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물어봐

바이트 미 2





연습생 시절부터 빌립의 징한 팬이었던 한설 덕에 그들의 하이라이트 무대라면 줄줄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언니, 언니 부르며 제 휴대폰으로 무대 영상을 같이 보자며 치대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 기특한 마음씨로 다소 늦게 입사한 내가 겉돌지 않게 배려한 것이 틀림없디. 처음이야 어린애 애교 섞인 부탁에 못 이겨 봐주었다 하지만, 늦바람이 무섭다고, 오히려 나중 가서는 내가 자진해서 찾아보게 되었다는 일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당시의 연말 시상식 무대. 26일이던가, 27일이던가, 아무튼 12월 살 에는 계절이었던 것만큼은 몸이 또렷이 기억하는 날. 빌립은 정말 아이돌 같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누군가의 아이돌(Idol). 어느 가수를 응원하러 왔든 간에, 관중석 색색의 불들이 하나의 흐름에 일렁이고, 반주가 시작되기도 전 발 아래의 함성소리가 그들 인이어를 뚫고 폭발적으로 밀려오던. 한창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그룹을 위한 과할 정도의 스크린 효과나 세트라든지, 안타깝게도 그런 건 전혀 눈에 띄질 않았다. 너른 초야 같은 무대를 장악하는 건 오롯이 빌립 하나였기 때문이다. 턱끝에 맺히는 뜨거운 땀방울, 한겨울 입김을 쪄내는 불규칙한 호흡마저 예정된 연출 같았던 거대한 돔 공연장. 빌립은 그날 대상을 포함한 자그마치 대여섯 개 분량의 상을 싹쓸이 해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 중심에는 그가 서 있었다.


정국.


만나길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이 고대하던 만큼, 나 또한 FG 엔터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의 로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해 봐야 길 가다 선후배간 인사 한번 나누는 정도였지, 맹세컨대 오늘의 이런 당혹스러운 만남을 바란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찌라시를 읽던 와중에 찌라시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다니. 심지어 그 장면을... 빼도 박도 못하게 들켜버리다니. 웬만하게 미치지 않고서야 갓 올라온 신인으로서 이런 얼토당토 않은 구도를 원할 리가 없잖은가. 나는 이대로, 업계 탑아이돌의 눈에 단단히 찍혀 승승장구는 차치하고 이 바닥에서 순식간에 매장되어 차후 십수 년간 발도 들이지 못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 왜인지 그럴 듯해 속이 쓰렸다.


정적은 어쩔 땐 그 자체로 숨막히는 무안함을 불러오고는 한다. 옆면 거울을 흘깃 쳐다봤다. 반사된 위치에 그는 여전히 우뚝 서 있다. 없을 리가 없잖아, 아까부터 쭉 멈춤 없이 올라가는 중인데. 층마다 띄엄띄엄 올라가는 각진 숫자는, 기분 탓인지 뭔지 신식 모델 답지 않게 뭐가 상당히 느렸다. 체감상 두어 시간쯤은 된 것 같았다. 여기서 다행인 점이라고는 대표실의 층이 정국이 누른 층수와는 다르다는 점 뿐이었는데, 마냥 다행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와 같았다. 바로 밑층이다. 이나 저나 똑같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허공에 날려줬다. 그게 이 죽음의 정적을 타파할 무언가는 되지 못했으나, 한껏 경직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꽤 도움이 됐다. 그래, 문 열리자마자 바로 껐는데 못 봤겠지. 대충 그런 말로 자기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여즉 헤매는 정신으로 대표실 앞에서 소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늦었잖아. 그런가? 반사적으로 바라본 시간은 문자를 받은 후 고작 4분이 흐른 뒤였다. 나는 분위기를 풀 겸 소이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빌립 정국을 봤다는 얘기를 할까 하다가, 곧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너 남자 구경하느라 늦었니?' 볼멘소리를 들을까 봐서다. 그보다는 소이가 대표와 나눈 이야기가 궁금했으나, 느리디 느린 엘리베이터가 다시 아래에 닿을 때까지 전해들은 말이라고는 나중에 계약서로 보라는 기계적인 대답뿐이었다.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걸 괜히 물어본 듯 싶었다.




"정말 본 거예요? 진짜? 나 놀리는 거 아니고?"

"내가 너 놀려서 뭐 해."

"사, 사인은요? 아니 아니, 인사라도 해 봤어요? 받아줘요? 웃어요? 응원한대요?"




흥분하다 못해 바로 코앞까지 와버린 한설을 밀어내느라 혼났다. 때는 해가 다 떨어진 차 안. 활동기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라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행사에 모두들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때, 흘리는 얘기로 오늘 있었던 일을 꺼내니 그중 아주 곯아떨어져 있던 한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몰입하는 것이었다. 응원한다는 건 뭐야... 그냥 자기 바람이잖아. 나는 옆자리서 자고 있는 소이의 눈치를 살펴가며 쿡쿡 웃음을 참았다. 일단 벨트나 다시 매고 있어. 나중에 숙소에서 얘기해줄 테니까, 응? 별것도 아닌 목격담을 장황하게 털어놓는 양 하게 되어 내 스스로도 뻘쭘했지만, 저리도 기대에 부푼 낯에 대고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럽다, 나도 언니랑 같이 있었으면. 저 진짜 예에전에 연생 신분으로 몰래 콘서트 보러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이제 같은 회사니까, 자주는 아니라도 세 달에 한 번은 볼 수 있겠죠? 한설은 기껏해야 두 줄짜리 얘깃거리를 거진 사골이 나올만치 우려댔다. 머지 않아 꾸벅꾸벅 잠에 든 게 천운이라 여겨질 정도로. 까마득하게 늦은 밤, 잠귀에는 둔한 그녀와 같은 방을 쓰는 덕에 이때 즈음에는 혼자 있을 틈이 생긴다. 발코니 문을 조심히 여닫고는 통화 기록을 뒤적거렸다. 별이 쳐진 유일한 전화번호에서 오늘도 부재중 하나가 누적되어 있다. 일 때문이긴 하나, 아예 없는 시간도 아닌데 매번 넘기는 게 마음에 쓰이곤 했다.


뚜르르, 울리다가 금세 달칵. 받는 소리.




"어, 여주야."

"집이에요?"

"아니, 이제 막 일 끝냈지."

"진원이는?"

"자고 있으려나, 아까 전화는 했는데 안 받더라고."

"걔는 정말..."




난간을 톡톡 두드리는 손짓이 빨라진다. 이내 한숨을 푹 쉬다 멍하니 주차장 아래 정경을 본다. 낮에는 내색도 않던 가로등불이, 이렇게나 고요한 밤이 되어서야 눈부시게 환한 꼴이다.




"엄마는 어때? 돈 밀린 거 있어?"

"없어. 상태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그래... 그렇구나."

"여주야. 걱정 말고 네 일이나 열심히 해. 거기서 멋지게 잘하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알지?"




누가 몰라요. 알지. 아빠와의 통화는 딱히 이렇다 할 요지 없이 끝났다. 따지고 보면 가족간에 요지 있는 대화란 몇 없다. 그냥, 잘 살고 있는지, 상황은 어떤지, 필요한 건 없는지, 하는 것들. 이따금씩 정말 이게 맞는 건지 싶은 생각이 날아와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다. 어차피 이뤄놓은 것도 없는 김에 몽땅 다 접고 돌아가 다른 일에 손대볼까 하는 무능한 자신감이 되살아나지만, 그런 것들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남들 앞에 춤추고 노래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과 직면하면 바람 앞 촛불처럼 무용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 구부러뜨렸다. 리더는 무슨 리더야. 끽하면 이런 마음이나 품는데.






Bite Me

W. 연망







몸이 바쁘면 머리가 비워진다는 건 얼추 들어맞는 소리다. 각종 방송사를 도는 쇼케이스 공연과 홍보용 인터뷰가 몰아치던 3-4월달을 지나, 여기저기 외부 활동에 매진하다 보면 다음 컴백까지 약 3개월의 공백이 찾아온다. 표면상 휴식기 및 준비기간이나 프로필 촬영이니 곡 녹음이니 달말에 갈무리하지 못했던 과제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나 다름없다. 더욱이 우리 그룹은 계획에도 없던 회사 이전까지 일정이 겹쳤으므로 이제 와 스케줄이 터져나간다 해도 뭐라 할 건덕지가 없었다. 해도 누구한테 할 거야, 다들 바쁜 와중에. 물론 소이는 샵 직원이든, 스타일리스트든, 실장이든 눈치 보지 않고 아주 광범위하게 소란을 피우긴 했다. 아, 머리에 스프레이 많이 뿌리지 말라고 했잖아. 뭔 야외 무대하는 것도 아니고. 대개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추세였다.


늦춰졌던 일정이 되살아나면서, 우리는 회사에 아예 눌러 살다시피 했다. 한설은 내게서 전에 들은 바를 지겹게도 주절거리며, 우리가 만에 하나 빌립을 마주치게 된다면-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으나, 그게 당장 오늘일 줄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다. 간단한 시범 녹음을 위해 위해 제법 높은 층에 온 탓인지 그전에 안무실을 전전했던 날들보다는 제법 쉽게 그들과 마주쳤다.




"바잇미. 맞죠? 와, 반가워요."




붙임성이 남다르다고 해야 할지, 먼저 물꼬를 튼 건 갈색머리의 남자였다. 매너 좋은 손이 내밀어진 건 역시나 소이의 앞. 안녕하세요 선배님. 찰나에 저 손이 무안하게 내쳐질 최악의 수까지 생각했건만, 다행히도 오늘은 그녀의 컨디션이 꽤나 좋은 듯 싶었다. P 음료 광고 저도 봤는데. 소이님 이렇게 보니 진짜 연예인 같고 그렇다. 능청스레 구는 남자의 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명과, 또 말없이 장승처럼 서 있는 한 명이 차례로 보였다. 그건 한설도 알아차렸는지, 자꾸 팔꿈치로 내 명치 부근을 퍽퍽 치는 덕에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좋아 죽겠으면 인사라도 하는 게... 대화는 단촐했고, 그리 부담을 느낄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 분위기가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워 소이와 갈색 머리 남자의 스몰 토크가 끝날 때까지 복도에 붙어 잠자코 기다렸다.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면 꾸벅, 인사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photo

"전에, 엘베에서."

"......"

"아닌가."

"......"

"봤던 것 같은데."




그러나 세상 만사는 어쩌면, 늘, 항상.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혹여 눈이 마주칠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는 척. 부러 목소리도 내리깔았다. 저, 제가 이제 막 병원에서 와서. 켈록. 그러자 정국은 크게 변화 없는 표정으로, "아. 잘못 봤나 보네요." 하며 물러났다. 걸그룹 답잖은 걸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상대도 더 따지기는 커녕 별수 없는 것이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 지나고, 아주 한참 후에, 다연은 아까 봤으면서 왜 아닌 척 했는지 슬그머니 물어왔다. 이것 봐라. 나는 왜 자는 체 하며 내 얘기를 엿들었는지 되물었다. 곧,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에 냉랭한 분위기까지 달고 다녀 얼음 같던 양볼이 겉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아니, 까놓고 그 좁은 벤 안에서 안 들릴 리가 없잖아요! 나는 의자 뒤로 넘어가며 푸하하 웃었다.




"그때, 내가 인사를 못했거든."

"왜요?"

"그야... 뭐. 긴장해서."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이유를 대강 뭉갰다. 열애설 난 거 보다가 당사자한테 걸렸다고는 말 못하지. 더군다나 걸린 것도 확실치 않으니, 이 부분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어서 대충 힘들다, 피곤하다, 언제 끝나 하고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다연도 빠르게 동화되며 오늘의 스케줄이 얼마나 살인적이었고 고됐는지 일일이 나열하기에 이르렀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스무살인데. 귀로는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면서도 시선은 자연히 휴대폰에 가닿는다. 대표에게서 온 연락이다.





Bite Me






"그러니까, 내 말은."

"......"

"이참에 소이랑 같이 방송 나가보자는 거지."




촬영도 전이야, 멤버 확정되기는 멀었어. 지금이 최적이지. 안 그래? 8월에 방영이 시작되는 한 예능 프로그램 얘기다. 소이가 나온다던. 그외에도 배우 성준수, 프라이데이의 우진와 훈, 이미 밝혀진 구성으로도 제법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때에 굳이 나를 끼워넣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소이가 잘 적응하게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라는 뻘소리만 내리 해대던 그도 구색이 영 아닌 것 같았는지 금방 본심을 토로했다. 빌립 알지? 만났었다며. 나는 아직도 갈피를 못 잡은 어조로 머뭇거리며 네, 답했다. 너도 솔직히 소이랑 비교 많이 당하는 거 느끼잖아. 다만 그 말에는 심장이 천천히 내려앉는 듯했다.




"빌립 정국도 나온다니까, 그림 잘 만들어 봐."

"... 네?"

"특출난 게 없으면 인지도를 확 끌어모으면 돼."

"......"

"얼마 전에 났던 건 증거 없다로 시들해져서 사람들 관심 밖이고. 이렇게 된 거 여주가 한 번 잘 해보자, 어?"




손해보는 거 아예 없다고 할 순 없는데, 이번 기회로 뜨면 그거야말로 대박 아니야? 대표는 나를 살살 긁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홧김에 출연 의사를 얻어내려고 말이다. 속이 너무 훤히 보여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차피 자극해 봐야 떠날 데도 없어 관두지도 못할 테니, 새삼 당연한 것이었다.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쥔 손이 스르르 풀렸다. 그 말대로, 소이의 유명세가 부러운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죽었다 깨도 얻지 못할 것들이고, 굳이 누군가를 이용해서 반짝 빛나고 마는 일을 하라고 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결국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국과 엮여 보라'는 말에는 확답을 하지 않은 채 어영부영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간만의 외식은 요새 들어 얼굴 보기 힘든 소이도 합석한 자리였다. 분위기 불편해지게 티 안 낸다고 애는 써 봤는데, 마주본 채 앉은 유제만은 알아차린 모양이다. 언니, 아까 대표 만났죠? 진짜 힘들었겠다. 요즘 갱년긴지 뭔지 장난 아니잖아요. 어디서 들은 바가 있는지, 아니면 온전히 내 표정에서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그녀는 신청하지도 않은 대표 욕을 신랄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한설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유제 언니 술 마셨어요. 아하. 옆에서 좀 말리지. 나는 대강 납득했다.


좌석이 좁은 탓에 소이는 매니저 언니와 같이 구석 자리에 있었다. 한설은 특별대우라며, 저 자리는 분명 비싼 자릿세도 받을 거라며 뭐라 뭐라 하던데 솔직히 내 눈에는 훤히 트여 있는 이 테이블이 저쪽 구석퉁이 테이블보다 몇 배는 나아 보였다. 아마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겠지. 나는 가끔 가다 그 둘을 훔쳐보며 술 몇 잔을 홀짝였다. 아까 대표와 나눴던 얘기가 떠오른다. 굳이 출연이 예정된 소이에게 그런 역할을 맡게 하지 않는 까닭은 힘들게 발굴한 그녀의 스타성이 아까워서. 그리고 같은 맥락으로 봤을 때 그룹 내에서 포지션이 이도저도 아닌, 그저 리더일 뿐인 나를 일회용 카드로 쓴다는 건 도리어 이득이라서. 이쪽을 이용하면 잠깐 화제몰이로 방송 홍보도 되고, 그룹도 이전 소이의 영향력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대중들에게 좀 더 알려지게 될 게 분명하니 말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 내게도 적당히 좋은 일. 그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Bite Me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첫 예능이다. 2인 1조로 팀 꾸려서 하는 요리 프로그램이라던데, 여태껏 시도해온 바로는 요리에 딱히 재능은 없으니 뭐. 적당히 묻어가면 되렷다. 출연자들은 눈대중으로 추리자면 나를 포함 8명 정도 되어 보였다. 대여한 세트장에 촬영팀이 한 면에 분주하게 깔렸다. 나는 채소나 써는 게 다일 뿐인 방송에서 왜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 봐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소이의 전적인 요구로 이른 아침 샵부터 들러야 했다. 같이 출연하는 거에 대한 그녀의 감상평은,




"뭐 놀랄 일이라고. 매번 티나게 나 따라하잖아. 자존심도 없어서 대표님께 엎드려 빌기라도 했겠지. 같이 출연시켜달라고."




이하 생략. 그래도 오늘만큼은 소이의 뾰족한 목소리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일부분 맞는 말이기도 했고-엎드려 빌었다는 대목은 제하고-, 지금에 와서야 그것보다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맞은 편에 마이크를 다는 데님 셔츠 차림의 정국이 보인다. 이미 스텝진들의 몇 번의 사인 요청을 해결해주고 와 다소 지쳐 보이는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괜히...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이.


첫촬에는 굳이 힘빼지 말라는 대표의 지령이 있었다. 너무 대놓고 붙는 것보단, 은근히 쌍방처럼 보여야 한다나 뭐라나. 징그럽게 디테일하다. 하지만 그래봤자 팀원으로 붙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걸 알기에 나는 내심 안도하는 중이었다. 카메라와 재료 세팅이 끝나고, 위아래를 메운 조명 탓에 슬슬 얼굴에 열감이 올라올 때 즈음, 메인 피디가 큐 사인을 올렸다. 아나운서 출신 여성 진행자 한 명이 능숙하게 서두를 열고, 그 뒤로는 쭉 차례대로 소개를 하는 씬이었다. 둘 이상의 그룹으로 나온 출연자들은 나란히 있는 게 원칙이었는데, 때문에 얼떨결에 소이 옆에 내가 서게 됐다. 미리 받은 대본에 뭐라고 할지 적혀 있었으나 가뜩이나 중앙에 서 있는데다, 막상 실전으로 다가오니 죄다 얼버무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바잇미의 소이고,"

"바, 바잇미의 여주... 입니다!"




소이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여기저기서 맥아리 없는 웃음이 픽픽 샜다. 아무래도 지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것은 내 인생에 몇 없는 행운이지 싶었다. 안 그랬으면 당장이라도 '이것 하나 제대로 못하냐'며 도소이에게 날카롭게 한소리 들었을 테니. 조금의 텀이 지나고 남성 출연자가 연이어 자기소개를 했다. 빌립의 정국입니다. 그제야 나는 옆을 돌았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우연찮게도 자리 배치가 이렇게 된 것이다. 정중앙의 카메라를 바라보던 그는, 흘끔 이쪽을 눈질하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