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별 유치원 [라벤더반] 크미
7월 19일 숙제. 한 여름 밤의 꿈


Prolog. [프롤로그]

당신의 기억을 재생하시겠습니까..?

예.

로딩중...

로딩 중..................

로딩..................................................시작!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기억하는 어느 순간 이 세계에 나는 갖혀 있었고,

정해진 일과가 끝나면 다시 이 시간부터 시작된다.

시작은 언제나 한 여름 해질 무렵의 공원


호숫가의 벤치 위..


석진
휴.. 또 돌아왔네....

여기는 끝없는 루프물의 한가운데 그 어딘가..

나의 삶은 저기 호수 건너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은데...

도저히 이 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난 시간동안 나는 이 곳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 지 똑같이 돌아가는 시간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지냈다.

뭔가 미션을 해결해야만 이 꿈결 같은 곳을 떠날 수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미션이 뭘까....?

처음 이 곳에 와서 상황 파악이 된 후엔,

일탈을 시도해 보았다.

공원을 벗어나서,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가서 쇼핑도 해 보고,


내가 다녔던 회사가 어디쯤인지 무수히 많은 빌딩 숲을 헤매보기도 했다.


석진
거의 올 시간이 다 되었네...

곧 찾아올 누군가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 그녀를 만나지 않으면 나의 시간은 바로 리셋되어 버린다. 마치 그녀를 꼭 만나야만 하는 듯...

그래서 요즘은 그녀가 올 시간까지 그냥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편이다.

일단 그녀를 만나며,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말하면서 그녀를 관찰한다.

그녀에게 내가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석진
어.. 여주야...


여주
오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

언제나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와서는

내 옆에 앉아서 한참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다 일어나서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다.


석진
여주야,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여주
오빤 그걸 말이라고 해??!

한참 울던 그녀가 날 또 떠나려고 했다.

아, 이러면 다시 리셋되는데....

더 이상은 싫어.


석진
여주야, 잠깐만..!

나는 여주의 손목을 잡았다.


여주
오, 오빠...

여주의 두 눈이 갑자기 커졌다.


석진
가지마...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될까.?


석진
내가 면목은 없지만.. 그래도 너랑 더 있고 싶어.

여주가 당황한 듯 멈춰선다.

여주는 여기까지만 프로그래밍 된 건가..?

왜 안 움직이지...?

여주가 당황한 듯 움직이지 않자 나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석진
여주야.. 너와 내가 지금 마지막인 거 알아...


석진
그러니까, 우리 시간을 조금만 더 보내면 안될까...

여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올라왔다.


여주
알았어... 오빠... 오늘은 바로 가지 않을께...

방금, "오늘은..?" 이라고 했어?

여주도 루프물에 빠진 또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여주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주는 이래적으로 밤늦은 시간까지 남아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시시콜콜한 학교 이야기, 동기들 이야기.. 이제 졸업하면 어떻게 지낼지 등등...

나는 아직 나와 여주와의 관계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연관되는지 확신이 없어서 여주의 이야기에 이성적으로 다가가려고 애썼다.


이따금씩 나를 보며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엉엉 울다가 떠나는 모습과 너무 달라서 굉장히 색다르고 애틋했다.

여주는 비록 울기만 했어도 이 곳에서의 반복되는 시간이 좋았다고 했다.


여주
그래도...오빠를 다시 볼 수 있잖아..


여주
오빤... 나 아직도 사랑해...?

아.. 당황스러웠다. 나와 여주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내가... 널..?


여주
오빠.. 기억 못 해도 괜찮아... 우리의 마지막은.. 미웠으니까.... 미운 기억은 더이상 간직하지 말자...

여주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욱씬...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잘 기억나지 않는 내 기억이 작동한 건가...?


석진
여주야...

나의 먹먹한 표정을 들여다보던 여주가 이만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석진
'그래... 금방 다시 봐...'

여주가 어느새 밤이 된 공원을 떠나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다시 한여름 해질 무렵의 공원이었다.


여주
오빠...

오늘은 평상시와는 여주가 조금 달라보였다.


석진
여주야,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여주
괜찮아... 괜찮아...

그렁그렁해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망울은 그대로지만, 여주의 태도는 다르다.


석진
우리.. 오늘도 밤 늦게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질까...?

여주는 나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석진
'나는 우리 시간이 이 기억 속에 갖혀있다고 해도 괜찮아...'


석진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여주와의 두 번째 여름 밤...

루프의 길이가 여주와 함께 있다면 늘어난다는 것이 이제 확실하다.


석진
여주야.. 시간이 많이 늦었어..


여주
아.. 어.... 그렇네.... 이번엔.. 여기서 헤어져야겠지...?

"이번엔.. 여기서 헤어진다"라....

역시 여주가 열쇠였던 거야..

나는 조금 더 확신이 생겼다.

우리의 여름 날의 밤이 반복되고 길어질수록, 표정이 밝아지는 여주가 나는 애틋했다.

내가 도대체 너에게 어떤 상처를 줬던 걸까...?

이렇게 마음이 여린 널 내가 왜 차갑게 대한 거지..?


여주
이젠 오빠가 반갑고 좋아...


여주
오빠를 봐도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아...


여주
오빠도 이제 나에게 미안해 하지마.. 우리가 미운 모습으로 헤어졌어도 난 이제 괜찮은 것 같아...


여주
지금 이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


석진
... 그래 여주야.. 나도 그래...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아..

여주도 나도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져갔다.

우리는 몇 번의 루프 동안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여름의 따가운 햇빛이 노을로 사라지면 시원한 밤 공기가 낮의 열기를 싹 거둬간다.

시원한 밤 향기 속에 매미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일은 특별하고도 평화로웠다.

매일 같은 행인들, 같은 위치에 매달린 매미들, 같은 풍경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우리들만의 각기 다른 추억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반복되는 시간들 가운데 느껴지던 불안함과 두려움들이 사라져간다.

무엇보다도 눈물 가득했던 여주가 점점 밝아지는 모습은 나에겐 큰 보람이자,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어떤 것이었다.


석진
...

옆에 앉아있는 여주를 보며 나는 이제 루프 속이 아닌 현실에서 여주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긴다.


석진
'이젠 현실로 돌아간다 해도.. 너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루프물을 벗어나게 된다면... 현실 속에서 여주를 다시 찾아가 고백할 것이다.

미운 우리의 기억은 잊고 앞으로 이쁜 기억만 쌓자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여주도 나도 더이상 이 루프 안에서 지내면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여주
...

여주가 떠나면 생각할 시간이 없어서.. 앞에서 갸우뚱 말없이 나를 들여다보는 여주를 두고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이 루프는 여주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 여주가 올 무렵 시작되고, 떠나면 돌아가니까..

둘째, 나에게는 이 루프를 끝낼 힘이 없다.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적이 없어.

셋째, 여주도 나도 이 곳에서 정해진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지나가는 행인이나 다른 것들은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즉, 루프의 굴레 속에 진짜 사람은 여주와 나 뿐이다.

그렇다면... 여주가 날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 루프가 비로소 끝나는 게 아닐까...?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여주에게 말했다.


석진
여주야, 시간이 늦었네... 잠시 뒤에 노을지는 공원에서 다시보자...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갔다.

언제나와 같은 한 여름의 해질녁 공원..


석진
어.. 여주야...


여주
오빠... 오늘도 같이 밤까지 산책할까... ?

여주의 달라진 밝은 모습... 우리가 이 반복되는 지겨운 하루 속, 우리만의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여주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석진
그래.. 언제나와 같은 오늘처럼..

나는 여주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현실에서 널 어떻게 찾을 지 걱정되긴 하지만... 더이상 여기에 계속 갖혀 있을 수는 없잖아...

너의 웃는 모습에서 울던 모습까지 모두 기억할테니까... 꼭 내가 찾아갈께...

내가 정해놓은 마지막 밤...

이 여름날의 공기도 한동안 널 찾기 전까진 많이 그리울 것 같아.

여주는 오늘 따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제는 나로 인해 아팠던 과거 이야기도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주가 나는 정말 좋다.

내가 생각한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석진
여주야... 그거 알아..?


석진
오늘 너 정말 밝고 이뻐보여...


여주
정말...?


석진
비록 항상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지만, 점점 밝아지고 더이상 슬프지 않은 니 모습이 나는 정말 좋아...


석진
그 사랑스러운 모습.. 꿈결 같은 이 곳이 아닌... 현실에서 보고 싶어.


석진
그러니까... 우리, 이제 현실로 돌아가자...

여주의 얼굴이 일순간 차갑게 굳었다.


여주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석진
이제는 너도 나도..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생각해..


여주
오빠... 난.. 여기서 오빠를 만나는 것도 좋아...

여주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게 보였지만...

나도 결심이 무너지기 전에 말을 마쳐야할 것 같아서, 준비한 말들을 해야만 했다.


석진
그만큼 난 니가 너무 좋아..과거에 너에게 밉고 차가운 말들로 상처준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석진
우리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만나자... 거기서 이제 진짜 사랑하며 지내자..


석진
오랫동안 여기에 갖혀있으면서 그동안 너에게 상처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해줄 수 있었고... 다시 널 좋아해 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석진
다시 밝아지는 네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아..?

내가 말하는데 여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고 나는 그 눈물을 얼른 손으로 닦아주었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어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툭... 눈물이 떨어지자, 여주도 얼른 닦아주었다.


여주
결국...나한테.. 현실로 돌아가라는 거... 맞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
오빠.. 진심이야...?


석진
이제 나에게 너무 소중한 너니까... 더이상.. 널 이 곳에 가둬놔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석진
내가 어떻게든 널 찾을께.. 그러니까 더이상 이 곳으로는 날 찾아오지마.


석진
여주야.. 그만큼 널 너무 사랑해..


여주
오빠.. 알았어.. 현실에서 보자.. 찾아갈께....

나는 흐느껴 우는 여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서럽게 우는 모습이.. 내가 루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주를 대할 때처럼 대성통곡하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석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 때까지 믿고 기다려줄꺼지..?


여주
응... 그럼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줘....

우리는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포옹을 했고,

여주는 떠나기 전 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보니, 항상 이야기만 나누고 입을 맞춘 적은 없었는데..

이제서야 진정한 연인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오늘 하루가 정말 너무나 애틋하게 기억될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이 사랑인 걸까...


석진
'헤어짐이 너무 마음 아프다.'

기억을 다시 재생하시겠습니까...?

...................................................... 아니요.

데이터를 저장하는 중...

데이터 저장 중..................................

데이터 저장 중 .................완료!

Epilog. [에필로그]

직원
고객님... 일어날 시간입니다.


여주
아...

머리가 아프다... 같은 기억을 너무 많이 재생했어...


여주
되도록 오랫동안... 자주... 환상 속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여주
미안해... 진아 말해주지 못 해서...


여주
넌... 날 찾아올 수 없다는 걸...


여주
더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걸....

나는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잠시 후....

직원
고객님... 좀 괜찮아지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이번에는 저장해주신 기억 속의 진씨에게 감정을 배울 줄 아는 인공지능을 프로그래밍 해보았어요...

직원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여주
만족..이라...... 그가 저에게 미안하다고.. 저에게 이젠 직접 만나서 현실 속에서 사랑하자고 했어요...

직원
허.. 정말 놀랍군요...

직원
여주씨에게.... 그가 사랑한다고 했습니까...?


여주
네..... 처음에는 냉정했던 모습 그대로 였는데...


여주
어느 순간 그가 바뀌었어요...

직원
그렇다면, 그 인공지능은 여주씨를 통해서 사랑을 배운 거에요...

직원
보통은 인공지능이 반복되는 일과를 견뎌내야해서,

직원
저희가 루프물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 해두거든요...

직원
그러면 주위를 살피다가 그 곳에서 유일하게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주씨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직원
그 때의 감정은 호기심일 뿐,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직원
나머지 감정들은 모두 여주씨를 통해 배운 거에요...

직원
말하자면 기억 속 진이 사랑에 대해 각성한 것은 여주씨에게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주
아.. 네..

그는 내가 진이를 아직도 사랑한다는 증거...

현실 속 진이는 자신이 시한부라는 것을 숨기고 나를 만나다가,

내가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날, 진이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사정사정해서 병원 앞에 있는 공원에서 그를 겨우 만났을 때

자신이 죽으면 내가 마음 아파할까봐, 나에게 쓸모없는 자기를 버리고 현실을 보라고 모진말을 남기고 진이는 나를 떠났다.

여러가지 장치를 달고 있는 것도 보여주기 싫어하던 자존심 쎈 진이는

그날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이것저것 대롱대롱 매달고 나와야하는 것도,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어 했었다.

그래서 기억을 저장할 때, 아픈 모습은 모두 빼고 이 곳에 저장했다.

그땐 니가 아파서 나에게 현실을 보라고 한 것 같았는데..

아프지 않아도 여전히 나에게 너는 현실을 살라고 하는 구나...

직원
반복해서 사용한 재생기억은 많은 왜곡이 생겨서 에러가 나기 쉽기 때문에, 초기상태로 포맷하는 것을 권유드립니다만,

직원
여주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여주
마지막에 저장한 상태로.. 남겨주세요..


여주
보관처리하겠습니다.

끝.

진이 하는 대사 중 작은 따옴표(' ')로 처리한 대사는 모두 여주의 마음이 그대로 비춰지는 내용입니다.

진이 가슴이 욱씬거렸던 것도 그 말을 하던 여주의 아픈 마음이 투사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본 작품의 기억 재생장치의 소재 및 장면은 아이유의 노래 [에잇]의 뮤직비디오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주제를 듣고 처음에는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왔던 단편 영화 페르소나의 [밤을 걷다]가 생각났다가,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에잇]까지 왔던 것 같아요.

뮤비 속 의미가 마음 아프면서도 희망적이어서 종종 생각나는 것 같아요.

단편치고는 내용이 엄청 길어졌는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0. 7. 29. 미리별 유치원 숙제 제출 완료.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

8월 18일 오타 등 한번 수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