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아고물
4화



백현
..여긴 왜 왔어?


한여은
여주 짐 가지러. 이제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여은의 말에 백현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혼란했다.

누구 맘대로 집을 나가냐고 화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 편히 잘 됐다고 해줄 수도 없는 것이 복잡했다.


백현
..자기가 그렇게 하겠대?


한여은
어. 여주도 지쳤나 보더라.


백현
..그러냐.

짐이라곤 할 것도 없는 간소한 옷가지들이 여은이 쥐고 온 가방에 담아졌다.

옷보다도 스케치북이나 그림 도구들이 더 많이 나왔으니, 여은은 답답하기만 했다.


한여은
어젠 네가 여주한테 심했어. 알지?


백현
....그래.


한여은
앞으로 여주는 더 예뻐져서 좋은 사람 만날거야. 너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여은은 백현의 집을 나섰다.

넓은 집 안에 홀로 덩그라니 남겨진 백현은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여주의 방이었던 공간을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백현
..이제 정말 못보겠구나.

조용한 집에 있으니 잠이 금방 밀려왔다.

여주
`민석 씨!`


김민석
`늦었지. 미안해.`

여주
'됐어요.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잖아요.`


김민석
`백만 번도 사줄 수 있어.`

...? 백현은 얼마 안 가 이것이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자각했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여주의 얼굴과 옷차림이나, 난생 처음 보는 장소들이 그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저 남자는 왜 내 꿈에 나온 거야. 여주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미소짓는 민석에 백현의 심기는 잔뜩 불편해졌다.


김민석
`..나랑. 결혼해줄래?`

여주
`......`


김민석
`내가 정말 잘할게. 많이 사랑해주고... 또..`

여주
`......`

백현의 꿈은 거기서 끝났다.

깨고 싶다는 강한 의지도 한 몫을 했으리라.

꿈에서 깨어난 백현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어제 여은이 했던 말 때문이다.


한여은
`앞으로 여주는 더 예뻐져서 좋은 사람 만날거야. 너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정말 더 예뻐지긴 했더라.


김민석
야 꼬맹이. 정신 차려.

여주
...꼬맹이.. 저요..?


김민석
여기 너 말고 꼬맹이가 또 있나. 꼬맹이.

백현이 평소에 여주를 자주 그렇게 부르곤 했었다.

떠오르는 백현과의 추억에 여주의 기분이 더 울적해졌다.


김민석
왜 멍 때려.

여주
...아.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서..


김민석
그러냐.

여주
..네. 죄송해요. 집중할게요.


김민석
그래. 멍 때리지 마라. 멍 때리니까 더 못생겼어.

여주
네???? 아 진짜 너무하세요!!

여주의 원망에 민석은 작게 킬킬거렸다.

그렇게 장난을 치는 민석은 직원들에게는 참 낯설었다.


박찬열
저 형이 왜 저러지.. 뭘 잘못 먹었나.


박찬열
형. 나 형이 누구한테 장난치는 거 처음 봐요.


김민석
뭐.


박찬열
아니 참 좋다구요..

금세 꼬리를 내리는 찬열에 민석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박찬열
(내가 나중에 꼭 저 형한테 복수한다.)

찬열은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김민석
어쭈 주먹 쥐냐?


박찬열
아니요. 손에 쥐가 나서요..

아무래도 올해 안에 복수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박언니
여주야. 밖에 누가 너 찾아왔는데?

여주
네?? 저를 누가 찾아왔다구요?

박언니
응. 잠깐 나갔다 와.

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차에 몸을 기대고 선 백현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리는 여주였다.

아저씨가 여긴 왜 왔지? 도망갈까? 그러나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백현과 눈이 마주쳐 버린 여주였다.

여주
..왜 왔어요?


백현
이거. 집에 있길래.

여주
..........

백현이 건넨 것은 여주의 아빠와 여주가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이걸 가져다 주러 왔구나..

혹시나 저를 다시 데리러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조금 들떴던 여주의 기분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여주
..감사합니다.


백현
그래. 잘 지내고.

여주
...네. 그동안 감사했어요.


백현
어. 아프지 말고. 갈게.

백현이 모는 차는 금세 여주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백현에 여주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로 서 있었다.

진짜 간 거야? 정말 저렇게 가버린 거야? 다시는 못 볼 지도 모르는데..?

..매정하다 진짜.

또 바보처럼 터져버린 눈물에 여주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볐다.

안 그래도 잔뜩 울어둔 탓에 눈가가 따가웠다.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마음이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마음을 열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나이를 먹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이젠 다 틀렸나 싶다.


김민석
..울었냐?

여주
안 울었어요.


김민석
울었는데.

여주
...안 울었거든요?

누가 봐도 운 사람의 얼굴을 하곤 안 울었다니.

민석은 엉망이 된 여주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 말 없이 나간 민석은 곧 손에 코코팜을 들고 들어왔다.



김민석
자.

여주
맨날 코코팜이야..


김민석
이름이 맘에 들어서.

투덜거리며 코코팜을 마시는 여주에 민석은 피식거렸다.


김민석
뭐 때문에 그렇게 울었는데.

여주
..그게...

한참을 망설이던 여주는 결국 모든 일을 얘기했다.

백현에게 고백했던 것부터, 방금 전의 일까지.

여주의 이야기를 듣고 난 민석의 머릿속에 꽤나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김민석
이럴 땐 유치한 방법이 잘 먹히는 거지.

여주
네?


김민석
이리 와 봐. 나랑 같이 사진 찍어.

여주
....네..?

막무가내인 민석에 여주는 얼떨결에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로 민석과 셀카를 찍어야 했다.

여주
대체 뭐하세요..?


김민석
이거 프사해.

여주
아니 대체 왜요?


김민석
그 남자 질투하라고.

여주
....네?

아무렇지 않은 민석에 황당한 건 여주였다.

이게 뭐하는 건지 싶으면서도 어느새 민석의 말에 따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있는 제 자신이었다.

여주
..이게 먹힐까요. 아저씨는 나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던데.


김민석
밑져야 본전이지.

여주
..저 도와주시는 거예요?


김민석
..아닌데. 그냥 재밌어보여서.

거짓말.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티가 났다.

여주
..고마워요.

포기하려고 했던 백현을 향한 마음에, 다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