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이의 존재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단서는커녕 짐작 가는 것 하나 없는 상태였다.
추리 수사물 주인공도 단서 하나는 가지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나는 추리 수사물 주인공도 아닌 데다가 따라갈만한 단서 하나도 없으니 찾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그래서 단서는 찾았니?”
“전혀.”
연습이 끝나 비어 있는 동아리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날 보는 춘옥이 시야에 들어왔다.
높임말 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틀 만에 그녀에게 말을 놓고 말았다. 이유는 굉장히 터무니없다. 그녀가 장난을 친다고 세 번쯤 날 놀라게 했을 무렵에….
“아니이이!! 놀랐잖아, 적당히 해액!!”
그렇게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가고 말았고, 그 김에 그냥 말을 놔버렸다. 말을 놓으니 오히려 좋아하던 눈치기도 해서 차마 모른 척하기도 뭐했고.
정신적으로 살짝 지쳐버려서 빨랫감 널리듯이 의자 위로 널브러져 앉아 있으려니 양손을 뒤로 모은 채 고개를 쭉 내밀어 나를 보던 춘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생각하면 머리 아프다? 머리 좀 식혀. 걔는 어디서 잘못될 정도로 약한 애는 아닌 것 같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귀신의 직감? 그 애는 기운이 조금 남다르거든.”
“전혀 모르겠는데….”
내가 하민이한테 느껴지는 거라고는 ‘덩치는 큰데 순둥한 개냥이 같은 후배’ 같은 겉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표현뿐이다. 저런 판타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안 그래도 오늘은 머리 좀 식혀보려고.”
“좋은 생각이네! 근데, 그건 뭐야? 열심히 보던데.”
춘옥이 내가 꾹 쥐고 있는 공연 전단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살짝 구겨진 전단지 끝부분을 다시 반듯하게 펼쳐서 그녀에게 보여주며 답했다.
“공연 전단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인디 밴드가 뚝섬 공원에서 공연하거든.”
“밴드라면 악단 같은 거지? 너희가 하는 것처럼 여러 명이 악기 들고 합 맞추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들?”
“맞아. 동아리 멤버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
공연 포스터를 가져와 관람 제안을 한 건 예준이 형이었는데, 마침 전에 홍대에서 버스킹 하던 것을 보고 관심 있게 지켜본 인디 밴드였었다.
공연 시간 전에 뚝섬역에서 만나기로 해서, 집에서 간단하게 밥 먹고 슬금슬금 갈 계획이었다.
“재밌겠다. 여기 학교에서 멀어?”
“지하철 타고 조금 가야 하는 정도?”
“북적거리는 곳은 항상 조심해.”
“에이, 사람이 그렇게 많은 대중교통 한복판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겠어?”
그리고 이 말이 플래그가 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거다.
* * *
“다녀왔습니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니,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던 동생 녀석이 손을 휘적거리며 반겨줬다.
방에 짐을 놓고 사복으로 환복 후 나오니, 동생은 눈동자만 굴려 나를 힐끗 쳐다보곤 물어왔다.
“어디 가?”
“엉. 동아리 모임 있어서 밥 먹고 나가.”
“엄마랑 아빠 오늘 늦을 것 같대. 김치볶음밥 해주라.”
“그럼, 설거지는 네가 해라.”
요리, 설거지 분배가 깔끔하게 끝나자, 냉장고에서 찬밥과 김치통을 꺼냈다. 집게와 가위로 김치를 자르고 있으니,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프라이는 반숙으로 Even하게 익혀주시고 마무리로 치즈를 얹어 불맛을 입힌 후, 파슬리는 GOAT하게 뿌려주세욤.”
“굶고 싶다고?”
대체 저런 이상한 소리는 어디서 배워온 거지. 아직도 초딩보다 유치한 동생에게 꿀밤을 먹여주고 싶은 걸 참고 김치 위로 밥을 투척했다.
김치볶음밥이 별거 있나. 식용유로 볶은 김치 위에 밥 넣고 볶으면 그게 김치볶음밥이지.
“야, 채봉준!! 다 돼가니까 놀지 말고, 상 차려!”
“수저 놓으면 끝인데, 뭘 차릴 게 있어?”
스마트폰을 배 위에 놓고 고개만 쭉 올려 날 보는 동생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반찬은 안 먹게? 그릇에 동치미 담아와.”
“김치볶음밥에 김치 먹고 싶어?”
“김치볶음밥이랑 동치미는 별개의 음식이야.”
김치볶음밥 먹는 중간에 살얼음 살살 도는 새콤달콤한 동치미 국물 한 번 마셔주면 입안이 개운하게 싹~ 내려가는 게 얼마나 끝내주는데, 그걸 몰라? 아삭아삭한 무 한 입이면 그게 반찬이지. 맛알못 같으니라고.
질린 얼굴을 한 녀석이 일어나 그릇을 들고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곧이어 동치미가 식탁에 올라오고 수저가 놓일 때쯤 반숙 프라이가 딱 맞게 완성됐다.
“난 그냥 프라이팬에 줘. 설거지 귀찮아.”
그렇게 한 손에는 그릇,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들고 식탁으로 갔다. 의자에 앉은 동생이 냄비 받침대를 본인 앞에 알아서 잘 놔뒀기에 그 위로 프라이팬을 올려놓았다.
김치볶음밥 위에 올려진 프라이 노른자 부분을 숟가락으로 푹 갈라 옆으로 살짝 움직이니, 반숙으로 알맞게 익은 노른자가 흘러내려 밥 위를 고소하게 적셨다. 크, 맛있겠다.
“맞다. 형 나갈 때 은호 형이랑 같이 가는…. …무슨 동치미를 막걸리 마시듯 마셔?”
“크으-”
동치미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감질나잖아. 그릇째 들고 들이키는 게 국룰이지. 나만 그러나? 아닐 텐데.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비운 동치미 그릇을 뒤집어 머리 위로 탈탈 털고 있으니 황당하다는 눈빛이 돌아왔다.
“어, 뭐라고? 은호가 뭐?”
“이따 나갈 때 은호 형이랑 같이 가냐고.”
“아니? 따로 가서 뚝섬역에서 보기로 했는데. 왜, 걔한테 할 말 있어?”
“할 말이 있는 건 아닌데…. 형 요즘 무슨 일 있어?”
“은호? 별일 없는데?”
“은호 형 말고.”
“…나?”
턱 끝으로 날 가리키는 봉준이의 행동에 얼빠진 표정이 절로 지어졌고, 확인차 검지 손가락 끝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다 먹은 그릇을 한데 모으면서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 형이 걱정하더라. 요즘 좀 불안해 보인다고, 무슨 일 있냐며 나한테 물어보던데.”
“…은호가?”
“진짜 무슨 일 있어?”
겉은 투박하지만, 속은 걱정이 섞여 있는 동생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조급하고 불안하게 군 것이 겉으로 티가 났나. 내가 워낙 거짓말도 못 하고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성향이다 보니 은호가 바로 알아본 거겠지.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말하냐고.’
은호야. 사실 우리 기억에서 지워진 숨겨진 우리 동아리원이 있어. 유하민이라는 애인데, 성휘예고 학생이지만 1학년인 너보다 어린 애야.
…라고 운을 떼는 순간 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형, 병원에서 상담 한 번 받아보자.’라고 진지하게 권해올 것이 분명하다. 나 같아도 은호가 그런 소릴 하면 똑같이 반응했을 테니까.
“아…. 요즘 새로 연습하는 곡이 있는데,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와서 좀 스트레스였거든. 그게 보였나 보다.”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으니, 머리를 긁적이며 태연한 척 거짓 변명을 했다. 눈을 가늘게 뜬 봉준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알겠다며 설거짓거리를 들고 싱크대에 갔다.
안 들켰겠지? 나는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고, 물티슈로 식탁 위를 쓱쓱 닦은 다음 휴지통에 던져넣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럼 난 간다. 설거지 잘해놔.”
“엉.”
현관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고 나니, 아까 동생의 물음이 다시 생각났다.
달라진 내 감정을 알아차릴 정도로 티가 많이 났나, 이래서야 내가 하민이의 대한 일을 계속 숨길 수 있을까? 홀로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다 보니 머지않아 지하철에 도착했다. 개찰구에 찍을 교통카드를 꺼내 들며 앞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까맣고 동그란 뒤통수,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런 뒷모습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겠지만, 어째서인지 저 너머 지하철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하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 유하민!”
그걸 깨닫자마자 냅다 그를 따라 지하철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서늘한 지하의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울 무렵, 주변이 평소보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 왜, 아무도 없지?”
서울 지하철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살짝 올라온 소름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몸을 움찔하며,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동안 그렇게 만나고 싶었어도, 코빼기도 볼 수 없던 하민이가 미소 지은 채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 진짜 하민이야?”
“쉿. 선배. 자세한 건 이따가 얘기해줄 테니까. 이쪽으로 좀 올래요?”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하며 주변을 둘러본 하민이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를 따라나설 뻔했다. 세 발짝 걸음을 떼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챘다.
“채봉구 선배?”
“너 누구야.”
요동치는 심장이 상황을 깨닫자마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촉이 좋지 않은 나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선-”
“하민이는…! 날 선배라고 안 불러.”
하나, 기억나는 첫 만남 때부터 형, 형. 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오던 녀석.
“그리고 채봉구라고도 안 부르고.”
둘, 본인 이름도 성 붙여서 부르면 삐지는 녀석인지라, 우리를 부를 때도 항상 이름만 불렀던 애다.
“무엇보다…. 하민이는 날 그렇게 안 쳐다봐.”
셋, 당장이라도 날 공격할 것 같은 기분 나쁜 눈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세 걸음 물러나며 경계하니, 하민이의 얼굴을 한 그는 놀랐다는 듯이 눈을 끔벅이다 이내 피식 웃었다.
“아…. 진짜….”
뭐가 그리 웃기는지,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리던 그는 섬뜩한 눈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이걸 들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