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물어봐

나를 물어봐 1





P사의 이온 음료 광고가 세상에 나온 지 일주 뒤다. 최근 몇년간 지지부진하던 매출의 상한선을 뚫게 되면서 해당 제품은 소위 말하는 히트를 쳤다. 이는 P사도 인정하는 바로, 고작 30초 남짓의 광고 영상이 이렇게나 세간의 화제를 몬 데에는 그 모델과 디렉팅의 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룹 바잇미(Bite Me)의 소이. 특유의 청량한 이미지와 내려묶은 양갈래, 미디엄 파스텔톤의 메이크업을 입힌 톡톡 튀는 미소는 그녀가 짧은 시간동안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P사 공식 계정에 올라온 원본의 조회수가 몇백만을 넘어가는 동시에 소이가 입었던 착장이 위아래로 모조리 절판됐다.


이로써 데뷔 넉 달만에 도소이는 빛을 봤다. 시기상 운일지언정 현재 스포트라이트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언제 이렇게 됐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3대 방송사에, 그것도 가장 흥행하는 드라마 피크 타임에 소이를 모델로 내건 광고가 스쳐지나간다. 관련 기사가 수십여 개도 더 올라온다. 도소이에 빌붙은 그림자처럼 그 파급력에 소속 그룹 바잇미도 반짝 실검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저런 이슈에 묻혀 한 시간만에 내려가긴 했지만. 앳된 신인의 행보를 세상이 낱낱이 눈으로 좇으니 당사자도 어지간히 순진하지 않아서야 날마다 쏟아지는 호평과 찬사를 모른 체 할 수 없다. 점차 상승세를 타면서 소이는 생전 안 읽던 기사를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개는 연예일보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제 사진을 지리할 만큼 오래 들여다 보거나, 기사에 우후죽순 달리는 댓글들을 구경하는 등이었다. 마치 훔쳐보는 양 보일 수밖에 없다만 보고 싶지 않아도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걸 어쩌나. 일부런지 정말 무심해선지, 그녀는 자잘한 심부름-대부분 매니저 언니가 부재할 때 일이다-을 명분으로 시종일관 나를 옆에 두어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멤버 중 하나가 내게 쓴소리를 했더랬다. 여주 언니, 그런 거 다 들어주면 버릇 나빠진다니까요? 나는 그런 얘기를 듣고도 바보처럼 픽 웃음 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괜찮아. 딱히 힘든 일도 아닌데 뭘.




바잇미의 리더. 서여주. 도소이를 매개로 이제야 본체를 알아주기 시작하는 대중들도 팀에 그런 애가 있었나, 긴가민가 하는. 그나마 이름 옆을 장식한 리더는 내가 그룹내 소이를 제외하고는 연장자인 고로 수여된 직책이었다. 실상은 노래도 춤도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나, 그렇다고 뛰어난 것은 더더욱 아닌, 포지션이 애매한 멤버에게 어쩔 수 없이 맡겨진 역할이라 큰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표와 실장은 내가 이중 가장 어른스럽고 말귀도 척척 알아들어 리더에 제격이라며 무언가 구실이 있는 듯 굴었지만, 나는 그게 괜히 나를 기죽이기 싫은 배려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가뜩이나 데뷔초부터 동갑인 소이와 비교되는 마당에 내가 엇나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듯이 보였다. 하루에도 몇십 번 날아드는 러브콜로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는 지금은 회사의 흥망에 있어 꽤 중요한 시기이니 말이다.




바잇미는 5인 체제로, 내 밑으로 세 명의 멤버들이 있다. 그 말인즉슨 소이가 시키는 무의미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넘길 멤버가 세 명이나 있다는 것이지만, 태생부터 쭉 가장으로 지내와선지 책임은 아무래도 리더인 내가 지는 쪽이 나았던 거다. 이에 하나는 특히 못마땅해 하고 나머지 둘은 안타까워 했으나, 소이 앞에서는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도 앞전에 대표가 단단히 이른 말 때문인 듯 싶었다. 그가 어느 날 우리를 은밀히 불러 말하길, 우리 중 데뷔 후 수익에 있어 마이너스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멤버가 소이라고.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소이를 신경써주고 잘 대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빙빙 돌려 말한 것일 테지마는, 그날 나를 포함한 모두의 귀에는 '아무리 팀 분위기를 흐린다 한들 소이가 너희 적자를 메꿔주니 염치가 있어서라도 참아야 한다' 는 식으로 들렸을 것이었다. 얌전히 고개만 끄덕일 뿐 대꾸가 없었던 건 데뷔 이래 습관이 들어서였고, 또한 뭐라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아이돌계 전무후무한 비주얼과 어딜 가도 돋보이는 끼. 소이는 애초에 타고나기를 스타가 될 사람 같았다. 단지, 중소 엔터의 작은 그룹이 담기에는 그녀가 너무 컸다.




"서여주, 나 물."




방송국 M사의 공기는 건조하고 냉랭하다. 특히 음방 전 대기실이 그렇다.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 속에서 눈치 안 보고 말을 꺼낼 수 있는 건 제 값어치를 하는 자의 특권이다. 때마침 나는 나머지 멤버들과 동선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설은 일순 저쪽을 향해 고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찰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어째 나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서, 이때만큼은 머리 전에 몸부터 반응하는 내 습관에 오히려 찬사를 보냈다. 벌떡 일어나 한 구석으로 밀어둔 탁자 위에 있던 걸 들고 간다. 응, 여기. 버릇처럼 생수는 뚜껑을 까고서 줬는데, 고상하게 앉아 메이크업을 받던 소이는 이것에 짜증을 부렸다. 누가 그딴 거 해달래? 유세 떠는 거야 뭐야. 약하게 주름지는 미간. 탁 잡아채는 손길을 가만 바라보다 다시 뒷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는 화 안 나요?"

"응? 뭐가?"

"뭐가라니, 맨날 모른 척. 소이 언니 저러는 거 화 안 나냐구요."




동갑인데 어떻게 저렇게 달라. 재수없어. 소이가 개인 스케줄로 자리를 비우고, 덜그덕거리며 숙소로 향하는 차량 안에서 한설은 주파가 빵빵하게 터지는 오디오처럼 쫑알쫑알 불만 일기를 썼다. 또 생방에서 자기 혼자만 안무 틀린 거 아는가 몰라여, 그거 언니도 봤죠? 나는 그에 맞는 둥 아닌 둥 애매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지만 보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후렴에서 두어 차례 소이의 스텝이 꼬였다. 광고 출연 이후로 극도로 늘어난 일정 탓에 연습량이 줄어든데다, 원체 무대 전 다같이 합을 맞춰보는 행위 자체를 꺼려하는 기질이 있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 실수야 양호한 편이기는 했다. 다행인 것은, 카메라 감독은 그 장면에서 소이의 예쁘장한 얼굴에만 열정을 쏟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장에 온 팬들 중에는 엄한 구석에서 제 가수 발목 잡을 만한 인간은 보이지 않았으니, 실수는 그저 실수에 그칠 수밖에. 당연한 수순이다.




"너는 평소에 말 좀 조심하고 다녀. 언니한테 재수없어가 뭐니?"




건수를 문 한설이 한창 소이의 행태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데, 뒷자석에서 다연이 날선 일침을 놨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전부터 꾸준히 독사같고 똑부러지는 성질이 있는 멤버였다. 실제로 여기 중 소이에게 가장 불만이 없기도 했고. 한설이 그 말에 뭐가 눌렸는지 등받이 쪽을 홱 돌아봤다.




"뭐가요? 언니가 언니다워야죠."

"언니다운 게 뭔데?"

"이렇게 유치하게 말꼬리 안 잡는 거요."

"넌 꼭 할말 없으면 그런 쪽으로 빠지더라."

"야아, 왜 싸워 또."




상성이 엇갈리는 이 둘이 붙는 건 일상이고, 결국 누구 한 명이 나서야 풀린다. 피곤하다 피곤해. 막내랑 말씨름할 체력 있으면 내 어깨라도 주무르든가. 가운데 앉아 있던 유제가 농담조로 다연의 입을 막았다. 다연은 뚱한 눈으로 점점점을 그리다가 창가로 고개를 슥 돌렸다. 한설 못지않게 자기주장이 강한 그녀를 제어하는 상황에선 성격이 비교적 순박한데다,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공유하고 있는 룸메이트 유제의 공이 컸다.


다시금 정적이 맴도는 차 안. 한설이 입을 삐죽 내밀다가도 나를 맹랑하게 올려다 본다.




"언니. 언니는 내 편이죠?"

"그럼."




살풋 웃어주면 보답하듯 강아지 같은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도착할 때까지 잠깐 자자. 이따 저녁에 라디오 스케 있으니까."




그 말에 네에, 하며 얌전히 머리 쿠션에 뒷통수를 기댄 그녀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사위를 덮는다. 나는 조금 뒤 핸드폰을 켰다. 화면을 점령한 기사는 소이가 오는 8월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다는 소식이었다.






Bite Me

W. 연망







멜로 엔터테이먼트. 소이를 보유한, 바잇미를 보유한, 그러니까 내가 현재 발을 담구고 있는 소속사. 이 회사가 FG 레이블로 인수되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정확히는 '된' 것이 아니라 그 절차가 진행 중에 있지만, 어쨌든 중대한 변화에 연루된 가수로서 너무 늦게 상황을 알게 되었다는 건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알고 있었어? 라는 물음에 "그럼 모르고 있었겠니, 내가." 태연히 답하던 소이는 아주 애저녁에 대표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부러웠다. 그러나 소이의 위치를 감안하자면, 한편으로는 당연했다. 적어도 회사 운영에 있어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는 그녀에겐 대표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단 직원에게 하는 통보조로 얘기하진 않을 테니.




몸에 익은 루틴이 조금조금씩 변했다. 원래는 자연히 멜로 엔터로 향하던 길목이, 어느 순간부터 하루에도 몇번씩 익숙지 않은 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홍보 차원에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후엔 자주 들르는 수준을 넘어 아예 그 근방인 용산으로 숙소도 옮겼다. 어쩌다 보니 바잇미 자체도 FG 레이블의 대표격인 FG 엔터테이먼트의 산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이는 제 벌이와 몸값을 들먹이며 더 좋은 숙소를 선택하길 바랐지만 이것이 빌려쓰는 돈이란 자각이 있는 우리는 전에 살던 곳과 최대한 비슷한 정도의 집으로 확정하기 위해 열심히 소이를 구슬렸다. 어찌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 그녀를 제한 멤버들은 한동안 기가 쭉 빠져버린 채로 지냈다.




머지않아 인수 기사가 났다. 회사발 공식 기사가 났다는 것은 확정과 불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는 몇 줄을 내리 읽으며,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감정에 매몰됐다. FG 엔터테이먼트 자체는 연습생들에게 꿈의 기획사로 유명했다. 듣자니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중도에 내쳐지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만일 내부 사정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회사로 옮기든 어쩌든 해서 데뷔는 꼭 본사가 책임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성공 루트가 그렇듯 들어가기까지가 문제였다. 가뜩이나 비밀리에 진행되는 FG의 헤드헌팅에 랜덤적으로 당하거나, 1-2차로 걸러진 재능인들 사이에서 100대 1에 준하는 3차 경쟁률을 뚫고 입사하는 것밖에는 더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들에겐 꿈의 직장이면서도 동시에 지옥 문턱과도 같았다. 게다가 FG 엔터가 그토록 선망받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빌립의 존재였다.


빌립. 케이팝계 역대 규모 팬덤을 동반하며, 전세계적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4인조 보이그룹.


그룹 자체의 인지도도 인지도지만, 특히 빌립 하면 웬만한 사람들도 일괄적으로 떠올리는 한 이름이 있다. 그 때문인지 오늘로서 처음으로 FG 본사에 들어서게 된 멤버들은 모두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대면하길 속으로 고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설은 티비에서나 보던-아마 본인도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까먹은 것 같다- 스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라며 아침부터 방방 뛰어댔고, 유제와 다연은 짐짓 차분한 체 했지만 여전히 기대는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소이는 아끼는 브랜드의 귀걸이를 꺼내 꼈다. 매니저 언니에게 스케줄을 전달받은 바로는 이쪽 대표와 먼저 면담이 있다고 했다. 그 잘나가는 FG가 일개 소속사에 손을 내밀 까닭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마땅히 소이일 것이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아는 듯 늘상 자신감에 가득 찬 자세였다.




"오늘 나 대표실에 가 있는 거 알지?"

"응, 얘기 나눈다며."

"끝나면 문자 할 테니까 매니저 시키지 말고 니가 와."




나는 조금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물 한 병 가져다주는 것과 같은 결의 요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래. 바로 올라갈게."




대답에 맞춰 소이가 먼저 주차장 입구로 방향을 트는 통에 귀에 달린 상아색 귀걸이가 빛을 받아 찰랑였다. 반듯하게 내려온 생머리 옆으로, 곧은 어깨선과 얄쌍한 허리를 감싼 실크 원피스가 단번에 시선을 앗아갔다. 안 가요 여주 언니? 유제가 등어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어, 가야지. 그제서야 나는 굳은 껌처럼 바닥에 눌러붙은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의외로, 멤버 중 다연이 제일 아쉬워하는 듯했다. 직원 일동에게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여러번 인사를 돌리고, 법무팀 사무실서 서명과 문자로 그득한 서류 작성을 마친 뒤 스튜디오를 비롯한 건물을 이층저층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우리는 빌립의 비읍자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이의 차례가 끝난 후 바잇미 전원이 대표와 만나기 전까지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 많고 많은 안무실 중 현재 사용시간이 아닌 곳으로 인도되었다. 고작 방 하나가 어찌나 넓던지, 한설이 장난스레 "아-" 하자 구석 저편에서 "아-" 하는 메아리가 화답했다. 빌립을 만나지 못해 기분이 다운된 다연에겐 그것조차 눈엣가시로 여겨졌는지 한설은 조용히 하라는 타박을 면하지 못했다.




"소이 언니가 진짜 대단하긴 한 것 같아."




한 차례 가벼운 소동이 지나고, 제 몸만한 오디오 옆에 쭈그려 앉은 유제가 말을 꺼냈다. 작지 않은 음악 소리에 미미하게 흔들리는 바닥. 나는 앞뒤 맥락도 모르면서 넋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 대단하지..."

"그쵸? 솔직히 저는요, 그 언니 아녔으면 이런 데 구경이나 했겠나 싶어요. 평생 우리 회사 문턱만 지겹게 왔다갔다 할 줄 알았는데."




아까 직원 사무실 봤어요? 부서에 사람도 많아서 이따만하더라, 진짜. 이따아만. 유제는 설명만으로 시원찮았는지 양팔을 과장스럽게 펼쳐보였다. 정말 인상 깊었나 보네. 나는 부러 촌뜨기 같이 굴지 말라고 놀리면서도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곁눈질로 대충 둘러만 봐도 우리 회사 건물을 서너 개는 겹쳐놓은 듯한 스케일이니까 말이다. 연습생 때 머물렀던 지하의 꿉꿉하고 서늘한 공간보다야 현재 스튜디오는 감사할 정도지만, 아이돌이라면 이 정도의 로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터였다. 초대형 엔터. 빵빵한 지원. 별이 별로서 빛나기 위한 최적의 조건들. 그런 걸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어.




"여기 계속 남아 있고 싶다, 다같이."




무슨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했으나, 잠자코 듣고 있던 다연이 끝말을 덥석 물었다.




"너무 기대하지 마. 실적 안 나오면 몇 개월 뒤에 바로 나가리고, 좀 잘 봐줘도 결국엔 소이 언니만 남겠지."

"에이... 뭘 그러냐 또. 기왕 온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맞아요. 혹시 모르지, 우리가 이번 활동 중에 완전 대박 칠 수도?"

"......"

"...뭐. 왜 그렇게 봐요?"

"푸핫!"




그래. 막내는 밝다. 밝아서 좋아. 나는 가만 내비뒀다간 저 둘이 또다시 불붙을까 한설의 말에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식으로 호응했다. 한창 거울에 대고 사진 찍다가 대화에 급하게 끼어든 폼이 우스웠지만 그런 얘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귀염둥이 장한설이! 일루 와! 나와는 달리 참지 못한 유제가 달려들어 한쪽 팔에 한설을 꽉 끼고 안 그래도 부슬거리는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차마 피하지 못한 그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둘을 한심스럽게 지켜보던 다연은 이내 손에 들린 에어팟을 가차없이 귀에 꽂아넣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괜스레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러니 모든 게 얼추 평화를 되찾은 듯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그대로 안무실 바닥에 드러누워, LED등이 볼썽 사납게 번쩍이는 천장을 응시했다.




"대박이라..."




아예 확률이 없는 소리는 아니다. 피같은 노력과 조금의 운이 뒷받쳐 준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마는, 어디까지나 시간의 문제였다. 지금처럼 소이로부터 받는 낙수 효과는 언젠간 멎게 것이고, 그때쯤이면 그녀는 더 좋은 계약 조건을 찾아 바잇미를 나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이대로 손 놓고 '언젠간' 닥칠 대박만을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다음 컴백에는, 다음 해에는...


띠링. 마침 타이밍 좋게 알림이 울렸다. 나는 머리맡에 두었던 것을 다시 집어와서 몸을 돌려 누웠다.




[지금 와.]




발신인은 딱히 명명되지 않은 번호 한 줄이었으나, 당연스럽게도 별다른 설명 없이 알 수 있었다. 소이였다. 아까 데리러 오라고 했었지, 참. 잘 놀고 있는 멤버들을 뒤로 하고 안무실을 나섰다. 내 키보다 네 뼘은 더 큰 문을 닫고 나와, 곧장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잡을 때까지도 멍한 상태였다. 암만 유제를 촌뜨기 같다 놀렸어도, 당장 나부터가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 그리도 아무렇지 않게 대표를 만나러 간 소이가 무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낯선 복도에만 우뚝 서 있어도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인데. 그녀는 애초부터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니 말이다.


되짚어 보면 늘 그런 태도였다. 이렇게 매달 빠지지 않고 번호를 바꾸는 이유만 해도, 몇몇 악질적인 팬들이 기어코 그걸 알아내 못살게 굴기 때문이었는데, 소이는 별로 그런 상황에 개의치 않아 보였다. 대부분 이유 없는 투박한 욕지기거나 얼핏 내용만 들어도 그저 그렇게 넘길 수준이 아닌 것들이었다. 새벽녘 내게 장난삼아 제 전화를 바꿔주던 천진한 얼굴이 떠오른다. 흠칫 놀라는 나를 바라보며 마냥 재밌어 하던 목소리가. 얼마나 겪어야 그 애 만큼 익숙해지는 걸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빽빽히 자리한 버튼들 아래 매니저 언니에게서 받은 키 카드를 댔다. 이곳의 대표실은 하염없이 높은 꼭대기층이었다.




외려 누군가의 반응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도소이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소이가 인터넷 서칭에 맛들리기 한참 전부터 나는 기사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 자정에 다들 피로에 절여져 잠이 든 차 안에서도, 몸을 혹사시키는 연습 후 가까스로 주어지는 황금같은 휴식시간에도. 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굳이 찾으려는 시도는 없었지만, 타인의 모습에서 나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지, 저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비와 가정들. 그러니까 이번 기사도 그러한 축이었다. 엄지 아래로 죽죽 내려지는 기사 화면은 온통 한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기자의 글 솜씨가 형편 없는 탓도 있겠지만, 최대한 이목을 끌기에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걸 본인도 깨달은 모양이다. 가상한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기사는 인터넷에 올라온 지 단 3시간 만에 실시간 연예 뉴스 상위권을 점령했다. 빌립 정국, 배우 이아영과 열애설. 관심 한 번 모으기 참 효과적인 주어 문구네 싶었다.




"뭘 들켰길래 열애설까지..."




중얼이던 차에 엘리베이터는 댕, 하고 멈춰 섰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나는 도로 무심하게 눈을 액정에 내렸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쫓기듯 황급히 전원을 껐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쿵 뛰어서 숨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photo




이윽고 기사 사진 속 그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 옆에 와 섰다. 아주 느리게, 기척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