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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우유

연준은 샐러리맨이었다. 채소맨이라는 말이 아니고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서 일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라는 뜻이다. 좆같은 회사를 욕하면서 가끔씩 소심한 지각도 몇번 해주는 그런 평범한 사원 말이다.

“하품 너무 크게 하는거 아니야?”
“아 지송요.”

하품 한번 했다고 장 대리가 핀잔을 주었다. 건성으로 대답하니까 한번 쓱 훑어보다가 씩 웃었다. 연준은 뭘 후라보노를 시전하려다가 마음 넓은 내가 참지 하고 말았다. 장 대리의 끈질긴 시선은 사람을 난폭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연준씨 또 소확횡 중이야? 장 대리가 말했다. 무슨 얼어죽을 소확횡이요. 소확횡은 개뿔. 한껏 그를 꼬라보았다. 그러다가 연준은 자기 앞에 수북히 놓인 ppt 자료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장 대리가 웃겨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출력된 자료를 하나 뽑아들었다. 겨우 신입 사원 교육 자료 따위가 무려무려 컬러로 프린트 되어 있었다. 이게 횡령 아니면 뭐냐고. 얼굴이 아주 울상이 된 연준이었다. 담타? 장 대리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며 물었다. 와, 진짜 대리님 꼴초세요? 연준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장 대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커가면서 사회가 변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었나. 근데 많은 것이라고 했지 좋은 걸 많이 배운다는 말은 안 했다. 초딩때 빈부격차에 따른 신분사회를 배운 연준은 중딩때 손절각 친구가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고딩때 우울을 배웠다. 대딩때는 교수라는 존재가 결코 존경의 존재는 아니라는걸 알았고 군대에서는 신입을 말려 죽이겠다는 모토를 가진 상관 덕분에 플랭크 13분을 하고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대망의 회사에서 담배를 배웠다. 저게 다 WI 컴퍼니 영업5팀 장 대리 덕분이다. 담배만큼 횡령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회사에 고작 5분 지각하는건 존나게 쪼아대면서 20분의 업무중 담타는 사내 우정을 위한 굉장히 생산적인 행위로 포장해주니까 말이다. 역시 대한민국은 흡연자의 나라다. 그걸 씁쓸하게도 취업하고서야 알았다. 벌써 두 개비째 피워대는 장 대리를 보며 똑같은 흡연자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난, 니가. 노담이면 좋겠어. 짙은 회색 연기를 휘유우 하고 뱉어낸 장 대리가 최연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굉장히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고 말했다.

“오늘 왜 늦었어?”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연준은 개인용 재떨이에 반쯤 핀 담배를 넣었다. 그리고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최연준의 착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엉망이었다. 헐겁게 묶은 넥타이, 늘 입고 다니는 정장 자켓 대신에 연대 과잠, 짝짝이 컨버스. 그 정도만 나열해도 간죽간살의 최연준을 수치사 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연대 과잠을 본 하 팀장의 얼굴은 볼만 했다. 동국대 출신이랍시고 다른 직원들을 지방대 루저 취급하던 그가 YONSEI 그 여섯 알파벳을 보고, 거기에 뱀이 감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독수리 자수를 보고 얼굴이 얼마나 썩어들어갔던지. 아침부터 WI 컴퍼니 영업5팀 익게에 불이 났다. 하 팀장 꼴받게 하려고 일부러 연대 과잠 구해다가 입은거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진짜 억울한데. 나 이거 정정당당하게 연대 의대 가서 산건데. 통통한 입술을 깨물며 홀로 억울해 했었지. 찍히는건 시간문제였다.

“대리님. 더 충격적인 사실 알려드려요?”
“뭔데.”
“저 양말도 짝짝이로 신었어요.”

장 대리가 캔커피를 뿜었다. 와, 여기 5층인데. 연준이 씨익 웃었다. 장 대리의 입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커피를 머리에 맞게 되신 분 축하드립니다. 로또 사세요. 장 대리가 입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연준을 쳐다보았다. 연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담이었다. 그나마 명도만 다른 회색 양말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연준은 집에 틀어박혀서 무단 결근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다녀?”

장 대리가 물었다.

“설명하자면 긴데요. 그나저나 지금 몇시에요?”
“11시 40분이네.”

와씨발 잠깐만요. 저 11시 50분에 약속 있는데. 누구랑?! 야임마 그거 업무시간에 튀는거야, 튀는거라고!! 장 대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연준은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5분만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는 숨을 고르며 가방에 다발로 들어있는 홍삼젤리를 쭉 뽑아먹었다. 서른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나이가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구 만나러 가냐고요, 대리님? 오늘 제 늦은 통근의 이유에 연루된 분을 만나러 갑니다. 딱 11시 50분이 되자 평범한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카페에 절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왔다. 고속도로처럼 뻗은 기럭지, 새하얀 피부와 까만 생머리의 그 남자. 빈틈없는 정장까지 그는 완벽한 직장인의 표본 같았다. 우와, 진짜 재수없게 생겼다. 연준이 중얼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중저음의 목소리에 연준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서 소리쳤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안 괜찮다고 하면 상처 받으실거에요?”
“어…조금…?”

왜 지각을 했냐, 왜 이 남자를 만나고 있냐. 그건 다 약 12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타칭 용산구 술가이. 핫가이도 아니고 쿨가이도 아닌 딱 한량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그게 12시간 전의 최연준이었다. 엠티에서 소주 5병을 마시고 쏘맥을 존나 큰 맥주잔에 8잔 마셔도 멀쩡한 최연준을 두고 아는 사람들은 모두 전설로 칭했다.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어제 청첩장을 돌린 대리가 있어 다들 거나하게 호강해보자 하며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한우집에 간 것이 그 일의 발단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오늘 한번 다들 뒈져보자. 그리고 술자리의 주인공은 역시 용산구 술가이. 사람들은 연준이 쏘맥을 10잔 내리 마시는 것을 경이롭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우쭐해져서는 평소보다 더 마신 것 같기도 하다. 선 대리가 보드카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양주에 다들 관심이 쏠렸고 연준도 쏘맥과 다를 바가 뭐냐면서 코웃음을 치고 맥주잔에 내리 4잔을 마셨다. 그리고 필름이 딱 끊겼다. 다시 정신이 든건 회식이 다 끝나고 난 뒤 밤 거리에서였다. 드문드문 회사 사람들 말소리가 들렸다. 최 사원님은 어떡할까요? 쟤 용산구 술가이잖아.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어어 나 집 못 가는데. 저 못 걸어요. 저기요 장 대리님! 근데 택시는 그냥 가버렸다. 전봇대를 벗 삼아 내 얼굴에 흐르는 이 짠 액체를…잠깐만, 짠 액체? 최연준은 울고 있었다. 시발롬. 가장 싫어하는 술버릇이 술 처먹고 질질 짜는건데. 술 마셨다 하면 우는 새끼들 극혐이라고 떠벌렸던 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그때 딱봐도 뽄새나는 새끈한 차가 연준 앞에 멈춰섰다.

“타요.”
“네?”
“어디 사세요?”

직장인끼리의 동정심이라며 연준을 태워준 그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냥 새로 뽑은 듯한 차가 기억난다. 왜냐고? 거기에 토해버렸거든. 천하의 최연준이.

“저 근데…속 진짜 안 좋아요……”
“네에.”
“아니 왜이렇게 과속방지턱이 많……”

과속방지턱의 연속과 새로 뽑은 차에서 나는 시트 냄새, 그리고 소화 덜 된 스테이크와 보드카가 뱃속에서 요동을 쳤다. 말 시키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시셨어요?”
“어 그건 말이죠…”

우욱.
최연준과 남자는 에이쁠짜리 미디움 레어 한우 스테이크가 역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차를 세웠다. 끼이익. 연준의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 상황에서 누가 동승객을 신경쓰랴.

“아악!! 삼켜!!”
"ヽ(*´ㅠ``*)노"
“씨발 해맑게 웃지만 말고 삼키라고!!”

차 시트에 묻은 토사물을 보며 남자가 절규했다. - “아직 할부 4개월 남았는데!!” - 어눌한 발음으로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지만 입을 더 열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불곰국의 술이 이렇게 사람을 망쳐놓습니다, 여러분. 그다음은 그 사람한테 오지게 처맞은건지 또 기억이 없다. 전화번호를 찍어줬던 것까지만 이 돌대가리에 남아 있다. 이제 술을 영영 증오할 일만 남았다. 최연준 이 미친놈. 어떻게 친절하게 차를 태워주신 분의 차에 오물을 토할 수가 있냐.

“저기…그때는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잘하는데 그날 경사가 있어서 좀 무리했네요. 세차비는 제가 낼게요.”
“네. 이제 기억나네요. 영업5팀 선하경 대리 결혼한다고 했죠?”
“예?”
“네?”

연준이 니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는 표정으로 되묻자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총무팀 최수빈이요.”

최연준은 입을 딱 벌렸다. 남자가 한숨을 푹 쉬더니 깔끔한 정장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총무팀 최수빈. 연준은 딱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려 ‘그’ 최수빈이다. 총무팀 메기. 좆됐네, 좆됐어. 그것도 아주 극단적으로 뭐됐다. 연준은 간신히 수빈과 자신의 커피값을 지불하고 나왔다. 다리가 미친듯이 후들거렸다. 이성을 놓지 않은게 대견스러웠다.

WI 컴퍼니는 오랜 창업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부서에 딸린 직원들의 나이가 상향평준화 되어 있었다. 특히 제일 심각한건 총무팀이었다. 다른 부서는 물갈이 심해서 젊은 애들이 계속 들어오는 대신에 총무팀이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야 막내가 건배사 해라’ 하는 말에 건장한 40대 아저씨가 일어나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짐작했겠지만 총무팀에는 꼰대가 많았다. 회사 돈이 덜 나갈수록 자기들에게 들어오는 콩고물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문짝 손잡이가 나가리 돼도 결재해주는 법이 없었다. 총무팀 결재를 얻어내면 그날은 로또를 사야 하는 날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직원들의 불만이 천장을 찔러 결국 본사에 다다랐다. 본사에서 보낸 이사들은 소금보다도 짠 총무팀의 인심에 기겁을 하며 젊은 피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정원까지 늘려가며 꾸역꾸역 젊은이들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원래 총무팀 멤버들의 텃세와 꼰대기질은 어딜 가지 않아서 입사하자마자 끽해야 30대 초반인 젊은이들은 꼰대들을 상대로 굉장한 내적 갈등을 벌여야 했다. 아오 저 새끼 죽여? 말어? 확 그냥 퇴사해? 하지마? 퇴사하기엔 카드값이 딸리고 안 하자니 매일이 기절 하고픈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총무팀은 젊은 총무팀과 늙은 총무팀으로 나뉘어 팽팽한 교전을 벌였다. 그러한 젊은 총무팀에게 한줄기의 빛이 들어왔으니, 바로 명예퇴직 공고였다. 신이 정정하다는 증거다. 말이 명예 ‘퇴직’이지, 까놓고 이야기하면 그냥 해고였다. 그렇게 정년까지 아득바득 버티리라 다짐했던 늙은 총무팀은 회사에서 무정하게 내쳐졌다. 마침내 막내 1명을 제외한 모든 늙은 총무팀이 퇴직하고 나자 젊은 총무팀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회사 돈을 펑펑 써댔고 그런 총무팀을 아주 우습게 본 각 부서들은 문에 얼굴을 처박아야 보이는 작은 기스에도 문짝을 교체해 달라고 결재신청을 올리곤 했다. 그딴 것에도 망설임 없이 결재 승인을 해주는 총무팀 덕분에 회사 돈은 직원들의 공공기물로 전락했다. 본사의 인사팀은 이런 젊은 총무팀에 또 엄청난 회의감을 느낀 게 틀림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사이동 공고]
경영3팀 최수빈 -> 총무팀

그가 들어오고야 말았다. 무려 본사에서 내려온 그는 발령받은지 3일만에 혼돈의 카오스나 다름 없는 총무팀을 휘어잡고 냉정한 결재를 이어나갔다. 하루만에 매뉴얼 습득, 칼 같은 반려, 직급과 나이를 들먹이는 인간들 빠꾸없이 돌려보내기. 최수빈을 발령받은 이사팀의 요청도 서류 제대로 작성하라며 칼 차단. 셔츠의 옷주름조차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그의 행동거지를 보며 다들 재수없지만 일은 잘한다며 인정했다. 이 사람은 쉬는 것조차 계획의 일부라는 말도 돌았고. 최수빈이 들어오고 나서 총무팀은 빠른 속도로 실적을 쌓아갔고 회사 돈은 더이상 공공기물로 취급받지 않았다. 그를 두고 WI 컴퍼니 용산지사에서는 미꾸라지 사이 메기라고 했다. 얼굴도 훤칠하지, 키는 말할 것도 없고 일도 잘하니 젊은 여직원들은 최수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최수빈은 그런 사람이었다. 회사 포털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수많은 동명이인 중에서도 제일 위에 있는 사람. 그리고 최연준은 그런 최수빈의 새 차에 토를 한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회의실 문 깨졌던데.”

하 팀장이 말했다. 또 시작이지, 또 시작이야. 연준은 눈알을 한번 굴렸다. 하 팀장은 예전부터 약간 크랙이 있는 회의실 문을 언급하며 밑밥을 깔아왔다. 이제 총무팀에게 결재를 누가 올리냐가 결정이 될 것이다. 다들 일부러 눈을 피하며 하 팀장의 간택을 받지 않으려 했다.

“연준씨 어때? 최수빈이 연준씨가 준 넥타이도 하고 있던데.”

아니 팀장님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연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았다. 차 때문에 미안해서 일부러 미국 감성 넘치는 넥타이 사준건데 그게 그렇게 된다고? 연준과 수빈의 관계는 마이너스면 마이너스지 절대 플러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K-샐러리맨이 어쩌겠냐. 별 생각 없이 결재 서류를 올렸다. 그리고 당연히 최수빈은 반려했다. 응 저새낀 저럴 줄 알았어. 총무팀이 아니라 호구팀이었던 시절의 서류를 참고해서 그런가. 그런데도 짜증나는건 하 팀장이 겁나게 쪼아댔기 때문이었다. 애사심이 없다느니, 연대 과잠 입고 오더니 나한테 앙심 있냐느니…아니 팀장님 뒤끝 개쩔어. 저는 차도 없고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인데요. 짤리기도 싫고 우리 WI 컴퍼니 사랑하는데? 아 물론 당신 빼고. 하 팀장의 잔소리에 못 이겨 검은색으로 덮인 머리에 하얀 무언가가 올라왔을 때 최연준은 드디어 야마돌았다. 결판을 내야지 하고 씩씩거리며 출근했다. 근데 조금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기요!”

연준은 최수빈 책상 앞에 가서 소리쳤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지만 1도 신경 안 썼다. 내가 지금 무려 새치가 생겼는데! 한번 반려 당했다고 이 정도로 갈구는데 계속 반려 할거냐고. 그래. 영업5팀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최연준은 정확히 15번 결재서류를 반려당했다. 부서 동료들에게도 알린 반려는 2번이었지만. 최수빈은 한번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읽어보세요. 하면서 총무팀 원칙을 빼곡히 적은 두꺼운 매뉴얼을 가져다 주었다. 짐 떠밀러 왔다가 짐을 떠안기게 된 연준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꽥 소리를 질렀다.

“이걸 언제 다 읽어요?”
“다 읽으시면 반려되는 상황이 있고 승인나는 상황이 있다는걸 알게 돼요.”
“저 벽돌 가져와서 문 깨부수고 결재서류 신청하는 수가 있어요.”
“그럼 회사 기물 파손이에요.”
“…”
“자리 가시죠?”
“넵.”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내고 간 서류 파일과 ‘반려합니다.’ 메세지가 떠 있는 메신저 창을 보며 연준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아 짱 싫어 진짜……. 그래도 매뉴얼은 나름 착실히 읽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알려준 결재서류 작성 요령이 얼마나 불성실한 건지 깨달았다. 이 세상은요…다 구라삥뽕이야…. 장 대리와 술을 마시며 연준이 말했다.

“그렇게 깽판을 치는데 받아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니가 신기하다.”

엥. 난데 왜 안 받아줘요. 졸라 당당하게 말하는 최연준을 보며 장 대리는 한숨을 쉬었다. 다 내가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키워서 그렇지…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장 대리가 가슴을 퍽퍽 쳤다. 적당한 싸가지와 은근히 잘 지키는 선을 갖춘 연준을 안 예뻐할 선임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아, 근데 이번 연대 과잠으로 이유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재밌는 얘기 해봐. 뭐 없어?”
“음…저 이번에 이사하신 분이 겁~나 수상하시거든요?”

이거 흥미진진하네. 장 대리가 몸을 기울였다. 연준은 지각하던 날을 떠올렸다. 박스와 이삿짐. 누가 싸가지 없게 출근 시간에 이사를 하냐고 욕했었는데. 근데 딱히 욕할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이웃이 문 앞에 우유 한병씩을 찔러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독살시도일까봐 버렸는데 하도 계속 주니까 경찰일 하는 친구 힘을 빌렸다. 그리고 머리를 쌔리는 커다란 손바닥과 함께 “그냥 우유야, 씹새야.” 하는 소리를 얻어먹었다. 그리고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우유는 시중에 파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이거거든. 연준은 27살 인생 동안 한번도 이렇게까지 맛있는 우유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마시기 뭐해서 익명의 누군가가 우유를 넣어두는 곳에 쪽지하고 직접 구운 쿠키 - 근 3년만에 구운 것이다 - 도 몰래 넣어줬다. 다음날 우유병에는 매직으로 ‘쿠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해요’ 라고 적혀 있었다. 이 각박한 21세기 사회에서 익명의 우유전달자는 연준의 남모를 행복 중에 하나였다. 아 나 원래 누구 이사 오시면 얼굴 보고 인사하는데. 이번에 오신 분은 많이 바쁘신가봐요. 터줏대감처럼 이야기하는 연준이었다. 장 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우리 회사는 아닐까? 가깝잖아. 생각보다. 근처 월세가 싸기도 싸고. 연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얼었다.

“우유를 매일 아침에 넣어두는 건 무슨 의미에요?”
“엥?”
“나보다 일찍 출근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나 나갈때 보면 있던데.”

하긴 누가 최연준보다 늦게 출근하겠냐만은. 연준이 술을 마시다 말고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유님 알아야겠어요. 나 빚지고는 못 산단 말이야.”

정 대리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어 그래 화이팅. 니가 소녀도 아니고 왜 그렇게 희망과 꿈으로 대가리에 꽃을 심어놨냐. 뭐 그런 뉘앙스였다. 소주를 한잔 마시려는데 갑자기 이번 신참이 멋모르고 연준의 15번째 반려를 하 팀장에게 꼰지른 것이 번득 생각났다. 처음에는 권위를 짓밟힌 하 팀장의 분노의 화살이 당연히 최수빈에게 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라. 하 팀장은 연준을 일으켜 장장 5분 동안 그 주둥아리를 나불댔다. 괜히 기분을 잡치는 바람에 진로 6잔을 내리 마시고 포장마차를 나서던 중에 연준은 최수빈과 마주쳤다.

“또 보네요.”

연준이 살갑게 말했다. 네. 그가 말했다. 생각보다 딱딱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 근래 먹칠당하기는 했지만 - 용산구 술가이 답게 연준은 수빈이 취했다는걸 알았다. 와 술 안마시게 생겨서는. 연준은 친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어. 친한가 안 친한가. 술 마시면 모두 개가 되는 위 아더 월드. 와 나도 취했나? 연준은 머릿속으로 도록도록 그런 생각들을 굴렸다. 

“넥타이 고마워요.”
“미안해서 사준거에요. 근데 그 넥타이 안 하면 안돼요?”
“왜요? 전 좋은데.”
“우리 팀장님이 제대로 빡돌았거든요. 넥타이 덕분에 내가 수빈씨한테 결재서류 올리고 이지랄 하는 거라고.”
“그니까 계속 반려 당하고 상사한테 깨지는게 넥타이 탓이다?”
“네! 아뇨? 아니, 네!”

내가 진짜 이런 쪼잔한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제발 결재 좀 해줘요. 연준이 무릎 꿇을 태세로 사정했다. 수빈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응 그래 취한 사람 두고 나 뭐하냐. 급 찾아온 현자타임에 연준은 머리를 싸맸다. 수빈은 말했다.

“아직 매뉴얼 다 안 읽어보셨죠?”
“네.”
“다 읽으시면 결재해드릴게요.”

연준이 미심쩍은 행동에 눈썹을 찌푸렸다. 총무팀 메기 최수빈이 저렇게 너그러울 리가 없었다. 수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다 읽으면 어떻게 결재 내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

아 또 그 얘기. 연준은 마침 제 가방 안에 있는 매뉴얼로 그 잘난 얼굴을 후려칠까 하다가 멈췄다. 당신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딴 소리를 지껄이게 한 술이 죽일 놈이죠. 우리 둘 다 금주가 시급하네요. 연준이 중얼거렸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가 묻었나 싶을 정도로 보던 수빈의 시선은 살인충동을 일으키는 장 대리의 시선과는 사뭇 달랐다. 연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담주 목요일에 야유회 있는거 알아요?”
“네. 그날 휴가 쓰고 안 가려고요.”

수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년에 휴가를 한번 내는데 그게 야유회 날이에요. 이 파트에서 연준은 충격을 세번이나 받았다. 1번, 1년에 휴가 한번. 2번, 야유회날에 휴가. 3번, 최수빈 같은 사람이 휴가? 물론 회사 상사들과 게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 빡치기 그지없는 사실이지만 야유회잖아. 회사 사람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날. 평소 게임에 날고 기는 연준에게 이것은 같이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 사람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상사들에게도 더 잘 보일 수 있는 날이었다. 근데 수빈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준은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괜히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최수빈이 고작 야유회 따위에 쩔쩔매다니. 뭐, 엄밀히 말하면 놀려주는 건 아니다. 야유회라는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 연준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수빈씨.”
“네?”
“이번 야유회 저랑 같이 가요.”
“부서끼리 이동할텐데요.”
“어쩔팁.”
“저 낯가려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수빈씨는 저만 믿고 따라와요. 야유회가 재밌다는걸 내가 확실하게 알려줄테니까.”

수빈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손가락 걸어요. 그가 말했다. 연준은 큰 손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딴거 17년 전 이후로 해본 적이 없는데. 최수빈도 정말 취하긴 했구나 싶었다. 취한 최수빈보다 더 기막힌건 도장까지 찍으라며 놔주지 않는 수빈 때문에 기어이 엄지손가락 도장까지 찍어버린 연준이었다. 역시 술 앞에서는 위 아더 월드. 연준은 기가막힌 이해심과 인류애를 발휘해 택시에 수빈을 태웠다. 그리고 제 집으로 향했다. 수빈은 현관 신발장 앞에 머리를 박고 드러누웠다. 연준은 옷장을 뒤집어 엎다시피하며 수빈에게 맞는 옷을 찾아냈다.

“옷은 갈아입을 줄 알죠?”
“네에.”

저 봐봐. 발음 늘어진거 봐. 연준은 결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겠다 생각했다. ‘그’ 최수빈이 술에 꼴아서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연준은 수빈에게 옷을 건네주고 저는 맥주와 안주거리를 꺼냈다. 안주는 지난번에 우유 이웃에게 주고서 베이킹에 취미가 들려 몇개 재미 삼아 구운 쿠키였다. 가방 안에서 매뉴얼을 꺼낸 뒤 연준은 찬찬히 정독해나갔다. 수빈은 소파에 기댄 연준의 옆에 앉았다.

“약속했어요, 야유회 재밌게 해준다고.”
“내가 누굽니까. WI 컴퍼니 영업5팀 만능 딴따라 최연준 아니에요.”
“들어본 적 없는데.”

쿠키 먹어도 돼요? 수빈이 물었다.




‘먼저 출근합니다. 고마워요.’ 라는 쪽지가 이마빡에 붙여져 있었다. 연준은 포스트잇을 붙인 채로 출근했다. 포스트잇의 효과는 대단했다. 멘트 때문인지 일상적인 새치기도 죽일듯한 시선을 받았다. 연준은 오늘도 문고리에 걸려 있던 우유를 신경질적으로 들이켰다. 어제 ‘요즘 날이 덥죠? 건강 챙기세요’ 하면서 홍삼젤리를 넣어놨더니 오늘 우유는 얼음주머니와 함께 있었다. 탕 소리를 내며 내려놓은 연준은 일어나서 정확히 16번째 작성한 서류를 들고 총무팀으로 갔다. 밤을 새다시피 읽은 매뉴얼은 회사가 연차의 힘을 얼마나 기대하는지 알려주었다. 이것보다 더 잘 쓴 서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연준은 서류를 수빈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어?”

무료한 표정으로 홍삼젤리를 뽑아먹던 수빈의 오른쪽에 익숙한 쪽지가 보였다.
‘요즘 날이 덥죠? 건강 챙기세요’
토씨 하나 다 똑같았다. 연준은 당황스러움에 올려둔 서류를 다시 집어서 들고 왔다. 연준씨, 어디 가세요? 하는 수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쟤 왜 돌아와? 장 대리가 말했다. 연준은 말없이 키보드를 잡고 근 3년간 잊고 살았던 수학적 지식을 다시 꺼냈다. 자, 계산해보자. 최수빈이 다른 사람에게 저 쪽지를 받았을 확률, 홍삼젤리를 다른 사람에게 받았을 확률, 자기가 사먹었을 확률…. 제기랄. 세기말 락 밴드의 드러머처럼 키보드를 두들겨대던 연준이 기어이 키보드를 패대기쳤다. 강냉이처럼 키보드 자판이 우수수 떨어저서 사무실 바닥을 날아다녔다. 영업5팀 직원들의 얼굴이 파도타기라도 하는듯 그라디에이션 놀람을 나타냈다.

“연준씨…내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

장 대리가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연준이 한껏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담배 피실 분?”




연준은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다. 회사 재산인 키보드를 작살내가면서 계산한 결과 최수빈의 쪽지와 홍삼이 연준의 것일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설마 그 정도의 확률을 뚫고 저 홍삼젤리가 연준의 것일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것을 생각하며 스물일곱살 답지 않은 고민들을 느낄 시간은 안타까울 정도로 적었다. 메신저창을 보고 연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메일로 보낸 16번째 서류 파일이 반려 처리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늘상 보내던 ‘반려합니다.’ 라는 짧은 메세지가 아니라

회사 규정상 그 정도 흠집은 최소 15년 이상 사용해야 합니다.
이제 3년 쓴 문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회사 규정 잘 알고 서류 보내셔야죠.
반려합니다.

그냥 반려하면 되지 왜 그렇게 사족이 많아. 우리가 문을 언제 바꿨는지도 알고, 쓸데없이 정성만 많네. 눈물나겠다. 연준은 총무팀 사무실을 향해 일어서서 뻐큐를 날렸다. 하지만 일어서면 안됐다. 마침 그 자리를 어슬렁거리던 하 팀장이 메신저창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하 팀장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연준을 향해 그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고서는 한 음절씩 딱딱 눌러 이야기했다.

“난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아.”

 알아요, 누가 반려 집착광공을 좋아하겠습니까.

“게다가 내 이름을 걸고 쓴 서류가 이렇게까지 반려되는건 내가 참을 수 없어.”

아니 거기 말은 똑바로 합시다. 제 이름으로 쓰고 정확히 16번 반려됐거든요.

“다음주 내로 결재 받아와.”

아 제발. 오늘 불금이라고요. 차마 대답할 깡이 없어 연준은 머릿속으로 왈왈 짖어댔다. 결국에 더러운 일은 사원이 하라는 건지 만년 과장 하 팀장은 끝까지 제가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게 뭐냐고. 난 뭐 이러고 싶겠냐고.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사나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 대리는 완전히 풀이 죽은 연준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일에 집중을 못하더니 아예 테라스로 나간다. 이제 막 인턴 딱지를 뗀 사원에게 이건 과한 시련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괄괄하고 좋게 말하자면 정의감 넘치는 장 대리는 캔커피 두 캔을 사다가 연준의 옆에 앉았다. 자. 마셔라. 답지 않게 목소리도 깔았다. 그렇게 환장하는 아메리카노인데 연준은 입도 대지 않았다. 와, 진짜 심각한데. 장 대리가 중얼거렸다.

“아 마셔라, 쫌.”

일부러 너 생각해서 사왔는데. 안 먹으면 나 서운해. 그제서야 연준이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공허한 표정이 수채화처럼 번져있었다. 장 대리는 연준의 어깨를 두드려줄까 하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할까. 장 대리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 팀장 징계 먹도록 해줄까?”
“됐어요, 사원 쪼가리가 무슨.”
“야 그거 셀프 패드립이야. 어? 부모님이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겠어.”
“그 애지중지 키운 자식 여기서 죽네요.”

와. 연준씨. 열라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말이 없다. 장 대리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됐고, 뭐라도 좋으니까 위로 좀 해줘요. 나 이대로라면 진짜 밤에 벽돌 들고 회사 올지도 몰라. 연준이 말했다. 어… 장대리는 눈에 띄게 우물쭈물했다. 연준이 위로해주는 역할이었고 자신은 그런 위로를 받으며 신명나게 웃어대는 역할이었는데 막상 제 차례가 되니 뭐 어떻게 해야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최수빈이 죽일 놈이지!!”

맞은편에 선 건물에까지 들리조록 소리를 지른 장 대리가 거의 랩하듯이 빠르게 말하며 횡설수설 했다. 그 자식이 우리 영업5팀 엔터테이너 연준이 괴롭히고 그쯤되면 유도리있게 승인 좀 해주지…너 내 말 듣고 있어? 제 어깨너머를 보며 얼굴이 하얘지는 연준을 보며 장 대리가 물었다. 대리님…뒤 봐요…

“악 씨발!”

뒤에는 최수빈이 있었다. 캔커피 두잔을 들고서. 연준은 직감적으로 좆됐음을 느꼈다. 응씨발 클리셰도 정도가 있지. 연준이 벌떡 일어났다. 최수빈은 잠시 서 있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안으로 걸어갔다. 캔커피를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다. 연준은 본능적으로 일어서서 수빈에게 다가갔다. 혈관에 흐르는 피에는 물불 가리지 않는 정의감이 있었으므로.

“어…미안해요.”
“굳이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연준은 또 삔또가 상했다. 그렇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돼? 애초에 반려만 안 했으면 됐잖아. 하 팀장과 최수빈 사이에 끼어서 가장 피해를 보는건 저 자신인 것 같았다. 연준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재수없게 컸다.

“결재 내면 좀 들어줘요. 열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던데 사람이 왜 열여섯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
“나무가 아니니까요.”
“아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아까 그 재수없는 반려는 또 뭐에요?”
“안 친한 상대한테는 그냥 반려한다고만 보내니까요. 친해졌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정성들여 보낸거죠.”
“개뿔. 친해지는데는 승인이 직빵이거든요?”
“경영팀 출신한테 뭘 바라는건지 모르겠네.”
“야!”

복도가 떠나가라 빽 소리를 지른 연준은 수빈의 미간을 겨냥해 검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어린 친구가 따박따박 말대꾸하지 말고 들으세요.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눠 살지 말고. 친구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안 친한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 친한 사람. 그리고 나는 2단계. 요구 사항 있으면 유도리 있게 적당히 들어줘야 하는 단계. 알았어요?”

래퍼처럼 빠르게 쏘아붙인 연준이었다. 연준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빈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이제 1단계네요.”

그가 말했다. 어라. 연준은 머리가 멍해졌다. 수빈은 먼저 걸어갔다. 이번엔 따라가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청춘의 마음이여. 연준은 지금 내핵을 뚫고 지구 대척점의 우루과이까지 간 자신의 자존감을 붙잡아야 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이없게도 최수빈이 야유회는 오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딴거 신경 써서 뭐해. 일부러 눈을 벅벅 닦았다. 사원증도 벗어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취준생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은데 입사 하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도 문지르는 바람에 눈가가 빨개졌다.




연준은 터덜터덜 걸었다. 어차피 지하철로 몇 정거장 밖에 안되는데 지하철 탑승비도 줄일겸. 게다가 계속까지 이어지는 꿀꿀한 기분 때문에 사람 빽빽한 지하철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이라는 생명체와 닿는다면 그대로 지구 멸망의 근원이 될 자신이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네온 사인과 술집 간판이 연준을 유혹했지만 지금 술 마시면 내가 개다. 하는 생각 때문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다. 새로 아파트를 짓는답시고 낡은 상가가 있는 자리에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폐기’라고 적힌 곳에 멀쩡한 벽돌 하나가 보였다. 짱돌을 쥐듯이 벽돌을 집어든 연준은 몸을 돌려서 회사로 돌아갔다. 영업5팀은 모두 퇴근했는지 아무도 없었다. 크랙이 난 회의실 문에 벽돌을 대었다. 양심이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연준은 벽돌로 자기 머리를 한번 쥐어박고 싶었다. 아무리 사람이 기분이 나빠도 진짜 벽돌로 회의실 문 깨는건 아니지. 그렇게 다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왜 또 돌아왔어요.”

연준은 회사가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벽돌을 떨어뜨렸다. 퍽. 쨍그랑. 그리고 얼음. 어 왜 불길한 느낌이 들죠. 연준은 등줄기에 쭉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하하. 하하하하하. 왕방울만하게 커진 수빈의 눈을 보며 연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좆됐어 씨이발….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불효자는 이만 쇠고랑 차러 갑니다.

“나와요.”
“…엉?”
“유리 깨졌잖아요.”

수빈이 WI컴퍼니의 유리 공급사에 전화를 걸었다. 연준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벌금은 얼마나 나올까 설마 1억? 에이 유리가 비싸면 뭐 얼마나 비싸다고. 전화를 마친 수빈이 연준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인 안 해주면 벽돌 가져오겠다더니 진심이었네.”

연준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수빈이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나 인생 쫑나게 생겼는데.”

수빈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아닌데. 수빈이 천장을 가리켰다. 연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회의실이라 cctv가 없구나!




야유회는 늘 그랬듯 각자 도착한 뒤 부서마다 모이기로 한 곳에 집합했다. 이번에 정확히 25기 직원모집을 한 기념으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호화로운 숙소가 야유회 장소로 채택되었다. 회계팀 머리 꽤나 굴렸겠는데. 장 대리가 말했다. 30도를 간당간당하게 넘어가지 않고 있는 온도인데 바로 게임이라는 말에 다들 분통을 터트렸다. 가까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산 뒤 연준과 장 대리는 빠르게 자기 부서 쪽으로 걸어갔다. 수빈이 연준의 자유로운 왼팔을 잡기 전까지 연준은 콧노래마저 부르고 있었다.

“악 씨발!”

손을 덥석 잡는 또 다른 손이 느껴지자 연준은 파드득 몸부림치면서 아메리카노를 떨어뜨렸다. 최수빈이었다. 연준이 한껏 그를 째려보았다. 장 대리도 입을 헤벌린 채로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연준씨, 나 좀 꼬집어봐. 장 대리가 말했다. 내가 지금 더위를 먹은 것 같아서 그래. 수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오늘 재미있게 해준다면서요.”

어 맞아 그랬지. 근데 니가 진짜로 올 줄은. 그것보다 진짜 와도 되는거야?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저와 수빈을 번갈아 쳐다보는 장 대리를 보며 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부터 연준은 수빈을 직접 에스코트했다. 며칠 전에는 1단계라면서 저를 두고 싸늘하게 가버렸으면서 제 말만 믿고 진짜 와버린 수빈을 내치자니 정말 개쓰레기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 팀장 따위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지금 도덕성이 뒤지게 생겼는데. 연준은 터덜터덜 걸었다. 수빈과 있으면 확실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들 경악하면서도 이제 수빈도 섞여 살 때가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정말 돈을 깨나 쓴건지 게임 상품부터가 어마어마했다. 달리기에서 무려 문상 10만원권. 누가 문상의 시대가 저물었느냐 묻는다면 고갤 들어 최연준과 최수빈을 보라 하자. 올리브영에 가야겠다는 절박함에 연준은 날뛰었다. 최연준 미친개 모드가 발동된 것을 진작에 알아차린 장 대리는 일찌감치 탈락하여 피를 면했다. 일방적인 혈투 끝에 문상 5만원권 두장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수빈의 옆에 앉은 연준은 문상 한장을 수빈에게 건넸다.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수빈에 연준은 눈을 찡긋하며 돈이 있어야 재미있는 것 아니겠냐는 막스 베버도 울고 갈 자본주의적 발언을 했다.
그 뒤 MZ세대 사원들을 공략하며 준비했다는 랜덤플레이 댄스는 단연 하이라이트였다. 자타칭 케이합학 박사인 해외영업3팀 부 차장은 대번에 마이크를 잡고 참여를 유도했다. 연준은 제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수빈을 바라보았다. 나가요. 수빈이 입을 벙긋거리며 말했다. 나 케이팝 진짜 모르는데. 연준이 울상을 지었다. 수빈이 연준의 고개를 돌려 상품으로 올라온 다이슨 청소기를 보여주었다. 내가 뭐 어떻게 하면 돼요. 연준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수빈은 연준의 손을 꽉 잡았다. 케이팝은 두 갈래에요. 웨이브, 그리고 힘조절. 저 하는거 곁눈질로 봐요. 무려 최수빈이 케이팝이라는 장르와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된 놀라움도 잠시 연준은 무대랍시고 만들어둔 큰 직사각형 안에 들어갔다. 최수빈 버프 덕분인지 연준은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아기다리고 기다리던 다이슨 청소기가 연준의 품에 들어왔다. 됐어요, 됐어! 연준이 펄쩍 뛰면서 수빈에게 달려갔다. 최연준이 그렇게 춤을 잘 추는지 몰랐다던 사람들은 헹가래를 쳤다. 우와 토할것 같아. 천생 E인 연준에게도 이번 야유회는 조금 기가 빨렸다.

“미안해요, 재밌게 해준답시고 나만 놀았네.”

연준이 말했다. 야유회가 끝난 뒤 수빈의 목에는 연준이 걸어준 하와이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시식코너에서 따준 음료수가 쥐여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나 푹 패인 보조개는 아마 매미가 우는 초여름밤에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참, 우리 부서 직원들 나눠준다고 가져온거 좀 남았거든요.”

연준이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과자 상자를 꺼냈다. 좀 먹을래요? 수빈은 큼지막한 손으로 남은 쿠키에서 3분의 1을 꺼내갔다. 그래놓고서 하나씩 깨작거리며 먹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수빈이 중얼거렸다. 응 그쵸. 연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잠만, 제 쿠키 먹은 적 있어요?”

연준이 물었다. 어…그러게요. 수빈이 어색하게 답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수빈이 말했다. 야유회 와서 재밌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가 웃었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가는 것이 가로등에 어렴풋이 보였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수빈이 가까이에 주차해둔 차에 탔다.

“같이 퇴근하실래요?”

우물쭈물 하다가 연준은 그냥 저질러버렸다. 이번에 술은 안 드셨죠? 수빈이 보조개가 나오도록 웃으며 말했다. 어라, 이 인간 봐라. 연준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수빈이 핸들을 돌려 출발했다. 집이 어디냐는 말이 나오지 않아 이상했지만 수빈이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고 연준은 곯아떨어졌다. 팔에는 다이슨 청소기가 끼여 있었다. 눈을 떴을때는 집에 도착한 이후였다. 연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가 1층으로 올라왔다. 어라. 근데 수빈씨가 왜 우리집 엘베에 있어요? 연준은 눈을 벅벅 닦았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연준보다는 충격이 덜했다. 지난번에 데려다 준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결코 우연은 아니다 싶었다. 반면에 연준은 대놓고 어색해하고 놀란 티를 냈다. 그나저나 왜 19층이 눌러져 있지? 연준은 불쑥 찾아오는 느낌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대로 못 누른걸 수도 있지. 제대로 누른거 맞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당황스러움 때문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연준은 굉장히 뻣뻣이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렸으면 수빈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았을테지만 수빈을 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여기 살아요? 난 왜 몰랐지?”
“그럴 수도 있죠.”
“저 누가 저희 집 층에 이사 오면 꼭 얼굴 보고 인사한단 말이에요. 내가 몰랐을 리가.”

띵- 엘리베이터가 19층에 멈췄다. 두 사람은 슬로우모션이라도 걸린 듯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빈씨가 여길…? 연준씨가 여기에…? 샤랄랄라라~ 하는 브금이 들리는 것 같았다. 둘은 매우 경직된 채로 제 집 앞까지 걸어가 비번을 눌렀다. 연준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어떻게 1901부터 1908까지의 호수 중에서 1903과 1904일 수가. 집이 옆집일 수가. 아. 이거 되게 일본 만화스러운거 아닌가. 맨날 나를 반려시키던 직장 동료가 내 옆집?!




주말이다. 직장인에게 있어서 당나귀 머리에 붙인 당근. 절대 가질 수 없지만 일단 보고 달려라. 그게 지금 연준에게 주어졌다. 이미 직장인의 몸으로 바뀐지 오래인터라 6시에 일어나 밖에서 느긋하게 모닝 커피 한잔을 했다. 토요일 아침에 스벅 가려고 돈 벌지, 내가. 비싼 커피는 다발로 비치되어있는 탕비실 커피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래서 다들 스벅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초콜릿칩에 휘핑을 올린 프라푸치노를 테이크 아웃 한 뒤 연준은 집으로 돌아왔다. 딱 7시. 옆집 문이 벌컥 열렸다. 연준은 입을 딱 벌렸다. 최수빈이 무려 츄리닝이다. 세팅되지 않은 머리, 펑퍼짐한 츄리닝 바지, 잠이 덜 깬 눈. 이 삼박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다. 시이발? 내가 헛것을 보나? 연준은 눈깔을 꺼내 닦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라푸치노를 떨어뜨릴 뻔 했다. 뜻밖의 전개에 당황한 수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안녕하세요. 수빈이 말했다. 연준은 어버버하다가 냅다 프라푸치노를 건네주었다. 불쑥 들이밀어진 프라푸치노에 수빈은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이런 모습 처음이죠…?”
“뭐…수빈씨 같지는 않지만 인간미 있고 좋은데요, 뭘.”

넥타이 없으니까 훨씬 낫네요. 연준이 말했다. 수빈의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밤 샜어요.”

연준이 말했다.

“왜요?”
“옆에 회사 동료가 살고 있다는거 적응하려고요.”

수빈이 픽 웃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프라푸치노를 쪽쪽 빨아먹었다. 여름이니까 해도 일찍 떴다. 쏟아지는 햇살에 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매미 소리가 들렸다. 아 ptsd 올 것 같아. 연준이 중얼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호루루루루룩. 놀랍게도 그새 프라푸치노를 다 빨아들인 수빈의 빨대가 내는 소리였다.

“다음부터는요, 그렇게 뻘쭘하게 서 있지 말고 안녕! 이웃사촌! 이라도 해줘요.”
“그거 진짜 구시대적인 말투다.”
“어쩔요. 저 옛날 사람임.”

수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연준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키자 어제 자기 전에 써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맑은고딕 16pt. 굵은 글씨, 세 글자.
시말서
가 눈에 들어왔다. 연준은 심호흡을 하고 사건 경위를 적어내려갔다. 홀가분했다.




퉁-하고 우유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준은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이럴때를 대비해서 도어락도 다 해체해 놓았다. 그래, 이래봬도 자타칭 ‘공부의 신’ 연세 의대 출신이다. 아무런 걸림돌 없이 문을 연 연준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악! 하고 누군가가 부딪히는 소리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우유님!!!”

어라. 연준은 코를 싸쥐고 주저앉아 있는 수빈을 발견했다. 아아 진짜 아파요. 수빈이 찡찡거렸다. 연준은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들어와요, 냉찜질이라도 하자.”

자, 이정도로 인생이란 것이 힌트를 줬는데 최연준이 ‘우유님’을 추론하지 못할 정도로 빡대가리는 아니다. 연대 자존심이 있지. 연준은 아이스팩을 꺼내 수빈의 코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현관에 우유통에 넣어진 우유를 꺼내 시원하게 원샷을 때렸다. 아 누구 우유인지 왜이렇게 맛이 좋은가 몰라. 연준은 콧노래를 불렀다. 수빈은 현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각종 드라이버와 너트, 건전지를 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저거 어떡하려고요? 어떡하긴요, 기사님 불러야지.

“지금 몇단계에요?”

연준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수빈은 눈알을 굴리더니 말했다.

“3단계요.”




연준은 샐러리맨이었다. 채소맨이라는 말이 아니고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서 일하는 자본주의의 노예라는 뜻이다. 좆같은 회사를 욕하면서 가끔씩 소심한 지각도 몇번 해주는 그런 평범한 사원 말이다.
그리고 연준의 옆집은 최수빈이다. 총무팀 메기. 그리고 우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