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사랑합니다.

23.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투두둑 비가 거세게 오는 날에는 마차가 잠시 멈춰 섰다. 비가 그칠 때쯤 이동하곤 했는데 어라,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날이 밝아가도 가지를 않았다. 무슨 일이 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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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저기, 갑자기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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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드디어 이렇게 잡았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헛웃음부터 나오며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잡아서 뭐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해? 한 마디를 하려고 하자 말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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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아, 진정하라고. 말만 잘 들으면 안 죽일 테니까. 김동현한테 너 살아 있다고 편지도 써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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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갑자기? 난 널 못 믿겠는데. 너 지금 나 죽이려고 여기로 부른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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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말만 잘 들으면 너도 산다니까! 내가 이러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냅다 소리를 지르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얘 갑자기 왜 그러는데? 가면서 얼굴을 보니 눈은 빨갛고, 눈물을 참는 것 같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었지, 뭔가가 잘못됐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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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너도 알잖아, 델루나 로즈마리랑 전쟁 났다는 거. 어쩔 수 없었어. 황제의 소중한 사람을 뺏어오는 게 우리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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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고문이라도 하게? 나한테 뭘 바라는데, 노예라서 아는 것도 없는데. 죽일거면 여기서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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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해? 살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빌기라도 해서 살아나는데 너처럼 이런 식으로 하면 델루나 황제는 못 참고 죽여버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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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안 살고 싶다고 말하면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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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델루나 황제는 나 못 죽여.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겠어? 피범벅이 되어도 살아나는 게 이대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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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그리고 내가 너한테서 못 탈출할 줄 알았지? 병사들이랑 와야지 혼자서 뭐하는 거야.

멍하니 있는 이재희를 비웃곤 뒤돌아갔다. 델루나는 여전하구나, 멍청하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라. 내가 노예 시절 때 얼마나 도망치면서 다녔는데 그거 하나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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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하 씨, 비 더럽게 많이 오네. 델루나는 처음이라서 어디로 가야 되는 지도 모르겠고.

며칠 동안 마음 편히 못 쉬고 앓기만 해서 그런지 기운도 없고 걸을 힘도 없었다. 지쳐버린 바람에 잠시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총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다. 아, 여기 전쟁 중이었는데.

"저기 있어, 쟤 잡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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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흐윽, 왜 하필 지금…….

뛸 힘도 없는 와중에 도망치라니. 다행인지 안개도 많고 비도 미친 듯이 와서 나를 찾기는 어렵나 보다. 총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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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나, 나 진짜 죽어-

총이 팔을 스쳐 지나갔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하늘은 뭐가 그렇게 슬픈지 세상이 곧 죽을 것처럼 비가 거세게 내려왔다. 안 돼, 나 살아야 돼. 폐하가 나 죽은 거 알고 울면 안 돼.

눈 앞이 흐려질 때쯤 큰 돌에 걸려 넘어져 바닥에 풀석 주저 앉았다. 나 이제 못 뛰어. 들키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찾았다. 꼬마야 이번에는 곱게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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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살,려주세요, 나 이렇게 못 죽어…….

총을 머리에 대고 죽기 직전에, 이번에는 내 앞에 있는 사람 머리에 총알이 날라왔다. 노예 시절 매일 보던 광경이었지만 그렇게 무섭지 않을 수 없더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난 그저 살고 싶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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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하, 이대휘 빨리 도망치라고……!!

갈라지는 목소리, 빗소리에 감춰져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재희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또 확실한 건 내가 알던 이재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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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너도, 너도 살아야 돼. 내가 확인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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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미친놈아. 김동현 안 보고 싶냐고! 내가 살면 넌 죽고 내가 죽으면 넌 사는 거야.

도망치는 중에 이재희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고는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걔는 다른 사람이 안 죽였다면 스스로 죽었을 애야. 이거 봐. 멍청해, 델루나 사람들은 멍청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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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자기 목숨도 못 챙기는 바보가 어디있냐고, 이재희!!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거에 눈물만 나왔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게 세상을 잃은 것만 같았다. 왜 나 때문에 죽는 거냐고. 차라리 저번처럼 나를 죽이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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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나중에 봐. 나 밉겠지만 하늘에서 지켜봐 줘.

한참을 헤매다가 정말 단단히 길을 잃어버렸다. 여기 진짜 어딘데? 사람도 없고 동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숲에 와버렸다. 다행히 아침이라 앞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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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리자, 대휘야. 한 명이라도 있을 거야. 분명해.

사실 이 생각만 몇 시간 째인지 모르겠다. 나 배고프다고. 살해 당해서 죽는 것보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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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아 시X!!! 로즈마리 언제 다 오는 건데!!

욕이 육성으로 나왔다. 나 사실 여기가 델루나인지 로즈마리인지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어……여기가 로즈마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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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아, 아악!! ㄴ, 누구세요!!

"조용히 하세요. 딱 봐도 말라서 죽을 것 같은데 좀 들어와서 먹고 가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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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그래도 돼요? 저한테 막 줘도 되는-

"아 진짜 의심 많네. 그럼 안 줘도 되지? 그래 가라, 가."

아 이대휘 입이 말썽이다. 지금 저렇게 착한 사람을 의심하는 거야? 딱 봐도 우리 편인 로즈마리인데! 애교부터 부리며 내가 방금은 미쳤었다고 말했다. 거지 차림으로 이러는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어디있어, 보살이지.

"옷도 허름하고 이게 뭐야. 어디 다쳤어? 젊은 놈이 뭐하는 짓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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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일이 생겨서……아, 그보다 여기 위치 좀 알 수 있을까요?

"비엘라 -로즈마리 수도- 가려고? 이 숲만 지나가면 나와."

뭐라고?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곳이 수도 근처야? 내가 맨날 보던 그 숲? 눈이 동그래지며 바닥에 냅다 앉아 절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절을 왜 두 번 해? 나 죽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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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일단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나중에 은혜 꼭 갚을게요!!

걷느라 아픈 것도 신경 못 쓰고 길이 보이는 대로 뛰었다. 폐하를 볼 수 있다는 거에 설레는 마음만 가득했지. 물론 그것 때문에 내 몰골도 신경 못 썼지만. 어떤 상태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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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머리 다 헝클어졌고, 옷에는 피 묻고 찢어졌고 몸에서는 냄새나는 것 같-

"이 놈아, 그 꼴로 비엘라 가려고 했냐? 좀 씻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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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아, 저 빨리 가야 된다고요!

"그 꼴로 가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너라면 좋을 것 같냐?"

듣고 보니 그랬다. 이 상처를 떡하니 보여주면 좀 그렇지. 결국 질질 끌려가 씻는 것부터 먼저 했다. 으으, 나 빨리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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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박우진 실종이라고……? 이대휘도 찾을 수 없고?

"ㄱ, 그 찾다가 나온 정보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칠 것만 같았다. 박우진 이대휘 둘 다 실종. 말만 들어도 무서운데 이게 다 사실이면? 일이고 뭐고 다 손에 안 잡히고 전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에 죄책감이 어마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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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소문일 수도 있어. 소문이 정확한 적은 별로 없었잖아? 그리고 걔네가 죽을 것 같지도 않아. 어떻게든 살아서 올 사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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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그래도 어느 한 곳이라도 다쳐서 오면 어떡해? 오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그것도 나 때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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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그게 왜 너 때문인데. 제발 자책하지마, 네 탓 아니니까. 이번에는 델루나가 먼저 시작했어.

위로도 소용없었다. 고통스러움에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 이런 사람인데 황제 해도 될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고통스러워.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게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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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나 나갔다 올게. 상황이라도 봐야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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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걱정 하지마라니까. 하성운이 살펴보고 있으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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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그런가. 아, 그래도 여기 있어 봤자 머리만 아프잖아.

밖으로 나가면 당장 대휘가 환하게 웃으며 올 것만 같았다. 나 돌아왔다고, 이제 우리 안 아플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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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진짜 폐하 얼굴만 보면 된다니까요?! 왜 못 보게 하는데요!

"저희가 미쳤다고 아무나 들여보냅니까? 폐하께서 최근에 절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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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아으, 그럼 만나는 건 안 바라고 얼굴만 보게 해달라고요. 내 남편을 내 눈으로도 못 봐?

"미친놈인가……야, 쟤 수상한데 잡아 놔."

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어이없어!! 폐하가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내가 알기로는 처음에 양아치에다가 미친 또라이였는데. 그래, 그럼 잡혀가서 폐하 얼굴 보지 뭐. 잡히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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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나중에 후회 하지마. 참 나, 내가 로즈마리 오느라 총도 맞았는데.

"누가 오라고 했어? 애초에 자발적으로 왔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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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

뭐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또르르 눈물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리 노예라고 쳐도 여기에서 자랐고, 여기서 평생을 산 사람인데 뭐? 애초에 자발적으로 왔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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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흐으……그래 나 갈 거야, 다신 안 와. 폐하한테 잘 말해 봐. 오늘 검정 머리 어린애가 큰 소리 빽빽하고 난리 치다가 루비아 가겠다고 했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기사단장 님이라도 불러서 잡으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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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그래? 그렇다면 나야 너무 고맙지.

그 유명한 기사단장이 나랑 친한 전 웅이거든! 너희 다 죽었어. 나의 인맥을 알릴 때인가? 옷차림 보고 사람 판단한 너희가 잘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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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그래, 무슨 일로 불렀……? 이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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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형아, 저 사람들이 나 거지같고 로즈마리에서 꺼지래!! 나 폐하 보려고 온건데!

"ㅇ, 야 우리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꺼지라고는 안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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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지 혼자 자발적으로 들어와 놓고 지X한다는 말이 꺼지라는 거지 그럼 뭐야? 너희들은 나보다 말 이해 못 해?

전 웅 품에 꼭 안겨서 할 말은 다하며 질질 울었다. 사실 좀 오바해서 이르긴 했지. 세상이 떠나갈 듯이 말했다. 저누웅, 흐엉, 그니까 저 사람들이이, 흐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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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ㅇ, 아니 대휘야 일단 들어가자, 응? 그래 폐하도 너 많이 보고 싶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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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쟤들이 나 들어오지 마라고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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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웅

야 너희 꺼져. 얘 눈 앞에서 보이지 마라고.

"……네 기사단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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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히, 웅이 형 그럼 나중에 봐!

전 웅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갑자기 와서 정신없게 했지? 폐하 볼 수 있는 방법이 몇 없어서 그랬어. 손을 한 번 흔들곤 당장 폐하를 찾으러 갔다. 나, 드디어 폐하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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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후우, 밖으로 나가도 나아지질 않네. 이대휘가 실종…….

하루 종일 이 생각만 했다. 어딜 가든 여기 대휘가 자주 갔던 곳인데, 나한테 이 말들 많이 해줬는데.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나는 걸 어떡해. 이미 그 아이를 너무 많이 사랑해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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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보고 싶어. 다시 와준다면 없던 힘도 다 쏟아부어 지켜줄 텐데. 더 많은 사랑을 줄 텐데.

"내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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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응, 당연하……어?

며칠간 차가운 냉기로만 가득한 주변을 따스한 기온을 가지고 안아주었다. 뒤에서 몸을 꼭 감싸 주는데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었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차마 뒤를 돌아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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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폐하, 내 얼굴 안 볼거야? 나 안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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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아니, 미친 듯이 보고 싶었어. 기다리다가 못 견뎌서-

뒤를 휙 돌고 말하자 항상 내가 먼저 입을 맞췄었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내게 먼저 입을 맞춰주었다. 키스를 하는 것뿐인데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오더라.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어, 다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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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웃는 모습만 보여줄게. 이제 상처받지 않도록.

달콤하게 웃는 모습이 심장이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나 너 정말 사랑하나 봐, 사실 네가 하는 말 하나도 안 들려. 지금 당장 안아주고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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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휘

폐하 소중한 존재야. 부족하고 아직 어린 나에게 사랑이 뭔지 알려줬잖아. 이렇게 많은 백성들을 살피기 어려운 건 당연한 거야.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내게 이런 따스하고 부드러운 말들을 해주고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말 대신 그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였다.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내 편이 되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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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 / 로휘

흑흑 이 말은 제가 실제로 들었던 말🥺 너무 빡 꽂힌 말이라서 기억에 잘 남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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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 / 로휘

그리고 고구마를 몇 화 더 끌려고 했지만 이번 화에 딱 끝냈습니다⭐️ 재희 알고 보면 착한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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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 / 로휘

인터넷에 보니까 다들 그러더군요 현생도 힘든데 웹소설 보면서까지 힘들면 짜증난다고ㅠㅋㅋㅋㅋㅋ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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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 / 로휘

아무튼 이번 화도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음 화에서 봅시당

둘 다 고맙당...^^💚

달이 박제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