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의 김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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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저녁 거리.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붉은 빛 아래를 걸었다. 차분한 노을이 끝나고, 도시의 불빛이 점점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손에 쥔 휴대폰엔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recorded_11pm' 계정으로 온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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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열어요? DJ님 라방."

나는 작게 웃었다. 몇 달 전부터 매주 수요일 밤 11시에 열리는 인스타 라디오는, 입소문을 타고 어느새 아는 사람은 아는 방송이 되었다.

익숙한 아이디들이 댓글창을 채웠고, 고정 리스너 몇은 DM으로 사연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닉네임부터 귀여운 ‘bearwith_u’.

말투도 차분하고, 보내오는 사연은 늘 짧았지만, 유독 마음에 남는 댓글들이 많았다.

나는 조용히 방 안 불을 끄고, 책상 위 조명만 켠 채 자리 잡았다.

커튼을 치고 의자에 기대어 앉자, 주변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고요해졌다. 창문 너머로는 미세한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작은 노트북을 열고 마이크를 연결한 후, 익숙한 화면을 띄웠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사운드 체크를 마친 다음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인스타 라방은 매번 이곳에서, 내 방 한켠에서 시작되었다.

마이크 버튼을 켜는 순간, 댓글창엔 익숙한 이모티콘 하나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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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11시 정각에 오신 곰돌이님.”

나는 작게 웃으며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제목은 ‘그 사람의 시간은 자꾸 늦어진다’예요."

짧은 시 하나를 읽으며 감정을 담았다. 청춘의 무게, 타인의 침묵, 혼자 있는 마음 같은 것들.

댓글창은 오늘도 익숙한 이모티콘과 짧은 공감 멘트들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끄는 건 여전히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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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이 편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와요. DJ님 목소리를 들으면, 그냥…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간 것 같아서요."

‘무사히 지나간 것 같아서요.’ 그 문장이 유독 여운을 남겼다. 듣고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음 날, 나는 조별 과제 때문에 강의실 옆 소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한 명이 와 있었다. 후드 모자 너머로 보이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 앉아 있던 남자가 살짝 놀란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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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아, 안녕하세요. 김운학이에요. 저희 조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낯선 이름,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말투였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말끝은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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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오늘 날씨 좋죠? 아까 잔디밭에 진짜 햇살 예뻤어요. 혼자 누워 있다가 벌레 때문에 도망쳤지만요.”

그의 말에 나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운학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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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아, 너무 TMI였나. 저 원래 말이 많진 않은데, 조용한 분위기 싫어서 말 걸었어요.”

그는 처음엔 낯을 가리는 듯했지만, 말투에 묻은 장난기는 금세 드러났다.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의외로 편안한 웃음을 자주 안겨주었다.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작게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말투나 단어 선택이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었다.

문득 bearwith_u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운학은 남은 간식을 내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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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학

“이거 다 남겼네요. 누나가 가져가요. 안 먹으면 제가 세 개 다 먹을 것 같아서.”

장난기 섞인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상하게 편안했다. 처음 만났는데도,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인스타에 라디오 공지를 올리지 않았다. 대신 DM 창을 열었다.

bearwith_u는 어김없이 또 한 줄을 남겼다. 매번 그러하듯, 짧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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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 하시나요? 그럼… 다음 주까지 잘 버틸게요. DJ님 목소리를 들으면, 그냥… 제가 여기 있다는 게 잊히지 않는 느낌이에요."

‘제가 여기 있다는 게 잊히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 말이 귓가에 오래 머물렀다.

그냥,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