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금목서, 재떨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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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서, 재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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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 김태수의 동생이라 지칭한 남자가 가고 난 뒤. 지하는 좁디 좁은 그 단칸방 구석에 앉아 김태수를 생각했다. 분명 괜찮았던 김태수를. 언젠가 보통의 미래를 꿈꾸며 서로를 사랑하던 두 사람을. 해 뜨는 아침의 그 눈부신 햇살을 함께 맞으며 일어나던 그 아침을. 그리고 끝끝내 망가지던 그를.

지하는 예전과 비교하여 조금의 다름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배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 실낱 같은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리고 조금의 애도를 위한 눈물도 흘려주었다. 이제 다시는 널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담아.

어떻게 죽었든 언제 죽었든
네가 꼭 지옥에 갔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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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박 사장이 뵙고 싶답니다.”

“누구를. 나를?”


차창 밖으로 넘어가는 노을. 그리고 그 아래 강을 따라 달리고 있는 여자. 그 여자를 따라 아주 천천히 굴러가는 차. 그 안에서 여자를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괴고 바라보는 남자. 부하인 재현의 말엔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인다. 오로지 그 여자만을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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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뛰어도 되나.”

“…”

“…”

“홀몸이 아니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멈춰서서 숨을 고르던 중이었다. 그 여자의 발자취만을 따라가던 차 역시 속도를 줄였다. 태형의 시선이 집요하게 여자만 쫓았다. 턱을 따라 흐르는 땀에 덕지덕지 붙어버린 잔머리와 촉촉히 젖은 목선… 뭐 그런 것들. 저 여자는 아직도 그 곰팡이 냄새 나는 반지하에서 나올 생각이 없나.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

“안지하 씨요.”

“안지하가 뭐.”

“아이를 바라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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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은 어두운 업계에 종사하는 일개 조직의 우두머리다. 속된 말로 깡패라 불리우는 뭐 그런 피 볼 일이 많은 족속이란 소리다. 태수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같은 일에 몸 담그고 있었으며, 태형과는 비즈니스적으로 얽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몇 번 볼 뿐 필요 이상의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간간이 안부를 물으며(태수가 태형에게 일방적으로 취하는) 서로에게 득이 되기 위한 일 외에는 서로의 사람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룰이었다.

그런 둘의 관계에 변수가 생겼다. 태수가 지하를 만난 이후로 계속해서 태형에게 필요 이상의 손을 벌려온 것이다. 원래도 존재가 달갑지 않았던 태수인데 그 의존이 차츰 커져 태형이 맡은 일까지 방해가 되고, 조용히 묻어야 하는 일까지 건드리며 협박을 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도 아니고 거듭 제 입지를 흔드는 꼴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태형은 끝내 결심이 섰다. 태수를 제거하기로.

제 형을 마땅한 죽음으로 비밀스럽게 처리하기 위해선 사전 조사 단계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김태수는 어떤 여자와 동거를 했고, 꽤 만난 사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런데 만난다는 여자가 조금 이상했다. 어쩌면 조금이 아니라 꽤. 소매 밑으로 조금씩 보이는 살갗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빠진 적이 없었고, 그 나이대 답지 않게 시든 몰골을 하고서 때로는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잘려 보기 흉한 꼴을 하고 집을 나서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렇게 누구든 직감할 수 있는 사이였다. 김태수와 안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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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태형은 태수와 지하의 사이를 떠올리며 그들 사이 생긴 아이까지도 생각했다. 그가 지하를 찾아갔을 적, 자신의 아이까지 감당할 수 있냐는 그 여자의 한 마디에 태형은 혼란스러줘졌다. 사랑으로 품은 아이가 아닐텐데. 그 여자는 그래도 김태수를 사랑했나. 그래서 기어이 그 아이를 품고 갈 작정인가.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오늘 밤 9시입니다.”

“…”

“밀항 걸린 새끼들 다 족치시죠.”

“…”

“…사장님?”

“그래야지.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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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는 무슨 복이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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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지금,






“또 오셨네요.”

“와야죠. 형수님 데리러.”



지하를 가만 지켜보다 기어코 차에서 내린 태형은 목 아래 풀어헤친 단추를 다시 잠그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넥타이를 다시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종의 예의를 표하는 방법이었다. 비로소 그가 갖춰입은 쓰리피스 수트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꽉 잡힌 옷태가 지나가는 사람들 마저 한 번씩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 했다.

딱 봐도 비싸보이는 세단에서 내려 제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태형을 지하는 무미건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자기가 태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던 태형의 그 한 마디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지하는 곱게 대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잃을 것도 없겠다, 당신이 김태수를 죽였든 그 죽음에 관여했든 설령 아무 관계가 없든 겁나지 않았다.









“결심이 섰나 봐요. 어떻게?“

”아가씨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

“진즉 준비 됐습니다.”

“…”



여자의 턱 아래 간신히 맺힌 땀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지하의 눈에서 태형은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읽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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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를 진심으로 원해요?”






남자는 마치 무언갈 안다는 듯 내게 속삭여왔다. 썩 불쾌한 목소리였다. 일말의 비밀 마저 눈 앞의 그에게 모두 내어준 것 같아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 아이를 지우고 싶어하는 걸 알았다면, 그래서 오히려 내가 이 남자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미소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보다 조금 높은 그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 볼 뿐이었다.





“도와주겠습니다.“

”…“

”원한다면 그 아이도 기꺼이 품어요.“

”…“

”설령 원하지 않는다면”

“…“

”그것도 도와줄 수 있으니까.“








여자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의 흰자위 위에 서서히 핏줄기가 드리웠다. 그리고 곧이어 투명한 액체가 그 아래 고였다. 떨어질 듯 말 듯 찰랑이는 그 물결에 잠시 정신이 팔리는 듯 했다.




“그 말이 참 쉬워서,”

“…”

“좋겠어요.”

“…”

“…나는요.”



이 아이가 미치도록 싫어서 당장이라도 지워버리고 싶다가도, 그게 또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지워버리고 싶다 생각한 그 마음이 죄책감이 돼서 종일 고통 받아요. 김태수라는 새끼가 증오스러워서 내 아이 마저 증오함에 당위성을 주는 이 상황이 너무 지옥 같아요. 보듬어주고 싶다가도 도저히 그 김태수를 받아낼 수 없어서 매일을 절망해요.



“그런데 못 지운다잖아.”

너무 커버려서, 그런 데다가 돈도 없어서 나한텐 아이를 선택하지 않을 선택권 조차도 없다고요. 그런 나를 어떻게 뭘 믿고 도울 수가 있는데요 그쪽이.






지하가 울부짖듯 태형에게 소리쳤다. 눈가에서 찰랑이던 그 투명한 액체들이 몇 번이고 볼을 따라 떨어지길 반복했다. 절규에 섞인 절망을 태형은 가만히 받아내었다. 내내 지하의 두 눈을 응시한 채로.

끝끝내 어떤 무게를 지탱하다 힘을 잃은 지하가 주저앉았다. 제 시야 안에 더이상 그녀의 두 눈을 담아낼 수 없게 된 태형의 시선이 처절하게 우느라 떨궈진 정수리를 향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럴 바에 차라리 다시 일어나 악에 받친 목소리로 제게 분노했으면 했다. 이렇게 무너질 바에 그 충혈된 눈을 하고서 제 눈을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녀의 육체를 구성한 모든 가녀린 것들을 차례로 훑으며 태형은 그런 생각을 했다. 김태수의 숨통을 좀 더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끊었어야 했음을.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끝끝내 다른 깔끔한 방식으로 죽이게 된 날의 그 습도를 떠올리며 입 안의 씁쓸한 향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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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론 안 되나“








지하가 끝끝내 고개를 들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서.







“…”

“내가 기꺼이 받아낸다잖아.“

”…“

”당신을 사랑해보겠습니다.“

”…“

”그러니까 그 지옥에서 좀 버텨봐요.“





당장이라도 위태로워 쓰러져버릴 것 같은 여자의 연약함을 보고선 태형이 여유롭지 못하게 뱉어댄 말이었다. 정말 보고만 있다간 이 여자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눈물 너머 일렁이는 그 눈동자가 모든 걸 포기해버린 것 같아서.

기꺼이 김태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남자의 선언이었다. 기꺼이 그 여자의 지옥까지 감내해보겠다는 남자의 결심이었다. 그 시작이 연민이었던지 동정이었던지, 그것도 아니면 이유 없는 애정이자 끌림이었는지도 모르는 감정으로 사랑을 해보겠다는 남자의 오만함이었다.

노오란 금목서가 개화하는 가을의 초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