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경고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묘사가 있음
“왜 죽였어?”
변호사가 물었다. 가을은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립을 바른 변호사는 비싼 반지 여러개를 낀 손으로 가을의 손을 잡았다. 신뢰를 사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가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기를 보라고 말했다. 고개를 들었다. 목이 꽉 메였다. 응어리가 진 듯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막 끌어올려진 생선처럼 힘없이 뻐끔거리다 내뱉은 것은.
“그게 중요해요?”
변호사의 눈이 설득할 여지를 알았다는 듯이 반짝 빛났다. 가을은 어깨를 으쓱했다. 손을 빼내려고 하자 변호사가 손을 더 꽉 쥐었다. 반지에 에둘러 박힌 보석 때문에 손이 아팠다. 변호사는 미묘하게 번진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그 애를 왜 죽였는지 알아야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다고. 가을은 손을 뿌리쳤다. 변호사는 입술이 약간 비틀렸지만 다시 웃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배가 아팠고 가슴이 저릿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도 알지 않길 바랐다. 상반된 감정이 온통 뒤섞이는 통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가을은 입을 열었다. 괜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가을에게 있어서 불리한 것이었고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걔가 먼저 날 죽였어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가을이 힘주어 말했다. 재판 때문에 다시 염색한 까만 머리카락마저도 떨렸다.
“걔가 날 먼저 망쳐놨다고요.”
맞아요, 죽이고 싶었어요. 그 몸뚱이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 잘난 면상도 뜯어내버리고 싶었어요. 손톱으로 온몸을 할퀴면서 아팠냐고, 내가 그랬던 것만큼 아팠냐고 따져 묻고 싶었어요. 발로 걷어차버리고 마구 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너도 당해보라고. 너도 얼룩진 기분을 느껴보라고. 내가 느꼈던 감정의, 그 개같은 느낌의 절반이라도 느껴보라고…!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말을 가을 자신도 감당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바들바들 떨리던 손이 손톱을 뜯고 나중에는 소리를 지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배가 찌르르 아팠다. 그냥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아니, 이젠 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작은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키는 감정들 때문에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가을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아니면 어떤 광기인지 모를 그것을 간신히 눌러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을 나갔다. 가을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으로부터 새카만 잉크가 번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라는 도화지의 심장에 만년필을 찌르자 새까만 잉크가 번져나가 온통 새하얗던 도화지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가을은 완전히 무너진 채로 흐느꼈다.
그럼 그때 내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해?
인간 실격
: 누가 죄인인가
오빠가 또 집을 나갔다. 가을은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오빠는 전봇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추레한 몰골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코 밑에 손을 대어 보자 온기가 있는 숨이 느껴졌다. 가을은 한숨을 쉬었다. 이따위로 살거면 그냥 콱 죽어버리지. 사람 구실도 못하면서 왜 이따위로 살아. 끙끙대며 차가운 몸뚱이를 던져놓자 바닥에 볼품없이 널브러졌다. 짜증이 나서 괜히 듬직한 등을 걷어찼다. 오빠는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꾸물꾸물 기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둘둘 말린 이불을 한번 더 차버리고서는 집을 나섰다. 못내 미안한거겠지. 오빠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이유도 다 알고 있었다. 취직해오겠다며 기세등등하게 집을 나가고서는 아무것도, 심지어 그 흔한 전단지 알바도 못하는게 자기 자신도 한심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오빠의 무기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가을은 오빠에게서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보였다.
어린 오빠에게 더 어린 가을을 맡겨두고서 엄마는 해외로 갔다고 했다. 돈을 벌러 갔는지, 아니면 홀어미 생활에 지쳤는지 떠나버린 엄마였다. 할머니는 엄마를 가리켜 ‘육시랄년’이라고 했다. 육시랄이라는 것이 ‘육시를 할’이라는 뜻이라는데, 아무래도 할머니는 엄마가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나보다. 떠날 때 아홉살이었던 손자가 스물넷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며느리를 그렇게나 싫어하던 할머니는 오빠가 대학 동기들과 스타트업을 런칭하는데 성공한 지 한달 쯤 되는 때에 죽었다. 그때까지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네 스타트업이 동기 한명이 자금을 몽땅 가지고 튀는 바람에 쫄딱 망해버려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는 한참 수화기를 두드리고 끝내는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욕을 했지만 가을은 엄마를 몰랐기 때문에 별로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감정도 없었다. 다만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 불만스러웠던 것은 그가 나약했다는 사실이다. 저가 낳은 자식들을 버려두고 그렇게 떠나있을 만큼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이 가을을 참을 수 없게 했다. 그 형질은 유전적으로 오빠에게 넘어갔다. 엄마가 오빠에게 나약을 물려줬기 때문에, 그래서 가을은 엄마를 경멸했다.
새로운 학교로 가는 길은 낯설었다. 버스 노선을 헷갈려서 20분이 지나고 나서야 잘못 탄 사실을 알아차렸고 빳빳이 다림질해둔 치마는 어느샌가 구겨졌다. 그렇게 도착한 학교마저 2학년 6반을 못 찾아서 한참을 헤맸다. 담임으로 추정되는 젊은 남자는 웃음을 띠고서 가을을 맞아주었다. 하지만 이미 8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흔한 전학생이었다. 동시에 안 흔한 전학생이었다. 등교 첫날에 10분이나 늦은 학생. 김가을. 열여덟살.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할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낯을 가리는 예민한 성격은 여고의 활기참에 묻혀버렸다. 운도 지지리 없지. 타이밍은 또 좆같아서 다들 친해진 뒤였다. 뭐, 어차피 나쁘지 않은가. 평소 관심을 즐기는 성격은 아닌지라 이게 오히려 편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짝을 빼놓고서 학교 생활은 김가을에게 완벽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제 막 전학 온 김가을보다 안유진이 더 안달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을에게 있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찐따 같아보이나. 평소 들여다보지도 않는 거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그렇게 말 걸고, 매점 데려가고…원래 말 많은 애인건 알았지만 왜 하필 나한테? 안유진의 행보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둘러싸여 깔깔거리고서도 가을과 눈이 마주치면 특유의 그 눈웃음을 지으며 가을의 쪽으로 다가왔고 매점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늘상 다음에 를 답하면서도 가을에게는 먼저 매점에 가자며 애처럼 졸라댔다. 아. 김가을은 거울을 덮으며 허무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해버린 것 같다. 안유진에게.
눈 앞에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바쁘게 문제집을 풀던 손이 멈추었다. 가을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맨날 공부만 하면 당 딸리잖아. 매점 같이 갈래? 경쾌한 톤이 가을에게는 성가시면서도 한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토록 무채색인 저도 유진과 함께 있으면 어떤 희끗한 색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져온 유진의 색으로 가을은 잠깐이나마 유채색의 기분을 느껴보았다. 어떨 땐 파랑, 어떨 땐 빨강, 아니면 회색인지 흰색인지 노란색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포근한 색. 이름을 안, 아니. 못 붙이는 색. 유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한 것이라고는 그저 손 잡아준 것 뿐인데 유진은 첫눈을 본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유진은 그 뒤로 2층에서 1층의 매점까지 가는 몇개의 계단 동안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라는 미션을 받은 사람처럼 떠들었다. 기본적인 가족관계, 성격, 좋아하는 것…. 존나게 식상했는데 듣는게 왜이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매점에 들어서서도 유진은 그 발랄한 목소리로 자기 친구들에 대해 입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 임한결은 자취를 하고, 장원영은…또 김지원은… 캔커피와 초코우유를 계산하고 빨대를 꽂은 뒤에서야 유진은 멈추었다. 가을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조용해지네. 가을이 중얼거렸다. 유진이 그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장면을 본다는 듯이 가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와! 말했다!”
어이가 쥐뿔도 없었다. 가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릿느릿 일어섰다. 목소리 진짜 좋다! 한번만 더 말해주면 안돼? 유진이 졸졸 따라오며 쫑알거렸다. 가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까지는 딱 이정도 관계이고 싶었다. 같이 매점 가고, 유진이 말하면 가을이 들어주는 관계. 남인지 친구인지도 분간이 안되는 관계. 가을은 그게 편했다. 그리고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었다. 유난히 포근한 봄이 촉매일지라도.
“머리 잘랐네?”
자리에 앉으니 유진이 말했다. 하얀 목이 다 드러날 정도로 자른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봄이라는 진부한 촉매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조용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결심은 유진의 한 마디에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눈에 띄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그냥 저질러버리기로 했다. 충동적으로 잘라버린 머리카락처럼. 가을에게 있어서는 정말 큰 용기였다.
“왜? 안 어울려?”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늦봄의 햇살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애들도 없었고 하물며 지나가는 선생님조차 없었다. 꽃가루가 날렸는지, 아니면 의도치 않은 봄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김가을이 그 무언가 때문에 눈을 깜빡였고 그 사이에 안유진이 짧게 자른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묶지도 못하는데 내려오면 불편하잖아. 유진이 말했다.
오빠가 또 집을 나갔다. 하지만 이젠 전봇대 아래를 익숙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않았다. 오빠가 잘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저 안유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매일같이 7시 30분에 옆자리에서 그를 기다리는 안유진 때문에. 왜? 걔가 보고 싶어서? 글쎄. 아마도?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을에게도, 오빠에게도. 어쨌든 부모님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을 챙겨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텅텅 빈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부러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래, 이게 훨씬 낫네. 마지막으로 웃어본 때를 되새겼을 때 그것이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이 가을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했다. 그것도 안유진 때문인가? 하얀 도화지에 무지갯빛의 물감을 떨어뜨린 듯 유진은 김가을의 십팔인생에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침범해오고 있었다. 유진이 스스럼없이 다가왔기 때문에 가을은 점점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이미지란 가을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남들이 비누조각처럼 저들 맘대로 조각해버리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비누조각’이 마음에 들기는 오랜만이었다. 유진의 친구들도 가을이라는 도화지를 찾아와 저들만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김지원이라는 아이는 옅은 분홍색, 장원영이라는 아이는 쨍한 파란색. 윤서준이라는 아이는 밝은 노란색, 임한결이라는 아이는 세련된 보라색을 남겼다.
다만 한결은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다른 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조금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점이 아니라 선을 원했고 선이 아니라 면을 원했다. 가을의 낯가림 때문에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진과 달리 한결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건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기억도 안 날 때부터 친구였다고, 심지어 부모님까지 절친이라고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 어쩌면 배려였지만 아직 한결은 봄을 참고 여름을 참고 늦가을을 기다릴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건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수많은 색이 가을을 스치고 지나갔고 어떤 색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가을의 중심, 그리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색은 유진이었다.
“가을아!”
익숙하게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유진은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잠시 초여름을 즐기면서 하릴없이 매미 소리를 감상했다. 매미 소리 별로다, 그치. 유진이 말했다. 가을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좋아, 매미 소리. 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가을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 더 당겨 앉았다.
“이번주 주말에 우리 엄마 아빠 집에 없거든. 공부하러 올래?”
유진이 물었다. 가을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매미가 울었다.
“그래.”
그리고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에 또 매미가 울었다.
“좋아.”
그리고 오랫동안 매미는 울었다.
맴
매-앰
맴
맴
“어디 가?”
오빠가 물었다. 가을은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 집에. 짤막하게 대답하자 오빠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누구 집에 가는거냐, 초대해서 가는거냐, 막무가내로 가는거면 관둬라…평소대로라면 짜증났을 오빠의 잔소리도 별로 성가시지 않았다.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문제집들을 아무렇게나 쑤셔넣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카톡에 찍힌 주소를 향해 달렸다. 제 몸무게의 절반은 될 것 같은 가방이 날개돋친 듯이 가벼웠다. 현실성 없었다. 그렇지만 안유진 그 자체가 현실성 없는 아이였고, 사건이었다. 분홍, 주황, 노랑이 섞인 봄을 지나고 여름을 생각했을 때 마냥 붉은색이 아니라 파란색,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색이 생각나는 것처럼. 안유진도 그런 애였다는 것이다. 뭘 상상했을까? 늦푸른 봄을 지나는 가을은 상상력은 없어서 아마 캔커피와 그 옆에 놓인 초코우유를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성의 필요성을 증명하듯이 유진의 곁에는 이미 두세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럼 그렇지. 유진이 요근래 가을과 가깝게 지낸 것 뿐이지 원래 그는 소위 ‘인싸’ 였음을 기억했어야 했다. 그 상수값을 깜빡하고 한 계산은 당연히 뒤죽박죽이었다. 가을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다들 가을을 반겨주었지만 가을은 화끈거리는 귀를 의식하며 문제집을 꺼내들고 마치 내일까지 그 모든 것을 다 풀어오라는 숙제를 받은 것처럼 문제를 풀어나갔다. 한결이 김가을은 역시 김가을이라며 떠들어대고 지원과 원영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을의 신경은 온통 유진에게 가 있었다. 수능기출 딱지가 붙은 미적분 문제에도, 수험생의 혼을 쏙 빼놓는다는 언매 킬러문항에도 가을은 유진을 힐끔거렸다. 유진이 일어섰다. 한결과 몇번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한결이 옆으로 물러나고 유진이 가을의 옆에 앉았다. 익숙한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문제 푸는 속도가 안정되어갔다. 유진의 비싼 샤프펜슬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에서 움직였다. 찌익. 종이 찢어지는 소리에 가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유진이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당최 무슨 뜻인지 몰라 가을은 다시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기대한거야, 대체. 괜히 섭섭한 감정을 억누르고 샤프심을 딸깍이는 중에 옆구리에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을은 눈알을 굴리며 유진을 곁눈질 했다. 가을과 눈이 마주친 유진이 샤프펜슬의 끝으로 테이블 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솜방울이 달린 그 끄트머리에 노트 귀퉁이를 뜯어낸 것이 분명한 쪽지가 놓여 있었다.
‘편의점 갔다올래?’
가을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답을 휘갈겨 썼다.
‘응’
유진이 가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우리 음료수 사러 편의점 다녀올게! 유진이 거실이 울리도록 말했다. 공부에 집중한 몇몇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눈치껏 공부하고 있던 나머지는 환호성을 지르며 원하는 음료수 메뉴를 외쳤다. 쏟아지는 주문에 가을은 그것을 폰에 받아적느라 바빴다. 그때 유진이 가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을의 귀에 짓궂게 속삭였다.
“그거 다 적으면 언제 나가게?”
가을이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씩 웃었다. 그리고서는 몸을 돌려 호령하듯이 말했다.
“아, 됐고! 우리집이니까 내가 좋아하는거 먹자.”
여기저기에서 장난스러운 야유가 들렸지만 유진은 똑같이 장난을 받아주고 깔깔거리며 가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공부하는 동안 비가 내렸는지 미세먼지 섞인 공기가 제법 맑았다. 편의점에서 에너지 드링크와 과일주스 등을 사고 나니 카드에 돈이 조금 남았다. 유진이 어디선가 아이스크림 두개를 들고 와서 결제했다. 하나 너 먹어. 유진이 건네주었다.
“잠깐 앉았다 가자.”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를 지날 때 쯤 유진이 말했다. 가을은 순순히 그네에 앉아 조용히 아이스크림만 깨작거렸다. 유진은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먹었다. 둘이 움직일때마다 그네의 줄이 끼릭끼릭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진의 집에 온 지는 1시 쯤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하늘에는 별이 박혀 있었다. 새삼스럽게 피곤해져서 가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오늘 좀 서운했지.”
“왜?”
“아니, 그럴 것 같아서. 처음엔 너랑 단둘이서 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애들이 너도 나도 찾아와서…. 나 이런거 거절 잘 못해. 의외지?”
“진짜 뜻밖이긴 하네.”
가을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뭐가 좋은지 유진이 활짝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가을도 같이 웃었다.
스터디 이후 그날 유진의 집에 왔던 아이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정확히는 가을이 두려움 없이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한결 또한 드디어 조금씩 가을의 속도에 맞추는 것 같았다. 한결과 있으면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가을이 그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다기보다는 한결의 눈빛이 어쩌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유진과 이야기해볼까 했지만 이것만큼은 혼자 하고 싶었다. 교실의 장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묻혀 있던 가을을 끄집어낸 것도, 친구들의 무리에 끼워준 것도 유진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을은 천천히 자신의 속도대로 한결에게 다가갔다. 선을 긋던지, 아니면 정말 한결이 원하는 그것이 될 것인지 두고보면 알 것이었다. 한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급하게 굴었다. 그래서 가을이 도망가고 한결이 쫓아가는 그런 관계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애들의 술래잡기나 다름없었다. 서로 스스럼없이 팔을 만지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깔깔거렸다. 그러다 술래잡기는 더욱 격해졌다. 험상궂게 손목을 잡고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댔다. 그저 술래잡기일 뿐이라고 합리화 했지만 한결은 가을을 끌어당겨서 품에 안고 허리를 그러잡았다.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중이었으나 한결은 가을보다 빨랐다. 마침내 한결이 거칠게 손목을 잡아 창고 바닥에 가을을 넘어뜨렸을 때 가을은 알았다. 돌아가기 한참 늦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어릴 적에 오빠와 할머니와 함께 동물원에 가서 기다란 뱀을 팔에 감아본 적이 있었다. 한결은 가을을 창고로 데려간 뒤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욕을 짓씹었다. 마치 맹독을 뿜는 뱀처럼 가을의 온몸을 쥐고 헤집었다. 그 ‘뱀’의 맹독이 장기를 녹이고 입구멍을 막고 숨을 죄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을 창고 바닥에 헝겊인형처럼 널브러진 채로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아득히 수업시간 종이 울리는 채로.
한결이 너무 조급했던 것일까?
아니.
가을은 어지럽혀진 교복과 까만 발바닥이 찍힌 새하얗던 눈밭의 심정으로 한결이 먼저 나간 창고 안에서 쭈그려 흐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 늦어서.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멍청한 김가을, 안유진이 없으면 싫다는 말도 못하는 김가을. 그게 끝끝내 자기자신을 무엇으로 내몰았는지. 가을은 창고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넥타이를 보았다. 멍한 눈으로 수없이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유진이 체육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창고 주변을 지나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서 창고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가을은 그 길로 목을 매었을지도 모른다. 유진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유진은 흐트러진 교복을 추슬러주고 가을을 꽉 안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꽉. 하지만 그것이 가을에게는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한결과 유진을 비교할 수 있을까. 탈수로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목놓아 우는 중에 유진이 보지마! 다 꺼져! 하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폰, 폰 꺼. 가을아. 절대 폰 보지 마. 인스타고 페북이고 다 삭제해. 제발. 내 말 들어. 유진이 덜덜 떠는 손으로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두서없이 지껄이다 결국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가 잘못한게 아니야, 가을아. 니 잘못이 아니야…
“글쎄요.”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한결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여유, 그리고 자신감이 보였다. 가을과 유진을 잠깐 쳐다보던 그는 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결이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한결이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전학생이 이런 일까지 꾸몄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꾸며놓은 꼴이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네요.”
교장은 한결의 어머니에게 이것은 그저 한결이 이 일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해두기 위한 것이며 생기부에도 전혀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한결의 어머니는 교장이 내민, 그리고 가을과 유진이 제출했던 서류를 덮어버리고서 살짝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내 아들이 맘에 들지 않는 건 잘 알겠어요, 학생.”
한결의 어머니가 가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귀에 박듯이 말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감정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망쳐서야 되겠어요? 학생도 지금 이거 길게 끌고 가봐야 좋을 것 없어요. 기를 쓰고서라도 무죄 받아낼 거거든, 내가. 설령 사실이더라도 벌써부터 그 나이에 남자와 몸 섞은 걸 함부로 떠벌리고 다녀서야 쓰나.”
학생에게도 득 될 것은 없어요. 우리나라 법이 어떤지 학생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더 큰 소란 피울 생각하지 말아요. 깨진 거울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고 유진아. 저런 애하고 어울리다간 네 인생 네가 직접 꼬는 꼴 되는거야. 아직 어려서 그런거라고 생각할테지만,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생긴다면 한결이한테 접근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야.
가을은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일으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나중에 누구 죽이기라도 하면, 꼭 당신 같은 사람이 변호사였으면 좋겠네요.”
“…”
“나도 그냥 이렇게 끝나버리게.”
자퇴했다. 기초수급자 오빠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학생에 대해 교장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담임도 그저 앞으로 자기 미래를 생각하며 현명하게 살아가라는 말만 했을 뿐, 자퇴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유진만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가을을 한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왜 자퇴를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임한결을 내버려두는지 오로지 유진만이 알고 있었다. 김가을 석자가 사라지고 하루 후인 여름방학식날이었다.
안유진이 임한결과 싸웠다.
여름방학식 전날에 자퇴한 전학생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서로 멱살까지 잡아가며 싸웠댄다. 여자애가 남자애를 상대로 그를 거의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렇게 맞은 임한결이 보건실로 부축되어 가자 유진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울음을 터트렸다는 것이 학교를 들썩였다. 안유진이 임한결에게 억하심정이라도 있었던게 아니냐는 말과 ‘그’ 안유진이 그렇게까지 할 정도면 임한결이 뭔가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말이 서로 뒤엉켰다. 다행히 그것은 서로 사과문으로 끝났다. 안유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임한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교직원의 신임이 부족했으면 학폭위가 열렸을 것이기 때문에.
“야.”
한결이 돌아보았다. 싸움의 흔적은 비단 임한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할퀸 자국에 반창고를 붙인 유진은 누구보다 절박해보였고 동시에 누구보다 잃을 것이 없어 보였다.
“이거 진심이야?”
유진이 물었다. 한결은 몸을 돌려 유진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야, 안유진. 잘 생각해.”
우리가 왜 걔 하나 때문에 이렇게 갈라져야 해? 걔가 너한테 뭐 해준거라도 있어? 너 없으면 반에서 찐따처럼 박혀있을 애가, 너 덕분에 신분상승한거잖아. 우리 엄마, 걔 때문에 학교 불려갔고 나도 이미 충분히 힘들었거든. 잘 생각해. 난 우리 우정 이렇게 끝내기 싫다. 한결이 말했다. 담담한 어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유진은 진정하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미치겠다.”
유진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가 지금까지 니같은 애랑 죽마고우랍시고 그렇게 다녔다는게 어이가 없네?”
이것도 진심이었지? 그래, 그렇겠지. 내 얼굴에 상처 입힌 것처럼, 가을이한테는 더 그랬겠지. 아주 온몸을 그렇게…! 그렇게 더 깊게 못 할퀴어서 안달이었겠지. 내가 진짜 어이 없는게 뭔줄 알아? 넌, 넌 그딴 짓을 하고도 멀쩡하다는거야. 아무것도 바뀐게 없다는거야. 왜 가을이가 숨어야 해? 왜 가을이가 학교를 나가야 하냐고! 어째서 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다니는건데? 도대체 왜!
“야, 안유진!”
“왜? 니가 한 짓 다 까발릴까봐 쫄려?”
한결이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한숨을 내쉬면서 돌아섰다.
“너 잘못 선택한거야. 그런 애하고 어울리는거, 누가 좋아할 것 같아? 네 부모님?”
웃기지 말라 그래. 나하고 몸 섞은 그 순간부터 걔는 깨진 거울이야.
유진은 방학 내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학원을 빠지고 공부도 잘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유진은 가을이 더 걱정되었다. 세번째 계절이 다가올 수록 가을이 더 보고 싶어졌다. 개학식 후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생소한 전화번호에서 걸린 전화를 받았다. 근방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수화기 너머 들린 이름은 유진이 그 한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곱씹은 이름이었다.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는 그런 이름. 유진은 바로 옷을 챙겨입고 병원으로 뛰쳐나갔다. 자전거가 있었음에도, 택시를 탈 돈이 있었음에도, 아빠 차를 탈 수 있었음에도 유진은 뛰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까지 이어져 온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합리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몰랐던 자신을, 자기 나름의 ‘충격’이라는 방패를 쓰고 정작 화살이 빗발치는 곳에 맨몸으로 서 있는 가을을 외면한 자신을 용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용서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이 뼈저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가을이 입원한 병원이 지구 대척점의 우루과이일지라도 유진은 기꺼이 뛰어갈 것이다.
“김가을!”
장소도 잊고 그렇게 소리쳐 부른 그 이름이 자신을 용서해준다면.
가을은 유진의 옆에 초코우유를 놓았다. 그리고 제 것으로 산 캔커피를 땄다. 가을이 마시라고 손짓했다. 유진은 초코우유를 손에 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초록에 접어든 나무들과 새하얀 병원 건물이 깔끔한 조화를 이루었다. 유진은 한참 말을 골랐다. 가을은 피식 웃으면서 유진의 옆에 앉았다. 머뭇거리면서 말을 생각하는건 언제나 제 몫이었는데. 가을의 옆에 선 링거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한층 어색해져버린 공기가 서로 이해되지 않았다. 입을 먼저 뗀 것은 가을이었다.
“잘 지냈어?”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못했네.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고 그토록 피하고 싶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진의 목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울고 싶었다. 가을을 붙잡고 한참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정녕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가을이 말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제일 아픈건 너잖아. 제일 힘든건 너잖아. 왜 네가 그런 말을 해? 왜, 어째서 네가 그렇게 말하는거야? 비참해지는 기분에 유진은 초코우유를 더 세게 쥐었다.
“병원에는 왜 온거야?”
유진이 힘겹게 말했다. 어떤 말도 비수가 되고 상처가 될 것 같아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최대한 돌아서, 최대한 천천히. 가까워질 땐 가속페달일지라도 위로에 있어서는, 다시 가까워지는데 있어서는 악셀이란 존재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그냥. 수면제 먹고 기절했거든.”
가을이 또 짤막하게 대답했다. 유진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동안의 기도가 무색하게 가을은 그런 모습으로 유진의 앞에 서 있었다. 가을의 손을 잡았다.
“오빠도 몰랐어.”
오빠가 있었구나…. 유진은 애꿎은 손톱을 괴롭혔다. 가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상관없어, 뭐.”
이제 집에 가면 나 혼자야. 가을이 말했다. 유진이 고개를 돌려 가을을 마주보았다. 시선이 어색하게 맞닿았다. 가을이 크게 숨을 들이쉬고서는 한숨 쉬듯이 말했다.
“애써 키운 여동생이 그렇게 됐다는게, 참기 힘들었나보지.”
에둘러 말하는 바람에 유진은 가을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더 많은 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가을이 유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담담하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입을 열자 눈물방울이 떨어져 얼굴에 길게 선을 그었다. 있잖아, 유진아.
“나…이제…고아야…….”
내가 죽인걸까? 유진아, 내가 오빠를 죽인걸까? 나 때문에 오빠가 뛰어내린걸까? 내가 그때 임…임… ‘그 애’를 밀어냈으면, 내가 어떻게 뭐라도 했으면 오빠는 지금 살아있었을까? 유진은 가을을 꽉 끌어안았다. 제발 네 탓 하지마. 가을아. 제발. 네 잘못이 아니야. 바보같이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자신이 미웠다. 가을이 주춤거리다 유진에게 자신을 맡겼다. 그리고 눈물 사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 아닐 수가 있어…? 어떻게…어떻게 생각해도 다, 내 잘못 같은걸…”
아냐, 가을아. 그게 아니야. 넌…넌 그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어떤 미친 개새끼가 달려들어서 널 문 것 뿐이라고. 단지 그것 뿐이라고. 어째서 그것이 가을의 잘못이 되었는지, 왜 가을이 죄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지 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깨진 거울. 그것이 왜 가을을 수식하게 되었는지. 어째서 아무도 거울이 깨진 것 같아 보인 것은 단지 누군가가 거기에 멋대로 검은 선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한참을 울고 난 뒤 가을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 발갛게 충혈된 눈을 살짝 접으며 가을은 살포시 웃었다.
“내가 괜찮아지면…우리집 올래?”
의문형이었지만 동시에 청유형이었다. 와줘. 우리집에 와줘. 가을은 유진의 눈을 마주보며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느긋한 성격은 이럴 때만 강점인 것 같았다. 유진은 가을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그래.”
늦여름의 마지막 매미가 울었다.
맴
매-앰
맴
맴
언젠가부터 새로운 봄이 왔다. 새로운 친구도 생겼다. 유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니까 가을이 괜찮아질 때까지 여유롭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고대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가을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관계에서 기다림이란 누구 한명의 몫이 되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나름 늦지 않게 깨달은 것에 감사했다. 초봄과 늦봄을 건너서, 그리고 초여름을 지나서도 유진은 기다렸다. 기다리면 결실이 온다. 설령 가을의 약속이 없었더라도, 가을이 그것을 지킬 마음이 사라졌더라도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어린 학생의 치기도 아니었고 감정에 휩쓸려 내린 성급한 결단도 아니었다. 차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캔커피와 매미소리와 놀이터 그네에 앉아 먹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중심에 올려놓고. 언제든지 그것들의 교집합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유진아
-방학 때 시간 돼?
“너 온다고 오랜만에 청소했어.”
가을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집은 오래전부터 더러워져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뭐야, 내 방보다 더 깔끔한데? 유진이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선풍기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유진은 거실에 짐을 내려놓고 가을의 옆에 앉았다. 여기에 이런 곳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창문 너머 녹음은 푸르렀다. 쨍한 초록색에 유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몸 속 깊이 초록색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지냈어?”
가을이 물었다.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혀를 내둘렀다. 말도 마, 진짜 지옥이야. 유진이 말했다. 가을은 쿡쿡 웃으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유진도 옆에 누웠다. 오늘 자지 말까? 유진의 쪽으로 몸을 돌리며 가을이 물었다. 유진은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좋아’ 라고. 가을이 웃었다. 내심 더 웃어주길 기대했는데 모자라는 것은 함께 웃었다. 맑은 공기 덕분에 기분이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가을이 유진을 먼저 껴안았다. 진짜 보고 싶었어. 가을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더 보고 싶었을걸?”
유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 진짜로? 가을이 일부러 캐물었다. 유진은 또 함박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정말 그렇다니까. 나 못 믿어?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이 염색한 머리를 쓰다듬어보았다. 푸른빛 나는 머리카락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예쁘다. 무심코 내뱉었다. 둘은 두 팔을 활짝 펼쳐보았다. 창문에 달아둔 풍경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에 만난 건데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는 유진의 강력한 의견에 밖에 나가서 여느 고등학생들이 할 법한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가을은 종이인형처럼 팔랑거리면서도 잘도 따라다녔다. 둘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인생네컷 부스였다. 셔터가 눌리고 곧 사진이 인화되어 빠져나왔다. 가을이 돈을 냈다. 사진을 비닐에 조심스럽게 끼워넣고 인생네컷 바로 앞에 있는 노래방에 들어갔다. 진짜 오랜만이다, 노래방. 가을이 말했다. 열살 때 오빠하고 노래방 와본게 다야. 동전을 넣고서 아무 노래나 틀고 불렀다. 목이 다 쉬어갈 때 쯤에 노래방을 나와 발 가는 대로, 손가는 대로 돌아다녔다. 예상하지 않은 과소비의 죄책감도 있었지만 그따위 과감하게 내버릴 수 있었다. 김가을에게는 즉흥이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어떨 땐 먼저 유진을 잡아끌기도 하면서 함께 웃고 떠들며 돌아다녔다. 하루 종일. 단 1그램의 불안도 사라지도록.
“재밌었어?”
유진이 물었다. 손깍지를 낀 채로 하릴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낯선 귀고리를 끼고 낯선 팔찌를 하고 있었다. 다 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플라스틱 컵이 왼손에 들려 있었고 버릴 타이밍을 놓친 컵떡볶이, 핫도그 꼬치가 오른손에서 달랑거렸다. 머리 위에는 가을이 어울린다며 냅다 꽂아준 강아지 머리띠도 있었다. 가을도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였다. 못 챙겨준 지난 생일선물이라며 유진이 통 크게 쏜 청자켓이 폼나게 걸쳐져 있었고 눅진해져버린 아이스크림콘이 양손에 쥐여 있었다. 유진을 따라 큰 맘 먹고 뚫은 귀에는 유진의 것과 똑같은 귀고리가 달려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다음날 저녁의 오붓한 만찬을 위해 산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집에 갈까?”
“좋아.”
집에 돌아온 뒤 둘은 마루에 엎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한계를 외쳤다. 유진은 가을을 쳐다보았다. 힘들었지. 유진이 물었다. 가을이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었다.
“가끔은 이렇게 놀아봐야지.”
먼저 씻을게. 유진이 혼자 누워 낮에 여운에 허우적거렸다. 다 씻은 후에 둘은 함께 선풍기를 틀고 모든 불을 껐다. 깜깜한 방 안에서 가을과 유진은 폰으로 이것저것을 보며 깔깔거렸다. 대화의 흐름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타투까지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까만 방의 유일한 빛이었던 폰화면을 보던 가을의 눈빛이 문득 오묘한 빛을 띄었다. 자그마하고 심플한 타투 도안이 보였다. 가을이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 이거 해볼래?”
귀를 뚫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찾아온, 그것도 꽤 늦은 시간에 온 손님들 덕에 주인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여러가지 도안을 보여주면서 살인적인 가격을 불러댔다.
“저희가 직접 해봐도 돼요?”
가을이 물었다. 주인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자기가 도와줄테니 한번 해보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가을이 먼저 하기로 했다. 우정 타투를 할 곳은 이 세상에서 딱 둘만 알고 있을 곳, 아마 거의 대부분이 보지 못할 곳이었다. 가을이 괜히 무섭다고 앙탈을 부렸다. 유진은 주인의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들으며 가을의 날개뼈에 자그마한 하트를 새겼다. 정말 작은 나머지 그곳에 타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타투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었다. 다음에는 유진의 차례였다. 가을은 평소 성격대로 신중하고 꼼꼼하게 하트를 그려넣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새기고 다시 돌아왔다. 문신하면 나중에 직업에서 제약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왜 김가을 한 사람에게 인생을 거는건지, 유진은 따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진짜 자는거야, 눈 뜨면 안돼. 다시 누운 뒤 가을이 말했다. 유진과 가을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아니, 가을이 유진에게 절대적으로 매달렸다. 필사적으로 깨끗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가을은 유진을 이용했다. 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빛나는 이 아이의 품에 안겨 있으면, 어쩌면 눈밭에 찍힌 발자국도 옅어지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로 둘은 눈을 감았다. 가을은 온갖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이것도 유진에게 해를 끼치는건 아닐까 하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에 가을은 일어서서 옷을 챙겨입었다. 청자켓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들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주소로 걸어갔다. 걷는 동안 다리가 칼에 베이는 듯이 아팠지만 꿋꿋이 걸었다. 차마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노크를 했다. 잠깐의 적막 동안 심호흡을 했다.
“임한결.”
늦은 밤의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한결을 똑바로 마주보며 가을이 말했다.
“우리 대화 좀 해.”
빈둥거리며 하품을 가까스로 참던 신참 경찰은 늦은 밤 걸려온 전화에 욕지거리를 했다. 한껏 불량스러운 태도로 전화기를 집어든 그는 성가시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
“경찰이죠?”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심호흡을 했다.
“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유진은 수많은 플래시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저멀리 걸어가는 가을의 뒷모습을 쫓느라 바쁘면서도 동시에 ‘저렇게 플래시 터트리면, 가을이 머리 아플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어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인파 속에서 산발을 한 한결의 어머니가 달려나왔다. 너댓명의 경찰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앞에 선 그녀는 가을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왜 죽였어, 왜! 이미 용서했잖아! 그 창창한 애를 왜 죽였어!”
텅 빈 눈을 하고 있던 가을은 ‘용서’ 라는 말에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쳐냈다.
“용서했다고? 도대체 누가 용서했는데!”
경찰이 한결의 어머니를 제지해 떼어놓았다. 가을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난 그 개새끼 용서한 적 없어!”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일그러졌다. 그래, 그랬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빼놓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가장 날카로운 칼로 후벼판 상처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을거라고 넘겨짚었을까. 유진은 더는 가을을 쫓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호송차량에 타기 전 가을이 뒤를 돌아보았다는 사실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가을의 살해동기가 밝혀지면서 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학교 내 성폭력.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이미 수없이 조명되었음에도 여전히 암흑에 싸인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말에 순순히 짐을 싼 유진은 매일같이 뉴스를 보며 막막함에 눈물을 훔쳤다. 죽이고 싶었어요. 안 죽이면 내가 먼저 죽게 될 것 같았다고요. 검찰에서 공개한 심문 결과는 그랬다. 죄책감이 유진을 찔렀다. 유진이 열아홉의 여름을 지나는 동안 가을은 여전히 열여덟의 여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을이 느려서가 아니었다.
가을은 제 앞에 선 자신의 담당 검사를 곁눈질했다. 깔끔한 정장과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김석진. 이름조차 깔끔했다. 그는 가을을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다.
“가을 씨의 억울함을 덮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나도 여동생을 그렇게 잃어버렸거든.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을 씨의 형량을 줄여주고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오직 가을 씨만이 스스로 형량을 줄일 수 있어요.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면 정상 참작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가을 씨를 아끼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심문에 성의껏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가을은 고개를 들어 검사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띄엄띄엄 말했다.
“죽일 생각도 없었어요. 처음엔. 죽일만큼 미웠어요. 토막을 내버려도 후련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커터칼을 드니까 너무 무서워서…진짜 내가 여기까지 치달았구나 싶어서…그래서 칼을 떨어뜨렸는데…걔가 다시 날 덮쳤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난…난 너무 살고 싶었거든요. 누가 뭐래도…살고 싶었다고.”
검찰은 곧 현장 검증을 하겠다고 밝혔다. 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팔 수 있는 모든 곳을 찔러볼 심산인 것 같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고려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살고 싶어서 죽였어요”…곁에 아무도 없었던 십대 소녀의 절규…
기사 헤드라인을 본 유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어째서 세상은 그토록. 유진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현장 검증 장소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법대 원서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을에게는 유진이 필요했다. 자그마한 몸에 넘치도록 받고 있는 거북한, 어쩌면 무서운 시선으로부터 감싸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가을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가을의 곁에는 유진이 있었다.
명백한 살인죄였다. 변호사 측에서는 죽일 생각도 없었다는 진술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 후의 진술을 검사 측에서 맹렬히 파고드는 바람에 상해치사죄도 될 수 없었다. 가을은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어떻게든지 처벌은 받게 될 것이었다. 현장 검증은 가을에게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가을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성을 붙잡으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유진을 찾았다. 다행히 유진은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았길 바랐다. 이렇게까지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가을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이미 다 포기했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우리 측에서 승소할 수 있는 건, 이젠 감정에 호소하는 것 밖에는 없어. 너도 알고 있다시피 국민여론은 우리 편이야. 검사를 몰아붙여야 해. 온 국민을 상대로 싸운다는 압박감을 줘야 한다고.”
오천만 국민을 상대로 싸웠는데 구형도 제대로 못 한다면 그땐 법복을 다시 입을 검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변호사는 그 말을 끝으로 가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고서는 방을 떠났다. 가을은 마치 그것이 먼 나라의 다른 사람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는 변호사에게서 기이함을 느꼈다. 동시에 변호사의 말의 주어가 될 그 검사에게 어렴풋이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간에 가을은 항소 따위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재판을 사흘도 채 남겨두지 않고 홀로 앉아 있는 밤이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않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 누군가는 이 살인이 피해자가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정당한 정의실현이라 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수사하면서 1년 전의 그 일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것은 정의실현이며 피해자가 그 죄에 걸맞는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검사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방청객석에 앉은 한결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알까, 유진은 터져나오려는 온갖 말을 다물었다. 그녀, 그때, 그 말 때문에 벌써 두명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것을 알까. 그 중에 하나는 그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다른 국가에 비해 턱없이 적은 형량, 그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엔 자명히 부족한 피해자 지원, 그리고 이를 그저 덮어두고 새어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안일함까지 말입니다. 이 재판을 준비하면서 저는 검사로서 이 사태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는 검사로서 - 검사가 힘있게 말했다. - 오로지 피의자가 합당한 죗값을 받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말입니다.
피고인의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법의 존재 이유에 있습니다. 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이번 사건처럼 제 2, 제 3의 피해자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고 끝끝내 누군가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처럼 살인은 계속해서 살인을 낳을 것입니다. 이 악순환을 끊을 의무가 제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이 피고인의 억울함을 덮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국민은 법이라는 울타리의 보호 아래 있으며, 그 울타리의 보호는 남녀노소, 피해자 피의자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유효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저 사람 때문에, 혹은 내 가족이 친구가 지인이 저 사람 때문에 사지에 몰렸는데 가해자도 국민이니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연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고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우리가 직면한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저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진은 가을의 쪽을 쳐다보았다. 가을은 미동없이 검사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쩌면 법복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누르스름한 미결수의 옷이 낯설게 느껴졌다.
“첫째, 가해자는 그 어떠한 것에도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법은 가해자 또한 국민으로서 합당한 처벌을 모두 받은 뒤 범죄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출발 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이번 재판의 피고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점에서 두번째 결론은 더욱 중요합니다. 부디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재판장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피해자를 위한, 그리고 피의자를 위한 최선의 판결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검사, 구형 하십시오.”
“저는…”
그때였을 것이다. 유진과 가을의 눈동자가 함께 맞물린 것은. 가을은 그제서야 고개를 숙였다.
“피고인을 살인죄로 징역 5년 2개월을 구형하는 바입니다.”
“가을아, 나 왔어.”
잘 지내고 있는거 맞지? 얼굴이 반쪽이 됐어. 유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가을은 살포시 웃었다. 그냥…잘 지내지 뭐. 그가 말했다. 벌써 두달이 흘렀다. 유진은 플라스틱 창에 괜히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나 열심히 살고 있을게. 진짜 열심히 살게. 그니까 너도, 너도 절대 다 놔버리지 마. 알겠어? 문득 떠으르는 문장을 두서없이 내뱉자 가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안아주고 싶다. 유진은 그 말을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가을이 플라스틱 창 너머의 유진의 손에 자기 손을 같이 가져다 대었다. 절박했다. 당장 유진을 끌어안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끝내 이 지긋지긋한 임한결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다 가을은 조심스럽게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유진아.”
너 괜찮아? 유진은 흠칫 놀랐다.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한결은 범죄자였다. 그것도 부모님 빽으로 자기 죄를 묻어버린 범죄자.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옛정이란 쉽게 끊어내기가 어려웠다. 유진은 양날의 검을 쥐고 있었다. 그것으로 가을을 찌르게 될 지 한결을 찌르게 될 지 유진도 몰랐다. 혼란스러웠다. 그간 죽일듯이 분노해 온 것도 자신이었다. 유진은 잠시 후 고개를 들고서는 웃었다. 가을도 웃었다. 서로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면회 시간이 끝나자 유진이 먼저 일어섰다. 밥 꼭 챙겨 먹고, 나 덜 바빠지면 꼭 올게! 유진이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가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렇게나 초라해져버린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이런 자신에게 인생의 한켠을 내어주는 유진도 야속할 정도로 고마웠다. 갚을 수도 없는 호의를 왜 잠식될 정도로 베푸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가족도 없는 깨진 거울이 뭐라고. 슬로우모션처럼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면회소를 나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을은 다음의 사실을 목도한다.
첫째. 안유진은 김가을에게 있어서 생애 다시는 없을 사람이다. 사랑 같은 친구, 친구 같은 동경.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그것이 들 때면 어김없이 유진에게 기대었던 것 또한 그 이유였다. 마치 어린애가 부모에게 기대듯이. 일방적으로 기대는 관계는 서로를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언제까지고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가을은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할 수도 없었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무슨 면목으로 유진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다시 내뱉을 수 있을까.
둘째. 안유진은 김가을의 인생이란 게임의 npc가 아니다. 언제나 있어주길 바랄 순 없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하고도 유진을 제 곁에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안되는 일이었다. 가을은 자신을 스쳐간 수많은 인연을 생각했다. 한숨을 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유진의 호의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 가을은 그것을 꽤 오래전부터 유념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해왔음에도 마주친 현실은 예상보다 더 암담했다. 그래서 가을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네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뭐냐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변이 세번째 사실이었다.
셋째. 김가을은 안유진이 없으면 안된다.
가을은 방 안에 쭈그려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저녁 배식 시간이라는 말에 나가지 말까 생각했지만 유진을 생각해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안유진 전용 안드로이드 다 됐네, 김가을. 그렇게 비아냥거렸음에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줄이 유진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밥과 두부 된장찌개, 배추김치와 구운 김이 올려진 식판을 들고 아무 테이블에나 앉았다. 제 또래, 혹은 저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을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모두 저를 보고 하는 것 같았다.
“거기.”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가을은 흠칫 놀랐다. 습관이었다. 정확히는 여기 오고 나서 생긴 습관. 뭘 그렇게 놀라. 불쾌하다는 듯이 대학교 3학년 나이라는 사기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진짜 사람 죽인거 맞아?”
“…”
“아니, 누가 봐도 사람 죽인 얼굴은 아니잖아. 아 혹시 강x 당하면 사람 정신이 나가?”
가을은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눈에 핏발이 섰다.
“뭐라고?”
“아, 뭐!”
“뭐라고 했냐고, 미친년아!”
“뭐? 미친년? 진짜 사람 정신 나가나보네. 너 말 다했어?”
서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싸우고 있자니 경비원들이 와서 둘을 떼어놓았다. 적막이 흘렀다. 가을은 먼저 식당을 나갔다.
“수능 얼마 안 남았지.”
“응…날도 추워지고……이제 진짜 마지막 같아.”
수능 끝나면 또 올게! 유진은 여느때처럼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면회소를 나가는 유진의 등을 향해 가을이 문득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유진아.”
이토록 큰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라 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벌써 방 하나 쯤의 간격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딱 저와 유진 사이의 거리인 것 같아서 가을은 괜히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여기서 흔들리면 유진도 자신도 또다른 미련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또다른 기회를 기대하고 뒤를 돌아보고. 하지만 그래선 안됐다. 유진을 위해서라도 가을은 유진의 한 페이지, 한 줄 정도로만 남아야 했다. 깨진 거울이었다. 모두가 가을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깨진 거울은 치워버려야 했다. 그걸 쥐고 있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그래서 가을은 먼저 이 관계를 끊어야 했다. 그것이 단검을 떨어뜨린 인어공주의 결말이더라도. 깨진 거울.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었던 그 말이 실감 났다. 실타래를 끊는 것은 뾰
족한 깨진 거울이니까.
“앞으론…여기 오지 마.”
“뭐라고?”
“이제 이 정도면 됐어.”
나한테 더는 미련 갖지 말고, 더는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마. 네 인생을 살아. 다신 남에게 네 인생을 맡기지 말고 바보같이 즉흥적인 행동도 하지 마. 이제 우리 갈라지자. 지하철에서 보면 얼굴을 폰에 처박고 횡단보도의 끝과 끝에서 서로의 눈을 피하고 그런 사이가 되자. 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이미 망가져버린 난, 이미 깨져버린 난 네게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내 인생이 후회스럽고 진짜 미칠 것 같아. 그게 내가 두려워한 결말이었어. 그래, 그것 때문에 네가 다가오는게 두려웠어.
유진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가을은 볼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느끼면서 그것이 유진의 눈에 보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왜냐하면 가을은 느낄 수 있었거든. 유진이 울고 있는 것을.
“그니까…그러니까 유진아…”
다신 날 찾아오지 마.
“약속해.”
“가을아…이건……”
“약속하라고!”
유진의 얼굴이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표정이었음에도 가을은 소리쳤다. 못해. 고요히 흐느끼는 소리를 뚫고 유진의 목소리가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하든…난 그렇게는 못해. 유진이 말했다. 가을은 변수에 잠시 주춤했다. 가을은 나머지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넷째. 유진이 자신에게 베푼 것을 넘겨짚어서는 안된다.
가을은 잠시 고개를 떨구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음번에 올 땐 여기서 일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그 다음번에도, 그그 다음번에도. 확연히 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가을은 쉬지 않고 이야기 했다. 마치 지금 그것을 쏟아내야 한다는 미션이라도 받은 것처럼. 유진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중에 넌 여기 오지도 않게 되겠지.”
5년 뒤면 정확히 1826센티미터야. 미터로 환산하면 18.26미터. 그렇게 말하는 가을의 눈에는 여전히 절박함이 보여서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가을에게 달려갔다.
“유진아.”
“응…응, 가을아.”
“더이상 날 위해 네 인생 버리지 마?”
나 살인자야. 무슨 바보가 살인자를 위해서 인생을 버려. 울면서도 완강한 가을의 태도에 유진은 다음의 말을 삼키는 수 밖에 없었다.
친구잖아. 살인자 이전에 친구잖아. 누가 친구를 그렇게 내버려 둬.
하지만 가을은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유진도 느낄 수 있었다. 더는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을. 유진은 이 이상의 죄책감을 요구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의 그것은 욕심이요 이기심이었다. 친구잖아. 살인자 이전에 친구잖아.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말 때문에 유진은 가을을 놓아주어야 했다.
지하철은 강남역에서 멈추었다. 유진은 더운 날씨임에도 팔짱을 끼며 치대는 동기를 밀어내느라 바빴다. 2호선이 역에 들어와 멈추었다. 일상적으로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유진은 하릴없이 내리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익숙한 외곽선에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외곽선은 고개를 들었다.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이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외곽선은 고개를 돌렸다. 유진은 뻗은 손의 행선지를 잃어버린 채로 가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2호선이 출발하는 중에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또렷이 보이는 가을의 날개뼈에 새긴 하트에서는 무자비한 타인이, 그리고 끝내 자기 스스로가 찔러버린 말이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인
간
실
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