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언어
© 2023 방탄내사랑 All right reserved.그 누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형형색색 다양한 모양과 색깔들, 그러나 모형만 보일 뿐 모든 것이 무채색이라면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겠지.
감정을 느껴도 어떤 감정인지 인지하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웃어도 왜 웃는지 알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도 슬프고 아프다는 걸 모른다면 어떨까?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분명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무슨 낙으로 살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예전에 나에게 그런 답을 주었다면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내가 감정을 느껴도 무슨 기분인지 알지 못했었으니까.
나에게 세상은 무채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 어떤 감흥도 들지 않고 의미도 없었다. 그런 내게 내려졌던 병명은 '감정표현 불능증'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나의 감정의 퍼즐을 하나하나씩 제자리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알게 된 시점은 부모님의 장례식이었다. 두 분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는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세찬 비바람이 쏟아지던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를 하시던 부모님. 거센 빗줄기에 반대편에서 매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당시 내 나이는 7살, 나란히 놓여 있는 부모님의 사진 앞에서 절을 하고 절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우는 거지, 나도 울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품에 꼭 안으면서 '이 어린 것들을 두고...' 하면서 토닥여주는 사람들에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것을 게워낼 것만 같았다.
"여주야, 괜찮아."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며 말하는 오빠. 그런 그도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고작 10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근데 오빠 엄마랑 아빠는 어디 가고 사진만 있어?"
".... 두 분은 아주 멀리 좋은 곳으로 가셨어."
"언제 오는데?"
"... 못 오셔. 이제 오빠가 여주의 엄마고, 아빠야."
다시는 오지 못한다는 오빠의 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심장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오빠, 나 심장이 너무 아파."
무슨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아픈 심장과 동시에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심장이 욱신거리면서 아프면 그건 슬픈 감정인 거야."
슬픈 감정...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잃고 나서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슬픈 마음이라는 걸.
"그럼 엄마, 아빠는 이제 어디에도 없어?"
오빠는 나의 손을 내 심장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같이 계실 거야."
그날 이후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돼버린 우리를 할머니께서 거둬주셨다. 그전에도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할머니께서 우리를 자주 봐주셨어서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울어야 할 일에 웃거나, 가끔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내가 걱정되셨던 할머니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그곳에서 내가 '감정표현 불능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성에게서 느끼는 두근거림을 설렘으로 생각한다면 감정표현 불능증인 사람은 그 두근거림을 부정맥이나, 심장에 이상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병명을 달게 된 그 이후로부터 오빠는 날 따라다니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설명하여 알려주었다. 한창 친구들과 노는 게 가장 좋을 나이일 텐데, 나 때문에 오빠는 자신의 행복마저 버려둔 것이었다. 그런 오빠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내가 오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오빠는 귀신이 있다고 믿어?"
"음... 아마 있지 않을까?"
"그럼 귀신을 보게 된다면 무슨 기분이 들 것 같아?"
"사람마다 다르지만, 난 신기할 것 같아. 여주는 어떨 것 같아?"
"온몸이 움츠라들면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것 같아."
어디든지 귀신을 볼 수 없는 곳이라면 다 좋을 듯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귀신들을 보면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몸이 떨리고,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꽉 감게 된다.

"그건 두려운 감정이야.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온몸이 떨리거나 경직되고는 해. 되도록이면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 중의 하나지."
"오빠는 뭐가 가장 두려워?"

"내가 널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
이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오빠에게 난,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이제는 오빠가 나의 두려움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의 가족인 오빠마저 내 곁을 떠나버릴까 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날 옭아맸다.
그 두려움의 감정이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을 난 알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도 생기는 거라고.
..........
질풍노도의 시기, 반갑지 않은 사춘기가 찾아오는 그 시절,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이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은 나의 첫사랑은 같은 학년 다른 반 학생이었던 남자아이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호기심이었다.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두려워서 항상 혼자 다니는 나와는 정반대로 훈훈한 외모에 친절하기까지 해 많은 아이들의 우상이자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그 아이가 궁금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마다 그 아이의 반까지 찾아가 살며시 보곤 했었다.

항상 웃는 얼굴의 정국을 (그 아이의 이름이라고 했다.)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저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느끼는 기분이 무슨 감정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지.
매일 정국이를 보러 찾아간 지도 어느새 한 달 남짓, 항상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던 정국이 보이지 않아 학교 여기저기 찾아 헤매다가 이제 더 이상 쓰지 않는 음악실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다가갈까, 말까 한쪽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든 건, 흐느끼는 소리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 조금 사이를 두고 앉은 나는 앞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시전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 같대."
내가 말을 시작하자 정국이는 무릎에 파묻혔던 고개를 들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
"난 감정을 느끼지만 무슨 감정인지 인지하지 못하거든. 난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닌데, 그렇게 부르면서 손가락질할 때마다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
"조금씩 내가 느끼는 감정을 무슨 감정인지 배우고 있지만, 아직도 난 내 감정이 너무 어려워."
"많이 힘들었겠다."
"...그랬었지. 근데 지금은 괜찮아. 내가 이런 걸 그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니까."
"이젠 내가 알게 됐으니까, 애들한테 말해줄게."
"아니, 그러지 마. 누군가가 날 안쓰럽게 보면서 동정하는 건 날 사이코패스라 욕하는 것보다 더 싫어."
"...미안,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네."
"그렇지 않아. 날 위한 네 마음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난 너 자신을 먼저 챙겼으면 좋겠어."
슬퍼서 흘린 눈물범벅이 된 정국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
"네 웃는 얼굴도 좋지만, 아프고 슬플 때도 혼자서 삼키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나눴으면 해."

"나의 약한 모습을 보면 다들 실망할 거야."
"널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거야."
내 말을 들은 정국이는 안 그래도 큰 두 눈을 초롱초롱거리면서 내 두 손을 꼭 감싸 잡았다.
"고마워. 네가 감정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심장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거림과 동시에 두근거렸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그럼 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알려줄 수 있어?"
"그래, 무슨 기분이 드는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리다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데."
내가 느껴던 그 감정은 다름이 아닌,

"...설레는 감정이 아닐까, 싶은데."
정국이를 지긋이 바라보니, 귀가 빨개져 있었다.
"자세히 말하면 어떤 건데?"
내 질문에 정국이는 날 자신에게 당겨 품에 가뒀다.
"지금 무슨 느낌이 들어?"
"ㅇ,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면서 찌릿한 전율도 오고,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아."
"그게 설렘이라는 감정이야. 나도 지금 너랑 같은 느낌이 들고 있거든."
설렘, 사실은 난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인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챈 건 이미 파란만장한 사춘기 시절을 지나 고학년에 올라왔을 때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했던 나는 정국이의 도움으로 많은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평범한 아이들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울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날 위해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줘서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