 뜻이었다.
"...시간이 늦어서.."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던 전정국의 눈빛이 대답을 원하기라도 하는 건지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무튼 그랬다. 계속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자니 생각 없이 말이 툭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애써 내뱉은 말이 그거였다. 내 말을 듣고 벌렸던 입을 우왕좌왕하더니 먼저 다문 것은 전정국이었다. 지금 전정국을 앞에 두고 있자니 향수 냄새만 맡아도 코가 찡해오는 게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느껴서 핸드폰을 급하게 끄고 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전남편 앞에서 울어버리면 그건 너무 미련 있는 여자 마냥 보일 게 뻔하니까. 그때 잠시만, 짧은 외마디와 함께 금방 욱신거리는 손목을 왼손으로 꾹 붙잡기 전 먼저 오른 팔목을 쥐어온 건 전정국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

"...늦었으니까, 바래다 줄게."
뒤에 있던 저 삐까뻔쩍 광대나는 차가 전정국 차였던가. 내 손목을 꽤 과격하게 잡았던 그는 팔목의 밴드를 보곤 조심스럽게 내 팔을 놔주더니, 팔짱을 끼고 대충 흘기는 눈으로 뒤차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대체 내가 얘를 얼마나 그리워했다고 괜히 내 오른 손목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 눈빛에 또 울컥해버릴 뻔했음에 침을 꼴깍 삼켜 넘기고 어서 다시 뒤로 휙하고 돌아버렸다. 저 차 타면 나 진짜 비참한 사람 될 것 같아. 보나 마나 전정국도 알바나 하는 내가 불쌍해 보여서 이런 호의를 보이는 것 일지 모른다. 다른 이유는 잘 모르겠고.
"이주야."
"
"그냥 같이 좀 가자. 밤이 늦어서 그래. ...집도 멀잖아."
진짜 모순적인 건 전정국이 내 예전 자취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혼하고 나서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갈 거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었다. 어떤 의도로 이런 전정국의 호의가 나에게 닿는 건지 모르겠는 마음에 애써 고개를 저으려 손을 까딱까딱 거리다가도 당장 택시가 잡힐지, 3시간이고 2시간이고 뒤에 잡힐지 모른다는 생각이 훅- 스쳐 지나가면 발걸음이 움찔 제자리로 돌아갔다. 꽤 오래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가 내린 결론은 차를 얻어 타자는 것이었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전정국 왼손에 들려있던 차키를 순식간에 빼앗고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자신에 가득 차 전정국의 차에 탑승하고 나서는... 전정국이 입꼬리 한 쪽을 들어 올리며 차 방향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무산 되어버렸다. 그냥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쪽팔림의 연속이었다. 전정국이 닫힌 차 문을 벌컥 열고 운전석에 탑승했을 때에는 또 그렇게 좋아했던 향수향이 금방 차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1년이나 지났으면 분명히 바뀐 게 많았어야 하는 데 지갑이네, 옷이네, 향수네, 신발이네, 모조리 그대로인 그를 보자면 또 호기심에 빠졌다. 얘가 이렇게 요지부동했었나 싶기도 하고. 전정국이 제 옆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나 혼자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자니 자괴감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려 하면, 운전대를 잡고 멍하니 앞만 들여다보던 전정국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손목은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하필이면 어색한 공기 속에 던졌어야 할 질문이... 손목 관련이었을까. 전정국은 정말 아직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와 한 집에 살 때도 몰래몰래 광고 작업을 했던 지라 오른쪽 손목이 맛이 간 것은 이미 최소 3년 전이었다. 모르는 척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었던 그때의 내가 괜히 안쓰러워져 대답을 필터링 없이 퉁명스럽게 내뱉을 뻔했다. 전정국은 그냥 집에 데려다주는 것 뿐이잖아..., 예전이랑 같은 사이에서 챙겨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종종 예전 버릇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인지하고는 댓발 튀어나와 있던 입술도 앙다물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래..., 그럼."
대답을 기대했던 건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은 전정국의 눈빛이 공허해졌다. 전정국이 잇따라 대답을 하고나서는 따로 서로간에 오가는 말이 없었기에 먼저 창밖으로 시선을 멈췄다. 원래 택시로도 8에서 10분 정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새벽 치고는 꽤 도로가 막히는 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답답한 심정은 다름 없이 전정국도 마찬가지였나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더라. 목이 탔고... 심장이 존재를 알리듯 쿵쾅쿵쾅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빵빵- 소리 때문인 듯 했다.
"흠, 흠!"
헐 미친... 개 쪽팔려! (...) 목이 조여오는 느낌 때문에 그냥 목만 풀려는 의도였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나버렸다. 전정국이 운전을 하고 있으면 또 몰랐지만 거의 도로에서 정차 되어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민망했다..., 심지어 내가 소리를 내자마자 애써 모르는 척 하려는건지 뒷자석에서 뭘 찾는 듯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그 때문에 정적이 괜히 더 길게 느껴졌다. 1년 만에 만났으면서 여태까지 이 앞에만 스면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수치스러움은 더 했다. 얼굴이 분명히 벌겋게 달아올랐을 게 뻔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이제 숨도 조금씩 쉬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마셔."
"...어?"
"아까부터 목 타잖아."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인 내 뺨에 꽤 차가운 물병을 대준 전정국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모습이 조금 어색한게, 다시 보니 뒷자석에서 급급하게 찾은 모양인지 팔이 꼬여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목이 탄 게 아니냐며 내가 서둘러 건네받지 않자 물병을 정신 없을 정도는 아니였지만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신호가 곧 바뀌고 앞 차들이 줄줄히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어서 그에게서 물병을 건네 받으려는데 눈에 걸리적 거리는 게... 하나. 전정국의 왼손 약지에 아직 나와의 결혼 반지가 보란 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순간 물병을 건네 받아야하는 것도 까먹을 만큼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듯 했다. 왜, 너는 왜 아직도... 그 반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랑 이혼 소속을 다 밟고 나서 미련도 없다는 듯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게 누구였는데. 날 먼저 버린 것도 너였으면서... 왜, 넌 아직도 그 반지를 버리질 않았다.
어찌저찌 혼란스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그에게서 위태롭게 잡혀있던 물병을 건네받았다. 우울한 생각을 떨쳐낸 것도 겨우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코가 찡해지더니 조그마하게 눈물이 맺혔다. 울면 안 되는데 지금은..., 앞에서는 아니더라도 바로 옆에 전남편이 있는데 겨우 결혼반지 하나 때문에 우는 건 수치스럽고 또 날 미련곰탱이로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미 미련 죽죽 흐르긴 했음.) 눈을 한 번이라도 더 끔뻑거리면 곧 눈물이 와다다 떨어져버릴 것 같아서 눈물을 마르게 할 명분으로 쥐고 있던 물병을 급하게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켁, 켁!"

"안이주 괜...,"
또르륵. 그야 말로 '또르륵' 이었다. 물을 급하게 마신 것도 모자라 사레가 들려 집 한 채라도 날아가야 만족을 할 듯이 켁켁대는 나의 기침소리를 듣고 걱정이 된 건지 뭔지 오른손으로 다급하게 내 턱을 쥐어 든 전정국. 안 그래도 눈물 안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던 참이었는데 전정국과 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자마자 달랑달랑 매달려 버티고 있던 눈물 몇 방울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 턱을 잡은 것도 전정국의 옛버릇이었다. 미안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드러웠던 손길이었지만 내 눈물을 마주치자마자 적잖아 놀랐는지 손에 적지 않게 주고있던 힘 마저 금방 풀리더라.
"그,"
"너 지금은 내 운전기사잖아."
"
"그러니까... 제발, 아무 말 하지말고 가자."
서로 부닥쳤던 얼굴을 전정국이 먼저 피했을 때는 쪽팔리게 눈물이 수도꼭지 풀린 듯 줄줄 흘렀다. 그 상태에서 나름 방금의 발언도 떨리는 목소리로 꾹꾹 감정을 누르며 이성적으로 그를 대하려 노력한 것이었다. 내 말이 끝난 이후로는 그도 말 없이 애꿏은 운전대만 쓸어댔고 나도 마찬가지로 창문만 내다봤다. 전남편 앞에서, 그것도 그렇게 가까운 위치에서 눈물을 보인게 그렇게 오래 만났던 시간 동안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게 가장 충격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에도 우리가 너무 서로한테 익숙해져만 있었지 그렇다고 잘 아는 게 아니었구나.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졌다.
04
세상 어색함은 둘이서 다 나누고 있던 동시에 자취방의 행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당장 이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해서 나도 모르게 캐물을지 몰랐다. 전정국이 보기엔 자취방 근처에는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었는지 곧 건물 앞 쪽에 차를 슬슬 멈췄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철컥하면서 열리는 듯 했다. 잠시 멈칫했지만 지금은 그를 피해서 집으로 피신하는 게 먼저였으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차 문을 벌컥 열어 큰 보폭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집 조심해서 들어가."
"...."
"앞으론 이렇게... 늦게 다니지도 말고."
언제 뒤따라 차에서 내린 건지 굵직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려놓는 전정국. 왜 그렇게 나랑 눈 마주치는 게 어려운 건지 애꿏은 바닥만 빤히 쳐다보면서 왼쪽 발목을 빙글빙글 돌리더라. 얼마만에 그에게서 듣는 잔소리인지... 이상하게 대학생 시절 그와 연애하던 모습이 오늘 짧은 시간 마주했던 전정국과 심히 겹쳐보여서 심장이 조이고 아팠다. 긴장하거나 불안한 상태에 있으면 풀 죽은 강아지 마냥 다리를 베베 꼬고 발목을 돌리는 버릇은 아직도 여전한 듯 싶었다.
"참견할 일 아니잖아."
그에게 해주고 싶던 말은 아니었다. 서른 살이나 먹고 바람 핀 (내 추측이다.) 전남편에게 미련이라도 남아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질 않나, 사레가 들리질 않나 하는 민망한 모습만 보였으면서 또 자동적으로 말이 유치하게 나갔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이성적인 말이었기 때문에 전정국도 속으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겠다던 전정국은 곧 운전석 문을 조금 과격하게 열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잘 지내, 이주야."
무언가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는 밤이 존재하는 이유를 요지부동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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