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1. 여우비

장래희망모아봉
2021.12.28조회수 63
"안 울었다."
"울었잖아요, 아까."
"글쎄 안 울었대도 이놈이."
청연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이렇게 시치미 뗄거면 안 보이게라도 울던가.
"가만 보면 연준은 이름이 참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맨날 울기만 하고. 저 아래 사는 여우가 비웃고 갈 정도예요."
동자의 말을 무시하던 연준이 마지막 문장에 몸을 움찔거렸다.
"연준이 아니라 연계여야 했어. 밝은 구름에서 먹구름이 되지않고 영원히 밝은 구름이게. 안 그래요? "
연준이 동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동자는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지 그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연준의 눈에는 묘한 빛이 서려 있었다. 후회, 분노, 사랑.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탁한 색을 띠었다. 동자는 연준의 이 눈빛을 정말 싫어했다. 더 이상 툴툴거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갈 곳 잃은 안쓰러운 그의 눈동자가, 보면 볼수록 참 마음이 아팠다.
"연준 때문에 옷이 다 젖었잖아요."
점점 기어들어가는 그의 목소리는 곧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한참 말이 없던 연준이 동자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금방 그쳤잖니. 보아라, 벌써 다 말랐구나."
연준이 고개를 숙이며 동자가 말한 저 아래 산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근처 묘지를 어슬렁 거리는 여우의 꼬리가 희미한 형태로 그의 눈에 담겼다. 언준은 눈썹을 내려트리며 씁쓸한 미소를 걸쳤다. 덕분에 동자는 흠뻑 젖은 제 양말이 보이지 않느냐고 토를 달지 못했다.
"동자야, 옛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네가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란다."
"해봐요. 들어나 보죠, 뭐."
-
“언제였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내가 연준이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이었을 게다. ”
“원래는 연준이 아니었어요? ”
“조용히 해라 이놈아”
사람들은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산을 무척 무서워했다. 그곳에 사는 구미호가 젊은이들을 홀려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차라리 구미호에게 간을 먹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썩을놈! 지금 네가 밥이 넘어가느냐!"
나는 생선 대가리에 얼마 붙어있지도 않은 살점을 앞니로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었다. 아까 말동이가 마당에 놓인 쇠그릇에 던진, 주인 어른께서 잡수다 남긴 음식물 찌꺼기였다. 또, 이 집 도련님이 데리고 온 잡종 개의 점심거리이기도 했다. 나는 개가 다 먹어치우기 전에 하나라도 건지자 싶어 냉큼 음식물에 손을 담갔다. 물이라도 만 것인지 손에서 느껴지는 걸쭉하고 미지근한 감각이 정말 더러웠다. 대충 잡히는 건더기 중 가장 큰 것을 건져 올렸는데 그것이 생선 대가리였던 것이다. 어찌나 야무지게도 발라 드셨는지 눈알이랑 껍질 빼고는 먹을 것이 없었다. 이것도 밥이라고, 나는 그만 지나가던 도련님께 걸려 된통 얻어 맞고야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종살이를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어떻게 죽어도 좋은 죽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참하게 몽둥이질 당해 죽는 것만큼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짐승의 밥이라도 되면 그들의 푸짐한 한 끼가 될 터이니 괜찮겠다 싶어 뒷산으로 향했다. 구미호를 찾아갈 심산이었다.
마른 잎과 잔가지를 밟는 소리가 이렇게나 컸던가. 오로지 달빛에 의존한 채 오르는 산길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잠시 쉬기 위해 흙바닥에 주저앉았을까, 그때. 그때 그녀를 만났다. 그 여우 아가씨. 여우 아가씨요? 그래. 당아라는 여인이었지.
"말짱한 분이 이곳엔 어쩐 일이답니까? 그것도 모두가 잠든 이 야심한 시각에 말입니다."
"아…. 구,구미호가 있다고 하여…."
"여우 말입니까? 그렇다면 나를 말하시는가 보군요."
아주 이상한 여인이었다. 혹, 사람으로 둔갑한 구미호인가 싶기도 했다.
"그,그러면 어서 내 간을 드시오. 차라리 빨리 숨통을 끊으시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래도 내 마지막이 주인마님의 손에 달려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나의 간을 먹고 배부른 구미호가 한동안 마을에 내려올 일은 없겠지. 구미호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니 나는 이만하면 좋은 죽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깔깔깔! 내가 그짝을 왜 죽인답니까. 나는 구미호가 아니라 청연이라고 합니다. 주인 아씨께서 그렇게 부르셨습죠."
"그럼, 왜 여우라고…."
"사람들이 나보고 여우 같은 기지배라고, 꼬리 아홉개 달린 구미호라고 그라지 뭡니까."
그녀도 나와 비슷한 처지인 듯 했다. 일순간 드는 동질감에,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아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연준. 여우라고 불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때 나는 멍청하게도, 아무것도 몰랐단다. 알았다면 지금 이렇게 울고 있지 않겠지.
어느새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챙기기 시작했고, 그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해 연모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명백히, 내 마음속에 고인 사람이었다. 하여 나는, 그녀라는 특별한 꽃을 다른 이들의 욕망으로부터 가리고 있는, 청연을 괴고 있는 구름이었다.
그녀 덕분에 웃는 날이 많아졌다. 날이 갈수록 내 얼굴색이 환해지니 어느 날 청연이 내게 이리 말했다.
"그짝은 이름이 없으니께, 지가 지어주겠심더. 항상 웃고 다니는 것이 미소 는 어떻습니까?"
"미…소?"
"하하, 농입니다요. 그리 싫으십니까? 허면, 연준은 어떻습니까. 그짝은 참말로 밝은 사람이어요. 그란데, 가끔 같은 이가 맞는지 싶을만큼 캄캄~할 때도 있습죠."
"이어질 끝맺음이라는 뜻입니까?"
"좋지요? 영준."
좋네요, 연준. 청연이 있기에 이어질 끝맺음. 그녀가 내 빛이니까, 그녀와 함께할 때에만 밝은 구름일 테지. 나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볕뉘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어야 할 아침이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청연의 새하얀 얼굴이 타지 않도록 손차양을 만들어주었어야 할 아침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어두웠다. 먹구름이 잔뜩 껴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게다가 내 옆에는 온기 하나 머금고 있지 않은 산초가 축 늘어져 있었다.
청연이 없었다.
옷매무새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나는 산 아래를 달려 내려갔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었던지라 몇 번이고 휘청였지만 상관없었다. 발걸음에 속력이 붙어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어도 멈추지 않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날카로운 바람에 얼굴 곳곳 생채기가 나도, 헐떡거리며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정녕 내가 아는 청연이란 말인가. 흑빛 머리칼은 깔끔하게 말아 비녀를 꽂아 놓고, 예쁜 모란을 가득 수 놓은 활옷과 그에 어울리는 화관을 쓴 그녀. 화룡점정으로 빨간 연지곤지까지.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서 내게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는 신랑.
아…. 가만히 있다가 호랑이 놈한테 빼앗겼구나. 사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청연은 노비가 아니었던가? 하기야 노비 치고는 주제 넘은 이름이긴 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주인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녀가 사용하는 말투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들은 잡스러운 단어들이 한데 모인 것처럼 영 어색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녀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을까. 내가 지킨 꽃에게서 배신 당하고 싶지 않아서? 모르겠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 그녀에게 내어주었음에도 내게 남은 것은 그녀밖에 없었다. 사랑이라면 사랑, 분노라면 분노. 어찌 되었든 전부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애써 천한 말투를 구사하기 위해 머리 좀 많이 굴렸겠구나.
멀리서 둘의 혼례 잔치를 지켜보았다.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가만 보니 내가 모시던 주인어른도 와 계셨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숨 죽이고 있었을까 청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뒤에서 살랑살랑 여우 꼬리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신랑이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얼굴. 이런…. 호랑이가 우리 도련님이었구나. 허탈했다. 차라리, 이대로 회색 구름이 되어 영영 그들에게 햇빛이 닿지 못하도록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그리고 때마침, 비가 내렸다. 아침에 보았던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슬픈 빗물. 나의 눈물이 하늘에서 뚝뚝 쏟아져 내리는 것이리라. 당아야, 너의 고운 새색시 한복을 내가 젖히고 있다. 보이느냐. 나의 울분이 보이느냐.
-
"그래서 맨날 우는구나. 이제는 그만 울어요."
"동자야. 오늘은…."
호랑이가 장가 간 날이요, 여우가 시집 간 날이로세. 내가 반드시 울어야 하는 날. 울어서 태양을 가려야 하는 날. 바로 그날이란다.
-
“오랜만이네.”
아무런 것도 없다. 공허감마저 결국엔 텅 비어 사그라지고, 듣는 이 하나 없는 방백은 어느 곳에도 닿지 못했다. 연준은 추위에 옹송그린 손으로 너덜거리는 청연을 쓸었다. 허리를 펴고, 다리를 뻗을 공간조차 없이 엉망인 이곳에, 청연은 여기에 있었다.
미련해, 미련해…….
연준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계속 중얼거렸다. 마지막 남은 청연의 겉면에 케케묵어 눅진한 먼지를 걷어내면서. 두 번 접지된 청연의 편지는, 차갑다 못해 냉랭했다. 잠깐이라도 청연의 온기가 거쳐갔던 것이 맞는가 의심하고플 정도로. 때문에 서글펐다. 편지 군데군데 얼룩진 눈물 자욱은 분명 청연의 흔적인데, 그런 흔적에서조차 더 이상 청연을 찾을 수 없이 된 지금이, 그리고 그런 청연을 끝끝내 붙드는 미련한 그 자신이 연준은 미웠다.
연준은 얼굴을 편지에 처박았다. 이 퀴퀴한 냄새는 네가 아니다. 합리화하며... 이 종이는 향기를 잃었다. 주인이 흘린 눈물의 마지막 물기마저 날아간 그때, 종이는 비로소 주인을 놓아주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네가 없다. 고작 백색지 따위도 너를 잊었다. 이제는 내 차례가 아닌가 연준은 생각했다. 머리로는 분명 잘 알고있으면서도…….
원망.
연준을 뿌리부터 집어삼킨 그 어둑한 늪은 갈 곳 없이 여기저기를 방황했다. 본인의 감정일 텐데, 주객전도를 일삼는 이 늪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그를 먹었다. 연준은 스스로를 탓하기 바쁜 나날을 보내고 나면, 차라리 이 그림자에 깊게 빠져서라도 청연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것이 청연이 준 아픔이라면, 그는 그것에 먹혀서라도 청연에게 안겨있고 싶어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일뿐이라고. 그 가장자리에 희뿌연 거울이 보인다. 이윽고 비치는 것은 그저 어둠일 뿐인 그의 모습. 연준이 청연을 바랐고 또 그리는 이유는 그런 연준 때문이다. 청연처럼 환한 빛을 마주한 연준은, 그 빛에 가려져 자신을 잃을 수 있었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청연과의 공멸이나, 그의 희생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준의 욕심을 위해 님의 곁에 머물렀고, 그런 님은 끝내 산산히 부서졌다는 것. 누군가는, 원래는 청연이 항상 연준의 잘못이 아니라며 말해주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연준은 청연의 붕괴가 내 탓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너는 빛이고, 나는 어둠이니까……. 우리는 결코 상생할 수 없었던 거야.”
*
『있잖아. 빛은 어둠을 가리고, 어둠은 빛을 가린다면. 둘은 서로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거 아닐까?』
아니. 어둠에겐 그럴지 몰라도 빛은 아닐걸. 넌 나 없이도 완벽했으니까…….
『너는 또 아니라고 답하겠지. 하지만 꼭 완성이 아니더라도 말야.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는 말처럼, 둘은 하나가 있다면 꼭 다른 하나도 있어야 하는 쌍둥이 같아. 마치 운명공동체처럼. 꼭 너랑 나 같다. 그치?』
…….
『그런데, 빛을 가리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빛에 가려지면 뭐가 생길까?
빛에 가려지면... 음... 그 속이 뭐일지는 몰라도, 빛으로 뒤덮일 거니까.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어둠이라면, 빛으로 가렸을 때 더이상 어둠이 되진 않을 거 같아.
빛에 가려진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닌 거니까.
너도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