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

__1922년 4월 28일
지민이 부러 태평한 척 술잔을 기울였다. 술맛이 달기만 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상기하는 것이 어리석을 만큼 재판은 결코 연준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허나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보석을 신청할 새도 없이 재판 날짜가 잡혔다. 이쯤 되면 그저 옥살이하라고 등 떠미는 꼴이 아닌지. 태현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려 애를 썼다.


“…살려야 합니다. 어떻게든……”
“재판 날짜는 언제입니까?”
“바로 내일입니다. 7시라 하더군요.”


지민이 머리를 쓸었다.


“담당 판검사는 누구라 하던가요?”
“그것까진……”
“경성의 판검사를 다 죽여야 하나……”


지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가 술을 권했지만 태현은 거절하였다. 홀로 마시기가 머쓱합니다. 지민이 부러 웃었다. 제가 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편히 드십시오. 태현이 말했다. 화제를 돌리고자 지민은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신문은 언제 발송될 예정입니까?”
“새벽.”
“이런.”


회선 동지의 걱정이 말이 아닌가 봅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거 보니. 지민이 또 웃었다. 태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막했다. 담백한 표현이었다. 허나 태현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그것뿐이지 싶었다. 술집의 종이 울렸다.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호석이었다. 패랭이를 쓰고 색동옷을 입은 그는 지민과 태현의 탁자로 직진하여 다가왔다.


“여서 다들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잉!”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따, 회선 슨상님 때깔이 안 좋으네예. 뭔 일 있어야?”


태현은 일부러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있던 호석이 저만치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지민과 태현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 하나가 가득 넘치도록 술을 따른 다음 태현의 앞으로 밀었다.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역력한 호석의 얼굴 덕에 태현은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본디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데 술로써 견딜 수 있는 상황이란 있기 마련인 듯 하였다. 호석은 태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동지가 내일 재판을 받게 되어서 그럽니다.”


우습게도 내 과오인 듯 하여서. 내 면회소에서 그리 망설이지만 않았으면,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의에 참석시켰더라면 달라졌을까 해서 답지 않게 울적하군요. 태현이 말했다. 호석의 입이 시옷으로 쳐졌다. 쓸쓸한 태현의 얼굴에 호석은 잠시 그 왜소한 몸을 안아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참. 호석 씨에게 들었습니다. 학당을 세울 계획이시라고요.”


태현이 말했다. 지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땅한 곳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저와 상의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회선 동지는 지금 이대로도 일제의 눈 아래 있잖습니까. 이 이상 움직일 생각 하지 마십시오.”


더는 활동하지 마십시오. 딱 지금 뻗치고 있는 곳까지만 힘쓰란 말입니다. 동지께서 위험해지면, 대한청년회는 어찌 이어간단 말입니까.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그토록 죽음을 갈망하는 자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하고픈 말이 많았으나 지민은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러나 태현이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을 모두 알았음을 지민은 느낄 수 있었다.




윤기는 정국을 바라보았다. 한창 사격 연습을 한다고 산 전체를 뛰어다니고 있는 그를 보며 새삼 제 나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10년만 더 젊었더라도. 그러나 윤기는 곧 허황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부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번에 일본군이 행군하는 곳이 어디라 했지?”
“반고개를 넘어 땅새바위 쪽으로 간다 했습니다. 반고개에서 기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부관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고개는 만주에서 서리가 가장 늦게 사라지는 지역. 그러니까 지금쯤이면 온통 진흙밭이 되었다는 말이다. 폭탄 수레를 싣고 가는 일본군은 토박이를 앞잡이로 세우지 않는 한 반고개의 특성에 대해서 알지 못할 터, 그렇게 되면 수레의 무게에 짓눌린 바퀴가 진흙밭에 파묻혀 행군이 더디게 될 것이다. 또한 지표면에 닿는 면적이 좁아 압력이 큰 징 달린 신발도 행군을 지연시키는 요소가 되겠지. 윤기는 부관에게 전투 준비를 하라고 귀띔하고서 정국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대장님!”


정국이 퍼뜩 뛰어왔다. 넘어진다, 새끼야. 윤기가 말했다. 달음박질해 윤기의 바로 앞에 선 정국은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가 정국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다시 경성에를 다녀와야겠다. 괜찮지?”
“저야 좋습니다!”


정국이 벌써부터 들뜬 모습으로 소리쳐 대답했다. 윤기는 정국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래, 어서 가서 더 연습해라. 내일 새벽에 떠난다. 정국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서 저만치로 뛰어갔다. 윤기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래 양심이란 게 있지.”


반고개의 특성은 어찌 보면 양날의 검이었다. 아군과 적군 모두 체력 소모가 심하니 말이다. 총을 잡은 지 7년이 넘었지만 윤기는 여전히 정국이 불안하였다. 아비 된 마음으로 그는 정국을 더는 만주에 두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당사자만 모르는 이사가 계획된 것이다.



__1942년 4월 29일
범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를 죽이려 한 것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할까, 독립을 위해 힘쓰다 실패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해야 할까. 둘 다 아니라면 지금까지 동료들에게 제 가족을 숨긴 것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할까.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이 없었다.


“나...최용준(저…최연준 동지)-”
“그렇게 고뇌할 필요는 없어. 이미 짐작은 하였으니.”


범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연준을 마주 보았다. 하루 새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범규는 연준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버거웠다. 입술은 다 터져 피딱지가 앉았고 긴 머리카락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런 몰골에도 오히려 태평한 쪽은 그쪽이었다.


“엔도 야마토. 내가 경성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발견한 사람이 그대 아니야.”
“……”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해주에서 도망쳐온 스물넷과 갓 성년이 된 청년의 만남은 비 오는 날 담벼락에서이었다. 범규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음에 온 연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뭐……그런 상황에서 지금까지 우리를 밀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 했다 생각해.”
“… 배신… 이게 들리지 않나요(배신감이…
“그대에게 배신감 들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어.”
“……頑張ってください. どういうわけか同志を引き出します.(버티고 계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동지를 빼내드리겠습니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만 가봐야겠네. 연준이 먼저 일어섰다. 그의 손이 얼핏 보였다. 손톱이 다 빠진 그의 손은 끝이 모두 보기 흉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괴이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범규는 옥을 나와 그 길로 바로 조선 총독부 건물로 향했다.




“이건 누군가. 엔도가의 장남이 아닌가.(이게 누군가. 엔도가의 장남 아닌가.)”
“지로 총독은 그동안 건강했습니까? (지로 총독은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로 총독은 껄껄 웃으며 가배를 내오라 말했다. 범규는 여유롭게 총독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일본인의 태가 났다. 마치 미리 준비해놓은 듯 총독부의 여직원이 가배를 내왔다. 지로 총독은 성급하게 가배를 마셨다. 그의 출신이 훤히 보이는 몸짓이었다. 가배를 마시는 자가 술을 마시듯 하고 있다니. 경박스러움은 감투로도 감출 수 없는 것인가. 범규는 속으로 생각했다.


“そう、遠藤大和がここまで来た理由は何か? (그래, 엔도 야마토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감옥에 채영준이라는 자가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형무소에 최연준이라는 자가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너의 정보력은 알아주지 않으면. 충의를 살해하려고 했어?”


범규는 가배를 잠시 음미하는 척 총독을 살폈다. 지로 총독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계심이 없는 듯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 오히려 잘 되었나. 경계심이 없을수록, 자만심이 높을수록 이 이야기에 잘 꾀어들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가배 잔을 내려놓은 범규는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급한 이야기는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최근 폐사에서 보낸 무기는 마음에 들었습니까?
“너의 아빠 회사의 물건은 언제나 최상의 품질을 자랑해.
“별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용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까. 당사는 앞으로도 대일본 제국에 견고한 충성을 보이겠다고 약속드립니다.(그렇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봐라.(그러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역시, 총독은 출신 답게 빠른 본론을 원했다. 그 ‘부탁’을 어린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시하는 투가 그대로 드러났다. 범규는 조금 더 가배를 마시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총독이 그렇게 본론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네요.(총독이 그렇게 본론을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채영준의 무죄를 보증해 주세요. (최연준의 무죄를 보증해 주세요.)”
“뭐라면?(뭐라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옛날,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별것은 아닙니다.
너의 아버지를 해치려고 한 사람이지만 괜찮을까? (자네 아버지를 해하려 한 자인데, 괜찮겠나?)”
“그런 암살자는 우리 엔도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그까짓 암살자 따위는 우리 엔도가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범규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총독은 여직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으니까. 지금 이 대화를 위해 범규는 투쟁단의 단원들이 기지에 없는 시간까지 계산하고 중요한 자료들은 미리 빼돌려 숨겨 놓았다. 무엇보다 지금 이 배신 아닌 배신을 위해 그는 하루종일 괴로워 하고 또 괴로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형량이 12년의 죄수를 석방하는 것은 나도 어렵다.(그래도 형량이 12년인 죄수를 석방하는 것은 나도 어렵네.)”


총독이 턱을 문질거렸다. 벌써 형량까지 모두 정해놓았단 말인가. 분명 저들이 이룬 업적에 신이 나서 총독에게 그 주둥아리를 나불거렸겠지. 범규는 자신이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았던 패를 내려놓으며 약간의 한숨을 지었다. 이 패를 내놓는 것이 가족과 동료들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설령 누군가 붙잡힌다 한들, 다시 석방시키면 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안심시켰다. 다행히도 총독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내가 밀정이었던 것은 아십니까?(제가 밀정이었던 것은 아십니까?)”


총독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는 부친의 명으로 그간 한 독립운동 단체에 밀정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경성 미라보 호텔입니다.(경성 미라보 호텔.)”
“…!”
“그 안에 그들의 비밀 기지가 있습니다. (그 안에 그들의 비밀 기지가 있습니다.)”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내보인 범규가 싱긋 웃었다. 이제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총독이 자신의 부관을 부르는 동안 범규는 여러 가지 변수들과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경성 미라보 호텔에 군대를 집결시켜라! (경성 미라보 호텔로 군대를 집결시켜라!)”


창백한 얼굴로 총독이 명령을 내렸다. 황색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뛰쳐나갔다. 잠깐, 아직은 안 됩니다. 범규가 손을 들어 군사들을 막았다. 이 패를 내놓은 이상 제게 뭔가를 주셔야죠. 평화롭던 기지에 일본 헌병이 들이닥친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의심할 자는 뻔하지 않습니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그의 표정은 마치 협상의 대가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총독이 다가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으니 말이다.


“그렇네, 야마토군,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그래, 야마토군, 원하는 것이 뭐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