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헤어지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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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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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야 3개월입니다.”


오늘로부터 2주 전, 나는 통보 받았다. 내 명줄이 코 앞에서 끊길 거라는 소리를. 황당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스무 살 때 한 번 받아보곤 처음인 건강검진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그동안 죽을 정도로 아팠을 거라며 여태 병원에 오지 않고 무얼 했냐고 물었다. 멍했다. 아파도 병원은 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약을 입에 털어넣던 기억. 쓰러지기 직전까지 정신을 부여잡고 버티던 기억. 그저 스트레스성 질환인 줄 알고 약해빠진 내 몸만 자책했던 기억.

다 부질 없는 노력들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시작 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노란 빛의 전등 아래 앉아 그 종이를 응시하고 있다. 길어야 3개월. 나는 내일 아침 당장이라도 눈을 뜨지 못할 수 있다. 시한부 선고 이후로 2주가 지났다. 그 시간동안, 담담하게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세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마침내 오늘, 그들과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핸드폰 연락처에 자리 잡은 세 이름들을 모조리 지웠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이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끊어낼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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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첫만남은 외딴 여행지에서였다. 청년 셋이서 학창 시절부터 돈을 모아 떠난 유럽 여행, 대학 교환학생으로 떠난 유럽. 타지에서 우리 넷은 그렇게 마주했고, 가까워졌다. 우연히 동선이 겹치고, 대화를 나눌 때에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접점이 생겼고, 우리는 타지에서 만나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보다 먼저 떠날 즈음, 나는 그들로부터 세 장의 쪽지를 받았다. 셋은 서로 모르게 시간을 쪼개 나와 시간을 가졌고 결국 내가 받은 마음은 과분하게도… 세 사람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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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마지막으로 산책 다녀와요.”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박지민은 나에게 밤 산책을 권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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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김태형은 나와의 다음을 기약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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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기분이?“

전정국은 나와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전정국은 유럽에 다시 왔다. 계절이 하나 바뀌고, 그는 혼자서 나를 찾아왔다. 처음은 반가움, 뒤이어서는 애틋함. 타지에 머물 동안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자체가 큰 위안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정보라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우리는 만남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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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그 피로를 견디지 못한 내 몸에서는 이상 신호가 전해졌다. 위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올라오는 헛구역질. 약을 먹을 힘조차도 없어 간신히 소파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고 있었을까. 귓가를 때리듯이 울리는 벨소리. 소파를 더듬으며 간신히 잡은 핸드폰의 화면에는… 숫자 배열이 익숙한 번호. 그리고 그 번호가 시야에서 흐릿해지며 빛이 번져갈 때즈음,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코 끝을 찌르는 약품 냄새에 겨우 눈을 떴다.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하얀 천장. 파란 담요.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 그리고… 내 손을 꼭 쥔 채 엎드려 있는 전정국. 큰일이다. 내 병명을 얘도 알게 됐을까?



“정국아.”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자 고개를 들었다. 잠시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날 보더니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 손을 더 조이듯 잡아온다. 잡힌 건 손인데 왜 속이 더 아려오는 건지. 만나면서 잘 보지 못한 표정이 난 왜 이렇게 반가운지.


“이런 모습 보여주려고 헤어졌어?“

“네가 전화했구나.”

“대답해. 너 어디 아파?”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모르는 듯 했다. 다행이었다. 내가 이 비밀만큼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으려 했는데. 허망하게 밝혀지지 않아 안도했다. 그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살면서 아프니까 이런 대접도 받아보는 구나, 웃음이 나왔다. 늘 무표정에 가깝던 얼굴, 심지어는 나와 입을 맞출 때도 변하지 않던 그 차갑던 눈빛이 지금은 왜 이렇게 따스한지. 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말도록 일관된 태도를 보였어야지. 왜 이제 와서 너는.


“나가자.”

“어딜 가. 너 환자야.”


더 있는다고 고쳐질 것도 아니야. 마침 다 떨어져가는 수액을 보고서 바늘을 뽑았다. 신발을 신으려 하니, 그제서야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급차 혹은 전정국이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 테니. 전정국은 내 눈빛을 읽고서는 잠시 원무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다녀와서는 친히 내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패딩을 입혀주었다.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려준 뒤에는 내게 등을 보였다.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의 등에 업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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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으로 내려와 전정국은 나를 자신의 차 조수석에 태웠다. 곧이어 운전석으로 향한 그는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데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곤 정적. 나는 창문 너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없는 힘 없는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쌓인 고엽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구나. 내년 봄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꿈도 크네.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는 전정국. 그리고 연이어 시선이 닿은 곳은 글로브박스. 그곳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수히 많은 나의 흔적들. 내가 찾던 립스틱. 핸드백. 머리끈. 향수… 온전히 내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깊숙한 곳에 있던 것들을 다 파헤쳐보니까 조금 낯뜨거운 흔적도 보였다. 찢어진 스타킹… 뭐 이런 것들. 더러운 걸레 잡듯이 들어 올리니, 전정국도 슬쩍 보고는 바람 빠진 웃음을 보인다.


“이런 건 안 버리고 뭐 하러.”

“그런 게 남아있었네.”

“모르는 척 하지 마.”

“들켰다.”

“변태 새끼…”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우리가 열렬하게 마음을 나눌 때가 있었지. 그게 진실된 사랑의 형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서로가 함께일 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 앞으로는 과거형이 되겠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우린 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았었네. 그 흔한 커플 사진 하나, 동영상 하나 없는 우리였다. 그 역시, 모든 관계에 떳떳하지 못했던 내 탓이겠지만. 넌 날 죽을 때까지 원망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존재만으로 내 구원이었어. 그의 옆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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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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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진지하게 어떤데요 나는.”

“좋은 사람이죠 정국 씨.”

“그런 거 말고. 애인으로.”

“좋아요. 멋진 사람이잖아요.”


근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정국은 이안에게 물었다. 오늘로 고백이 벌써 세 번째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띠었다. 곧이어 정국이 이안의 손에 들린 빨랫감을 뺏어가다시피 든 후에야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날 감당 못 할 걸요.”

“무슨 말이지, 그게.”

“사내 하나로는 만족 못 해서요. 내가.“


보다시피 내가 지고지순하게 한 남자만 만나기엔 좀… 아까운 얼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