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9.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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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29

골목으로 나오자 공기가 확 달라졌다. 집 안에 고여 있던 습기 대신 밤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석진은 자연스럽게 여주 옆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보폭을 맞추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여주는 잠깐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차에 도착하자 석진이 먼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주가 앉는 걸 확인한 뒤에야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고 차 안이 조용해졌다. 엔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석진은 시동을 걸고 바로 히터를 틀고 자신의 겉옷을 여주의 무릎에 덮어줬다.

 

 

“오늘 너무 고마워요 석진씨 그리고 미안해요 밤늦게”

“고마워만 해”

“알겠어요. 근데 비용은… 진짜 제가”

“그 얘기 또 하면, 기사비 세 배.”

 

 

여주는 그제야 완전히 졌다는 얼굴로 웃었다.

 

 

“협박이에요 지금?”

“현실적인 제안.”

“치..그럼 고마워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응.”

“미안해도 안 되고요?”

“안 돼.”

“너무 불공평한 규칙 아닌가요.”

 

 

석진이 짧게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불공평한 상황은 이미 끝났어. 지금은 선택만 하면 돼.”

“선택이요?”

“어디서 잘 건지.”

 

 

여주는 창밖을 봤다. 집 앞 골목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집에서 들리던 물소리 대신 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이 귓가를 채웠다. 머릿속이 조금 정리됐다.

 

 

“아마 찜질방..? 정 아니다 싶음 근처 친구 집 갈 것 같아요.”

“찜질방은 안 돼.”

“네?”

“위험해”

“.....”

“다른 데 생각해.”

“....그럼 친구 집?”

 

 

여주의 질문에 석진은 잠깐 멈췄다. 그 짧은 정적이 오히려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여주는 그제야 이 대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감각적으로 알아챘다. 석진이 아주 낮게 삐진 말투로 말했다.

 

 

“내가 있는데.”

 

 

 

 

 

30

여주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천천히 돌려 석진을 봤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여주를 보고 있었지만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장난처럼 던진 말이 아니라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차 안에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엔진 소리와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그건....”

 

 

여주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말의 순서를 고르는 얼굴이었다.

 

 

“그건 너무 훅 들어오신 거 아닌가요.”

“훅은 아니고.”

 

 

석진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부드러웠다.

 

 

“논리적으로 말한 거야.”

“논리요?”

“지금 시간 늦었지. 집은 물바다지. 갈아입을 옷도 없지. 친구한테 가면 설명해야 하지.”

“음....설명 싫긴 해요.”

“거기다 네 성격상 새벽에 다시 신경 쓰일 거고.”

 

 

여주는 입술을 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저 되게 읽힌 사람 같네요.”

“많이.”

“기분 나빠야 하는데.”

“.....”

“별로 안 나쁘네.”

 

 

석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변화가 너무 작아서 여주가 놓칠 뻔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데 왜 굳이 친구 집을 가”

 

 

여주는 무릎 위에 놓인 그의 겉옷을 잡고 꼼지락 거렸다. 코트에 남은 온기가 생각보다 선명했다.

 

 

“석진씨 집은.”

“응.”

“너무 안전한 선택 아닌가요.”

“안전한 게 싫어?”

“아니요. 제가 너무 편해질까 봐요.”

“이미 늦었어.”

“뭐가요?”

“그 걱정.”

 

 

여주는 잠깐 웃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기준으로만요.”

“응.”

“오늘만 자고 갈게요”

“김남준이 당분간 다른데서 자랬잖아. 집 복구 될 때까지 있어. 더 있으면 나야 좋고”

 

 

여주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만 이라는 말을 꺼내놓고도 스스로 그 말에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차 안의 공기가 아주 잠깐 느리게 흘렀다. 히터 바람이 발끝을 데우고 있었고 무릎 위에 얹힌 석진의 겉옷에서는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여주는 그 옷자락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돌려 석진을 봤다.

 

 

“그럼.”

“......”

“신세 좀 질게요.”

 

 

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여주는 스스로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다물었다. 너무 담백해서 오히려 더 진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석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출발시켜 바로 석진의 집으로 향했다.

 

 

“환영해.”

“말만 들으면 호텔 같네요.”

“조식은 없어.”

“아쉽다.”

“대신.”

 

 

석진이 다시 차를 움직였다. 이번엔 방향이 확실했다.

 

 

“아침에 커피는 해줄게.”

 

 

여주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불안해야 할 밤인데 그렇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진짜 뭐.”

“제가 너무 의지하게 되면.”

“그건.”

 

 

석진이 한 박자 쉬었다.

 

“내 책임.”

 

 

 

 

 

31

차가 서울 중심구 어느 저택 앞에서 멈췄다. 엔진 소리가 끊기자 주변이 훨씬 조용해졌다. 여주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연스럽게 창밖을 한 번 훑어봤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 번쩍이는 이층짜리 주택이었다. 불이 켜진 창이 몇 개 보였고 마당은 크지 않지만 관리가 잘 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딱 석진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역시 재벌은 재벌인가. 집을 나온 여주도 본가는 나름 있는 집 집안이지만 석진은 차원이 달랐다.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공기가 확 달라졌다. 향이 먼저 튀지 않았다. 인위적인 방향제 냄새 대신 나무랑 섬유가 섞인 아주 옅은 냄새가 공간에 남아 있었다. 여주는 신발을 벗고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은 반짝이지 않았지만 흠집 하나 없이 정돈돼 있었다. 눈에 띄는 장식은 없었다. 벽은 밝은 회색 톤이었고 가구는 선이 단순했다. 색도 많지 않았다.

 

 

“생각보다… 현실적이네요.”

 

 

여주의 말에 석진이 코트를 벗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기대 했는데.”

“재벌 집이니까요. 들어오자마자 길 잃을 줄 알았죠.”

“그 정도면 나도 집에서 헤맬걸.”

 

 

여주는 작게 웃으며 거실 쪽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갔다. 소파는 낮고 테이블도 단순했다. 벽에 걸린 그림도 한 점뿐이었다. 일부러 채우지 않은 공간 같았다. 여주는 잠깐 멈춰 섰다. 괜히 말이 줄어들었다. 석진은 그런 여주를 흘끗 보다가 물을 한 컵 따라줬다. 여주가 컵을 받아 들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취향이 확실하네요”

“정리 강박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요. 통제 잘 되는 사람 같아서요. 관리도 잘 되어 있고 깔끔해서”

 

 

석진이 그 말에 아주 짧게 웃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표정이었다.

 

 

“지낼 방 보여줄게.”

 

 

계단은 거실 한쪽에 붙어 있었다. 과하지 않게 이어진 구조였다. 석진이 먼저 올라갔고 여주는 반 박자 늦게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소리만 났다. 묘하게 긴장되는 정적이었다. 이층 복도는 더 단정했다. 문이 몇 개 있었고 석진은 그중 하나를 열었다.

 

 

“여기 써.”

 

 

여주는 방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한 번 더 둘러봤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호텔처럼 비어 있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흔적이 과하게 남아 있지도 않았다. 당분간 머물기 좋은 상태였다. 석진은 여주의 반응을 보다가 말했다.

 

 

“옆 방은 내 방이야 무서우면 찾아와 ”

 

 

석진의 말이 끝나자 방 안 공기가 아주 잠깐 달라졌다. 무서우면 찾아오라는 말이 농담처럼 던져졌는데도 여주는 그 문장을 그대로 넘기지 못했다. 침대 옆에 서서 이불 끝을 손끝으로 한번 눌러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무서우면...이라는 조건이 붙는 게 좀 서운한데요.”

“그럼.”

 

 

석진이 문틀에 기대 선 채 여주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가볍게 웃고 있었다.

 

 

“졸리면으로 바꿔줄까.”

“그건 더 위험한 선택 같은데요.”

“본인이 고르는 거야.”

 

 

여주는 작게 웃으며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놨다.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시선이 조금 느슨해졌다. 낯선 집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되게.”

“.....”

“사람 살기 좋은 방이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비워둔 방 느낌이 아니라서.”

“비워둔 적은 없어. 처음부터 너 방이었지.”

 

 

장난기 서린 석진의 대답이 짧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주는 알 것 같았다. 여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석진이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고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네.”

 

 

석진은 그대로 복도를 건너 옆 방으로 들어갔다. 여주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눌러봤다. 적당히 단단했다. 잠시 후 석진이 돌아왔다. 손에는 접힌 반팔과 얇은 후드집업이 들려 있었다. 색은 무난했고 로고도 없었다. 새 옷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거.”

 

 

석진이 여주에게 내밀었다.

 

 

“나한테는 작아서 한번도 안입은 거야.”

 

 

여주는 옷을 받아 들고 잠깐 바라봤다. 소매를 펼쳐보니 확실히 여주 기준으로는 넉넉했다.

 

 

“오늘만 입고.”

“네”

“내일 집 들러서 필요한 거 챙기자.”

“되게 자연스럽게 계획 세우시네요.”

“이 상황이 너무 좋아서?”

 

 

여주는 후드를 한 번 더 접어 침대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도망 못 가게 하는 느낌인데요.”

“도망칠 생각 있었어?”

“아뇨.”

“그럼 문제없지.”

 

 

석진은 그제야 문을 조금 더 열어두고 말했다.

 

 

“씻고 와. 수건은 욕실에 있어.”

“석진 씨도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