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보고 싶어.”
“······.”
“너랑 손잡고.”
아무리 이상한 말이더라도 늘 매일같이 하던 말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 탓이었을까. 서서히 감겨오는 눈을 수긍한 채로 잠에 빠져들고 난 후에는 항상 네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집에 나 혼자 있었던 것처럼. 방에 정적이 맴돌았다. 여전히 매트리스에서는 습기를 먹은 꿉꿉한 향이 가득했다. 비 내리는 아침,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섰다. 이제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네가, 날 떠나기라도 할 일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오만에서 비롯된 우리의 사랑이 이토록 애타는 인연을 만들어 냈음을.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 𝐖𝐎𝐑𝐓𝐇 𝐈𝐓
작년 이맘때쯤 편의점에서 산 투명 우산의 물기를 도서관 입구에서 털어대고 있었다. 함께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료 사서가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서서 말을 걸어왔다. 지난밤은 어땠냐며, 새벽에 치던 번개를 보았냐는 둥 그는 늘 나에게 날씨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날의 기후와 같은 심정을 가지기라도 한 듯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차분하다가도 날이 화창해지면 쉴 새도 없이 방긋방긋 웃으며 도서관 곳곳을 걸어 다녔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비가 내렸기에 그의 기분을 내가 전부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잔잔하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로 타고 들어올 때면 딱딱하고 부드러운 그의 저음이 우리 집 매트리스를 연상시켰다.
“오늘 신간 들어와서 정리해야 해요.“
“좋네요.”
“저도요. 비가 오는 날에는 유독 종이 향이 강해지거든요. 벌써부터 두근거리네요. 이 문을 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 찬 채로 날 반기고 있을 테니까요.“
그와 대화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는 정말 세상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사상과는 달리 그는 늘 이 세상에 우호적이었다. 누구는 귀찮다고 여길 수도 있는 신간 정리를 매달 손꼽아 기다리고,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질서 없이 놓고 간 책들도 카트를 끌고 다니며 하나씩 모아 책과 책 사이, 알맞은 자리에 꽂는 것을 좋아했다. 시립 도서관임에도 창가 곳곳에 사비로 채운 얇고 긴 꽃병들이 여럿 놓여있는 그의 감성. 나조차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장소와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 그리고 자신의 것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끔 보면 태형 씨는 문학 같아요.“

“저도 제 세상이 문학이었으면 좋겠어요.”
펄럭이는 그의 코트에서 우드향이 났다. 코끝이 아릿한 그의 향이 내 속을 온통 뒤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문학이다. 여름 끝 무렵, 나의 하루를 애태울 울창한 문학. 아침부터 너무 속 느글거리는 소리만 했냐며 멋쩍게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세상을 부러워했다. 나도 김태형의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어. 김태형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할 말을 속으로만 삼키고서 그를 뒤따랐다.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맡아오는 새 책의 향과 곳곳에 놓인 풀꽃의 은은한 내음. 이토록 완벽한 직장에서 저리도 특이한 사람과 일한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다. 벌써 3년은 되는 것 같은데도. 너를 잊은 후부터 보이는 그가 단숨에 날 사로잡아 여태껏 그의 곁을 맴돌게 만들고 있다. 착한 줄 알았는데 내 마음속에 살면서 월세 한번을 안 내네, 같은 인터넷 주접이 머릿속을 붕붕 떠다닐 때쯤, 내 시선을 채우던 그가 나에게 손짓했다.
“신간이요.”
“아, 새 책 냄새.”
“너무 좋아요, 하루 종일 책 위에 코를 대고 싶을 만큼.”
두 남녀가 새 책이 담긴 박스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평생의 흑역사로 손 꼽힐 정도였다. 당시에는 향에 취해 알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이 다시 생각해 보면 꽤나 우스운 꼴이었다는 것을 자각하자 귀끝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도 지금 상황이 웃긴 상황임을 알아차렸는지 살짝 웃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풀꽃이 자라나는 것 같았다.
에어컨 덕에 찬 공기가 흐르는 도서관, 그는 입고 있던 코트를 지정된 자신의 의자에 걸쳐놓은 뒤 신간을 정리했다. 그가 신간을 정리하는 사이 그와 나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던 즈음, 그의 가방에서 무언가 반짝 빛났다. 팬던트인가. 회중시계일 수도 있으려나. 그 물건에 빛이 반사된 이후로 계속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해 고민했다. 몰래 꺼내서 보느니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아직 아침이라 사람이 없는 적적한 도서관에서 그를 불러 물었다.
“태형 씨 가방에 있는 거 뭐예요?”
“가방이요?”
“네, 그 무슨 팬던트 같은···.“
“아, 형 유품이에요.”
왜일까. 질문에 미적지근하게 답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생기 넘치던 눈동자가 차게 식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책을 정리하던 그가 이후로 동작이 굼떴다. 괜히 물었나. 짐을 마저 정리하고 그의 옆에서 신간 수량을 확인했다. 눈은 책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그로 가득할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들어오는 사람들에 카운터에 앉았다.
아까 내 질문에 대한 김태형 씨의 반응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역시 괜히 물은 게 분명해. 힐끗거리며 그의 동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다른 느낌. 내 탓인 것 같아 자책하기 마련이었다. 하필이면 발견한 물건이 친형 유품이라니. 정말 운수도 좋네. 그나저나 이상하게도 물건이 무척 낯에 익었다. 내 지인 중에 죽은 사람이 있었나, 없는 것 같은데. 아니면 백화점에서 본 걸까. 팬던트 하나 때문에 머릿속이 대체 얼마나 망가지는 건지. 신간 정리를 마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과해야겠다. 본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태형 씨, 아까 팬던트 얘기 꺼낸 거···.“
”네.“
”죄송해요. 유품인지 모르고 괜히 물은 것 같아서요···.“
”아, 괜찮아요. 모르셨으니까.”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아마 정말 괜찮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떡해, 진짜 너무 죄송한데. 괜히 옆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던 그가 적막한 도서관의 흐름을 깨지 않기 위해 안면근육을 멋대로 구기며 웃음을 참아냈다. 진짜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걸 보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별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하고, 대출증을 만들고,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책을 정리하고···.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까 그가 몸을 반으로 접으며 숨죽여 웃었던 뒤로 그와 눈만 마주치면 웃음이 나와 꽤나 고역이었다. 카트에 놓인 책을 하나씩 꽂다가 잠시 카운터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을 때는 정말이지, 웃지 않으려고 해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

“······.”
“······!”
난 매일 밤 잠에 들기 전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을 자주 느꼈다.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고, 내 곁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만나고 난 후에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만일 정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더라도, 이 사람 하나만 나와 함께한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이 공간에 우리만 남은 것처럼 깊은 눈동자가 맞닿았다. 이게 사랑일까. 당신과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심장이 빠르게 튀는 탓에 가슴팍에 꼭 안고 있던 책이 웅웅 울렸다. 우리 아무래도 사랑인가봐. 한참을 바라보던 서로의 눈동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돌아갈 쯤에야 정신을 제대로 갖출 수 있었다.
“사랑···.“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도 코끝이 시큰했다. 왜 이러지. 난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만 꺼냈을 뿐인데. 이유 모르게 눈가가 붉어지는 걸 느끼고 소매로 얼굴을 부볐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해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행복한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괜히 이질감이 들어 입가를 겨우 올려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
***

“이 골목 맞아요?”
“네, 조금 좁죠.”
“괜찮아요. 길이 좁으면 제가 뒤에서 걸어가면 되죠.”
하늘이 어두워지고, 시간대가 저녁에 가까워지던 시점, 일을 마친 그와 내가 도서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본래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는 한참 비가 내린다고 했다. 이전 계절을 잊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려는 의미일까. 그래도 여름이 다 지나갔는지 비가 오는데도 습하기 보다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당연히 좋으니 편하신대로 하시라는 뜻을 담아서.
“혼자 사세요?”
“아뇨, 같이 사는 남자 하나 있어요.”
“남자···랑 같이 사신다고요···?“
”네, 그냥 어느새 같이 살고 있더라고요.“
쓸데없이 얼굴도 잘났고, 웃음 코드도 잘 맞고, 내가 집에 올 때까지 홀로 집에 남아서 기다리면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볼 수 없는 그 사람. 매일 밤 매트리스에 누워 아무에게도 하지 못할 속 이야기들을 다 털어 놓으면서도 정작 이름은 모르는 그 사람. 그에 대한 설명을 짧게 꺼냈음에도 태형 씨는 여전히 당황한 눈치였다. 발랑까진 애로 보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 사실 그에게 댈 핑계도 없는 것이, 정말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이상해요. 나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 정작 난 그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는 게···. 조금 억울하죠.”
“아니요, 하나도 안 이상해요.“
”왜요?“
”그야···.“
대화가 끊겼다. 그와의 대화는 이런 분위기를 자주 유지한다. 그 누구보다 편하게 대화를 하다가도 내가 어떤 한 질문을 하면 대화가 멈춘다. 마치 그가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혹은, 내가 그의 생각을 모르고 있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 이상하게도, 이 와중에 아침에 본 팬던트가 자꾸 머릿속에 남았다. 대체 그게 뭐길래 나에게 이렇게나 긴 여운을 주는 걸까.
”혹시 형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본 팬던트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요. 제 지인인가 싶어서···.“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까 내가 팬던트의 출처를 물었을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이제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가 나로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자 그가 내 입술을 살짝 건드려 힘을 풀게 했다.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
“··· 내일 뵈어요.“
그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다만 나중에 얘기하자는 것도 그였고, 시선을 거두고 먼저 발을 뗀 것도 그였다. 분명 난 우리가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람 마음 하나 가지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데 가뜩이나 가진 것도 없는 나는 사랑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머리가 복잡해 골이 울렸다. 두 눈을 꼭 감고 현관문을 열자,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서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원래 8시면 집에 있을 시간이잖아.“
”미안. 잠깐 태형 씨랑 얘기 좀 하느라···.“
”그 사람이랑 요즘 잘 돼?“
”잘 되는 것 같다가도 방금은···. 아 몰라. 자기 전에 얘기해줄게.“
좁은 방 한 켠에 놓인 책상에 편의점 음식 여러 개가 올려져 있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도 모를 특이한 모양의 간식들이 가득한 봉지까지도. 그리고 항상 빼놓지 않는 커피 사탕까지. 어쩜 매번 이리 래퍼토리가 같은지 슬슬 질려가려던 참이었다. 의자를 끌어 책상 앞에 앉자 그 역시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앉았다.
”신상이야. 전주 비빔밥이래.“
”삼각김밥에 신식이고 구식이고가 어디있어. 그리고 전주 비빔밥은 몇 년 전에 출시 됐는데 무슨 신상···.“
”아, 그런가. 나한테는 신상이었는데.“
방긋방긋 웃어대는 통에 화를 낼 수도 없는 꼴이었다. 속 편하게 웃으면 좋냐. 비닐을 벗겨낸 삼각김밥을 크게 한 입 물었다. 전주 비빔밥 삼각김밥은 그래도 되게 오랜만에 먹는 것 같다. 내가 예전에 먹었던···. 먹었었나. 가물가물한 기억에 씹는 속도가 느려지자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태형이라는 사람, 어때?“
”응?“
”너한테 잘 해줘?“
”잘 해줘. 집에도 데려다 주고, 눈만 마주치면 웃고···. 그 사람 보다보면 이게 사랑인가 싶고. 행복해.“
”다행이다.“
”뭐가?“
”그냥 여러모로. 네가 사랑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남자가 책상에 엎드린 채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부러운 눈빛을 하던지, 그런 슬픈 눈으로 보면서 무슨 다행이고 자시고. 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온 건지 알 턱이 없다. 제일 이상한 건, 왜 내가 이 남자에게서 익숙함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내가 왜 처음 본 이 남자가 무턱대고 집에 들어 앉았는데도 쫓아내지 않았는지.
“넌 대체 누구야?”
“응?”
“이름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네가 내 삶에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왜 난 아무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는 거냐고. 매번 생각하던 거야. 넌 대체··· 뭐야.“
“굳이 지금 얘기해야 해?”
여전히 생글거렸다. 혼자서만 팔자 좋게 웃는 모습을 보니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챙겨준 커피 사탕까지 전부 먹어치우고 나서야 잘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내가 이 모든 걸 하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어떤 물건도 만지지 않고 그냥 그저 그렇게 앉아있기만.
방 불아 하나씩 툭툭 꺼질 때마다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그리고 그뒤로는 한참을 대화만 했다. 태형 씨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도서관이나 오늘 날씨, 그리고 팬던트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무슨 팬던트냐고 물으니까 형 유품이라고 말하더라고. 괜찮다고 하시긴 했는데 난 손끝 떨리는 것도 다 봤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말 실수 한 거겠지···.”
“······.”
“야, 자?”
“아니. 그냥 생각.”
“무슨 생각.”
“너랑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흔한 레스토랑도 가보고 반지도 끼워보고 결혼도 해보는, 그런 생각.”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 몸이 고장난 것처럼 손가락 하나까지도 움직일 수 없었다. 뭐지. 마치 아까 그 순간, 태형 씨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에 느끼던 오묘한 감정. 그가 겨우 울음을 참는 눈으로 웃으면서 내쪽으로 돌려 누웠다.
그리고, 그날은 처음으로 그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나의 집. 한참을 말하던 그가 내가 잠든 줄 알았는지 잠시 감은 내 두 눈을 만졌다. 사실 만진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서. 다만 움직임으로는 만진 것이 확실했다. 그는 내 눈가를 만지면서 또 어제와 같은 말을 했다. 다만 어제보다는 조금 길게.
“꽃이 보고 싶어.”
“······“
”너랑 손도 잡고···.“
”······“
”너를 정말 오래, 함께 사랑하고 싶은데 정작 나는···. 내가 부탁한 일이고 네가 행복하길 바래서 한 일임에도 왜 나는 자꾸···.”
“······.”
“질투가 나지.”
말을 이어갈수록 그의 목이 메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만 또 내뱉다 말을 멈췄다. 그가 잠든지 조금 지나고 나서야 두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좁게 누워있지. 안쓰러운 마음에 나 홀로 덮고 있었던 얇은 이불을 그에게 덮었다. 그러자 남은 일은 경악. 그뿐이었다. 그는 이불을 덮지 못했다. 내가 그를 향해 아무리 주먹을 날려도 그는 깨지 않았다. 나의 손과 이불들이 전부 그의 몸을 통과했으니까.
”야···.“
”······?”
”당장 나가. 나 지금, 지금 손 떨려서 말도 안 나와.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왜, 아니 갑자기 왜.“
”너··· 사람 아니잖아···.“
그의 모든 신체가 내 말에 동요했다. 눈은 사시처럼 흔들렸고 손끝은 떨고 있었으나 그가 등 뒤로 감췄다. 당황하기만 하고 정작 집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 그에게 당장 나가라며 얼마 없는 내 소지품들을 전부 그에게 던졌다. 그마저도 다 통과되는 바람에 방 바닥에 마구잡이로 던져진 물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제발 나가라고, 나 네가 너무 무섭다고.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는 짓무른 눈가로 문을 열지도 않은 채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섰다.
난장판이 된 집 한가운데 앉아 힘이 풀린 다리를 멍하니 바라볼 즈음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는 내가 바삐 움직일 때도 어떤 물건을 만지지 않았다는 것도, 매일 밤 선풍기 바람이 머릿결이 스치지 않았던 이유도. 한동안 모든 밤을 사람도 아닌 것과 같이 지냈다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잠을 자긴 글렀다. 결국 창문 틈새로 햇빛이 들어올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출근 준비를 했다.
사람도 아니면서 왜 내 저녁을 매일 챙겨주고 내 이야기도 매번 들어줘.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정적. 매일 아침처럼 네가 없는 적막한 집이 오늘따라 울적했다. 그래서 울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지만 그저 본능이었다. 정말이지, 아주 우울한 아침이었다.
***
적적한 아침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하기야 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 감정 없이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참에 태형 씨가 보였다. 빠르게 걸어오는 발걸음과는 달리 얼굴에는 괜한 불안함과 어색함이 가득 들어찼다. 다만 그런 그의 변화들을 신경 쓸 틈이 없던 나는 멀리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서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에 당황한 그가 나를 다급하게 따라잡아 함께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다행히 비는 안 오네요.“
”그러게요.“
”얼굴 보니까 잠 잔 얼굴은 아니고.“
평소처럼 날씨 이야기로 가볍게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에 그가 내 몰골을 알아채고는 말을 멈췄다. 지난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알아챌 틈도 없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하고, 그의 눈에는 여전히 나만이 담겨져 있었으니까. 내가 어젯밤 일을 이 사람에게 말해도 괜찮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아무래도 이 일을 나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방대한 일인 것 같아 말 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같이 산다고 했던 남자 있잖아요.”
“네.”
“사람이 아니었어요.”
앞뒤 내용 없이 무턱대고 결론한 말하자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찼다. 사람이 아니라니, 그럼 뭐길래. 심지어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모든 걸 설명했다. 나와 함께 살던, 나와 함께 하루들을 보내던 그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를 그가 겨우 이불 하나 못 덮는 존재였다는 것을.
절대 흩날리지 않는 긴 생머리를 가진 그 남자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내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똑한 코에 나긋한 목소리까지 가졌으면서 나와 손끝 하나 스칠 수 없는, 그런 사람. 태형 씨는 그런 그를 묘사한 내 말들을 하나씩 듣더니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아주 복잡한 눈으로.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 형이 배우였거든요. 그렇게 연기를 좋아하는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거의 매일을 길에서 전전하면서 살았어요. 편의점에서 살다시피 했고, 각종 알바란 알바는 다 했어요.“
”······“
”그리고 아주 오래, 형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연기하고 싶다는 그 꿈 하나로 목숨까지 바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터 형이 웃음이란 웃음은 전부 얼굴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살고 있는 거예요.“
”네.“
”솔직히 조금 화가 났어요. 형이 배우가 되기 위해 쏟은 돈과 꿈, 그리고 희망들 중에 내 것이 절반은 있었을테니까. 그래서 한동안 형을··· 미워했어요.“
길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당시에 있는 것처럼 조금씩 웃으며 말했다. 치기어린 나머지 본인보다 잘난 형을 시기했던 그의 과거 속에 성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말하는 내내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가만히 두질 않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교차되었다. 깜짝 놀란 듯 싶으면서도 더 굳게 잡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궁금했어요. 대체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형이 행복해 보이는지. 그래서 한번은 형 집을 제 발로 찾아갔어요. 형은 당연히 좋아했죠. 네가 여긴 왠일이냐며. 형 집은 집이라기엔 너무 작았어요.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도, 좁았고.“
”마치 제 집처럼요?“
”그 집이에요. 형이 살았던 곳. 당신과 형이 함께했던 장소.“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내 집이 태형 씨의 형의 집이라니. 그래서 내가 어제 그 골목길로 데려갔을 때 놀란 눈치였었나. 그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그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는 것처럼. 하지만 난 그 집에서 남자랑 같이 지낸 적이 없다. 그곳에서 누군가랑 같이 산 기억은··· 그 사람뿐인데···.
“혹시 태형 씨가 말하고 있는 사람, 사진 있어요?”
“팬던트에 있어요.”
그가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팬던트를 내 두 손에 쥐어줬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뒤 조심스레 팬던트를 열었다. 왼쪽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말린 풀꽃이, 오른쪽은 나와··· 그 사람. 태형 씨의 형, 그리고 내가 어젯밤까지 함께하던 사람. 눈가가 붉어졌다. 그의 오른 뺨과 내 왼쪽 뺨이 맞닿은 채로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내 연인이었구나. 내가 어제 매몰차게 보낸 그 사람이, 내 옛사랑이었구나.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입술을 깨물자마자 어떤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마치 댐 한 부분이 무너진 것처럼 기억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아마 이번 작품 들어가면 돈 좀 생길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안 그래도 요즘 경기도 안 좋아서 걱정 많이 했는데.“

“근데 너 또 입술 깨물었어? 그거 진짜 안 좋은 습관이라니까. 이에도 안 좋고 입술도 다 트고. 하지 마, 진짜.”
“아, 그랬나. 네가 말한 뒤로 계속 신경 쓰긴 했는데···.“
”무의식이 무섭지 뭐. 여튼 그래서 이번에 돈 들어오면 너랑 꽃이나 좀 보러갈까 해서. 너 지난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곳.“
“벚꽃 보러 가자고? 진짜?”
“아마 촬영 끝나면 봄 중순 정도 될 것 같아. 어때, 좋아?”
“당연하지. 너랑 같이 하는 건 뭐든 좋아.”
“나도.”
“······.”

“나도 좋아. 너랑 하는 건 전부.“
김석진. 그 사람의 이름. 정말 내 머릿속 댐이 무너지기라도 한 건지 수많은 기억들이 쏟아지듯 가득 채웠다. 너랑 사랑을 말하고, 영원을 기약하고, 행복을 수놓던 날들이 딱 죽기 직전처럼 밀려왔다. 내 모든 마음을 바친 것처럼 슬프게 울자 태형 씨는 그저 나를 꽉 껴안았다. 괜찮을 거라고. 쥐고 있던 손은 놓은지 한참이었다. 그가 내 머리를 감쌌다. 여전히 그의 후드티에서 우드향이 번졌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한껏 박고 울어댔다. 딱 한번만 더 너를 볼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내 남은 생을 전부 버릴 수 있는데. 와중에 입술 깨물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 깨물지도 못했다. 죽고 싶다.
“당신이랑 형이 여행 가기 전 날, 나한테 형이 찾아왔었어요. 이번 작품 찍고 번 돈이라면서 나한테 돈을 한가득 쥐어줬어요. 그리고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고, 덕분에 자기 삶이 행복해 질 수 있었다며 여행 다녀오면 나에게 소개 시켜주겠다고 당신 사진 보여주면서 말했었거든요. 되게 행복한 얼굴로.”
“······“
“그래서 알았어요. 당신 얼굴. 형 장례식에 없길래 왜 없지, 싶었는데 형 사인이 교통사고였더라고요. 당신은 병원에 있었고. 혹시 그날 기억 나요?“
기억 나냐고? 당연히. 김석진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돈 벌었다면서 예쁘게 웃으며 집에 들어와 나를 꼭 껴안던 것도. 바로 다음 날 벚꽃을 보러 버스를 타고 축제가 한창인 곳으로 가다 사고가 난 것도. 오른쪽 창문으로 반대쪽에서 오던 버스가 거세게 달려오고 있던 것도. 난 김석진을 보고 있는 탓에 그 버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나와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그 버스를 보자마자 나를 꽉 껴안아 자신과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는 내가 창을 보지 못하게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았었다.
”야, 왜 이래···! 여기 공공장소야···!“
”사랑해.”
갑자기 왠 사랑고백이냐 묻기도 전에 큰 굉음이 울려퍼졌다. 버스가 전복되었던 것도, 그의 등에 박힌 유리 때문에 그를 안고 있던 내 손에 피가 잔뜩 묻었던 것도 전부 기억난다. 연기 나는 버스 속에서도, 전신 중에 피가 안 나는 곳이 없음에도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날 확실하게 보호한 탓에 내가 다친 곳이라고는 이마에 살짝 박힌 유리 두 점과 타박상 정도였다.
“석진, 석진아. 석진아, 너 피가 너무···.”
“너랑 꽃 보고 싶었는데···.“
그의 눈이 감겨왔다. 제발 이대로 죽지 말라고, 나 버리지 말라고 그의 뺨을 부여잡고 울면서 소리쳤지만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포근한 비누향.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네 향이 비릿한 피 향과 뒤섞여 역한 향을 만들었다. 나도 너랑 벚꽃 보고 싶었는데. 전복된 버스 바깥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벚꽃이 흩날렸고, 햇살은 따뜻한 그저 그런 한 봄날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 날에, 너를 잃었다.
”저 집에 가보면 안 될까요? 혹시, 혹시 모르잖아요. 만약에 석진이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가보셔도 괜찮아요. 원래 당신도, 이 팬던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 미안해요.“
”전 당신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3년 내내 당신에게 언질 하나 하지 않았잖아요. 원래 이 사랑은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예요.“
”······“

”얼른 가봐요. 늦겠다.“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내 습관이 옮았는지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부터 우드 향이 나는 후드와 부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선선한 가을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는 것도. 그래도 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난 김석진을 찾아야 한다. 그게 내 업보고, 내가 해야할 일이다. 여전히 깨물고 있는 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금방 올게요.”
“응. 기다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를 뒤로하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내 말 잘 듣지도 않았으면서 설마 내가 나가라는 말에 벌써 사라졌겠어,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신경 쓰였던 태형 씨도 어느덧 내 머릿속 한켠에 미뤄져 있었다. 그로부터 등을 돌린 나를 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잠시 드는 생각에 발걸음이 늦춰졌다. 안 봐도 뻔했으니까. 괜히 뒤쪽을 바라봤다. 금방 다녀오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시 너를 향해 나아갔다.

“그만할까, 진짜.”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는 것도 모르고.
***
저 멀리에 우리 집을 향하는 좁은 골목이 보였다. 저 골목에 낙서도 많이 했었던 것 같은데. 과거를 자각하고 나면 평소에는 그저 골목이었던 곳이 어느새 추억이 되어있다. 급하게 뛰는 와중에도 골목 끝자락에 적힌 낙서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배우 김석진’이라는 내 필체로 적힌 낙서와 ‘나의 사랑 나의 삶 김여주‘라고 적힌 너의 필체. 눈가가 마른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촉촉해졌다. 쭈그려 앉아 낙서를 그리던 그때. 그때까지 우린 분명 함께였는데 지금은 왜 나 홀로 이렇게 앉아있는 건지.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바지를 탈탈 털고 일어났다. 지금은 과거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현재에 충실해야 하니까. 어느덧 문 앞까지 도착해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사실 문을 열기가 두렵다. 문을 열었는데도 네가 없다면 내 세상이 부서질 것 같아서. 두 눈을 꾹 감고 입술도 꽉 깨문 채로 현관문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의 내가 너무나도 증오스러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쥐고 있던 손잡이에 힘을 실어 거세게 문을 열었다.
”······“

”··· 미안.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석진아.”
”응?“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방 중앙에 멍하니 서있는 너.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얼마나 고맙고 미안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너에겐 그게 중점이 아닌 듯 했다. 어제 윽박까지 질러가며 내쫓아놓고 뻔뻔스레 방에 들어앉은 건 아닐까 걱정스럽고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자 마자, 네 표정이 일그러졌다. 의문스러운 표정과 함께 젖어오는 네 눈가가 마치 아까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너 내 이름··· 기억해? 언제부터···?“
”넌 대체 얼마나···. 내가 태형 씨 얘기 할 때 화라도 내던가 왜 넌 그걸 다 듣고만 있었어. 난 여전히 너 하나면 이렇게 무너지는데 넌 왜 그걸 듣기만 해.“
”너 설마 나···.”
“기억해. 기억한다고 미친놈아. 너 혼자 가니까 좋아? 난 이제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꼭 깨문 입술이 나와 닮아있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다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주보는 너와 나는 얼마나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더 내 마음을 후벼파는 건 너의 옷차림이었다. 넌 여전히 사고 당시 그 옷에 머물러 있으니까. 그리고 난 그걸 의심하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너는 내 삶에 무턱대고 들어와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 내 사랑이니까.
“안고 싶어.”
“알잖아, 못하는 거.”
”근데 네가 울고 있잖아, 그것도 내 앞에서.“
”너도 울고 있잖아. 내 앞에서.“
서로의 꼴이 속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살짝 웃었다. 여전히 내 방은 싸늘하고, 사람 하나 없는 방처럼 외롭지만 너 하나만으로 내 세상이 가득 찼다. 네 향이 그립다. 네 온도, 네 손, 네 품, 너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 알싸한 마음에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그렇게 한참을 적막을 잇다 그가 먼저 말을 뱉었다.
“꽃 보러 갈래?”
“근데 지금은 가을인데···.”
“원래 가을이 봄 다음으로 꽃 피기 좋은 계절이야. 코스모스도 있고, 국화도 있고 가을에 피는 꽃이 얼마나 많은데.“
”국화는 좀 빼줄래?”

“여튼 진심이야. 오늘이 마지막이거든.“
”뭐가 마지막인데.“
”널 볼 수 있는 날. 그래서 작별 인사라도 하고 내쫓기려고 했는데 네가 날 알아채버렸으니까···. 네가 내가 떠난 후에도 힘들어할까 걱정이 많이 되네. 의사가 사고 때문에 기억 못할 거라고 했었는데 완전 돌팔이야, 진짜.“
오늘에서야 알아챘는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전히 고치지 못해 입술을 깨문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네가 당황하면서 왜 또 우냐고 다가와 내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아니, 닦으려고 했다. 그의 손이 날 통과해버려 쓸모 없는 짓이었지만.
”꽃 보러 갈 거지···?“
”가자, 어디든 가자.“
현관문을 열자마자 핸드폰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을 검색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솔체꽃이 한가득 피어있다는 곳을 향해 택시를 잡았다. 난 문을 열고 뒷자석에, 넌 문을 열지도 않고 뒷자석에 앉았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손을 네 쪽으로 뻗었다. 비록 잡지는 못했지만 너의 손이 내 손과 겹쳐져 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잡지도 못하는 손을 한동안 겹쳐두었다. 손 잡는 기분이라도 나게.
“난 너랑 벚꽃 보고 싶었는데.”
“그럼 봄까지 나랑 있어주면 되잖아.”
“그러게. 그러면 되는데. 내가 네 옆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
”그게 어렵네···. 그게 어려워.“
솔체꽃 사이에 파뭍혀 대화를 나눴다. 태형 씨 이야기, 도서관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들. 네가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했던 이야기, 그날 적었던 낙서가 아직 남아있다는 그런 작고 소소한 이야기들. 내가 너를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우리의 대화가 일방적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전히 미안함이 남았다.
”그리고 말이 좀 그렇긴 한데, 나 버려도 돼, 여주야. 네가 일해야 할 시간인데도 나랑 있다는 건 아마 태형이에게도 다 말했다는 뜻이겠지? 태형이, 내가 죽기 하루 전날에 찾아가서 잘 부탁한다는 말 때문에 널 챙기기 시작한 것 같긴 한데,“
”응.“
”걔 진짜 진심이야. 적어도 네가 나에게 매번 들려주던 말만 들어도 그래. 나도 얼마 본 적 없는 태형이의 웃음을 넌 매일 보잖아.“
”······“
”그거 사랑이야, 여주야. 너랑 태형이 지금 사랑하는 거야. 난 너희가 아주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사랑했으면 좋겠어. 죽은 사람한테 미련 남기지 말고.“
“그치만···.”
“무슨 말인지 알지? 나도 너 사랑해. 근데 여기까지만 하자. 태형이에게 말했듯이 너한테도 전하고 싶어. 태형이 잘 부탁해. 상처도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타는 애야.”
“······.”

“난 네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거짓 하나 없는 진실된 말로만 가득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거부감 드는 내용이었다. 나도 안다. 나와 태형 씨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다만 태형 씨가 네 동생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는 더이상 예전처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차오르는 눈물에 두 눈을 감지 않으려 했다. 이젠 진짜 그만 울고 싶었거든. 꽃 구경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뒤숭숭한 마음이 계속 되었다. 널 버리라고. 널 오늘에서야 되찾았는데 버리라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널 버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힘들어지는 것은 너일테니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볼 수 없을 날 걱정하는 것이 너에게는 가장 힘든 일일테니까.
택시에서 내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즈음 네가 나를 불렀다. 도서관까지 데려다 준다며 도서관 쪽으로 발을 맞췄다. 하여튼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번 결정하면 끝을 보려고 하는 게 참 변함없다고 생각했다. 난 아직 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넌 이미 마치고도 남은 것 같다.
“너 나 사랑하지···?“
”당연하지.”
“근데 넌 이미 나한테 아무 감정도 안 남은 것처럼 굴어···? 적어도 우리가 사랑한다면 남은 시간 동안만은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잖아.”
“내가 매일 그러고 싶었어. 무턱대고 너의 집에서 지낸 것도 그렇고 난 늘 널 사랑하고 싶었어. 난 알아. 네 곁에서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너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랑 함께라면 뭐든 좋은데···.”
“나도.”
“······.”

“나도 좋아, 여주야.”
대화를 나눌수록 후회만 가득했다. 이전의 대화와 겹쳐지는 기분이 들어 더 묘했다. 내가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널 이렇게 보낼 필요도, 너의 결정이 여기까지 다다를 일도 없었겠지. 네 눈동자에 담긴 깊은 심연이 나를 밀어냈다. 억지로 밀어내려는 마음만 가득한 채로. 그래서 난 밀려났다. 불가항력이니까.
한참을 조용히 걸어가다 도서관이 보일 정도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잠시 바람 쐬러 나온 건지 도서관 문 앞에 놓인 작은 계단에 앉아있는 태형 씨가 보였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한숨을 두 번씩 쉬는 걸 보니 다시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태형 씨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던 너는, 오히려 더 슬픈 눈이었다. 어쩌면 체면이 담긴 시선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날 사랑하는 입장에서 오래토록 바라왔을테니까.
“얼른 가봐.”
“오늘 집 들어올 거야?”
“아니. 아까도 말했잖아. 여기까지만 하자. 네가 알아버린 이상 네 옆에 남을 수는 없어.“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래서 더더욱 붙잡을 수 없었다. 넌 끝을 봐야만 다음 시작을 하고, 우린 지금 끝에 다다랐으니. 또다시 깨문 입술과 너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빛이 미련을 남겼다. 김석진. 김석진 김석진 김석진. 네 이름을 주구장창 마음속으로 외쳐도 넌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 깊고, 아주 따뜻하게.
”그날 나 살려줘서 고마워.“

”네가 먼저 날 살렸으니까. 은혜 갚은 셈 치지, 뭐.”
“내가 너를? 언제?”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행했던 내 하루들을 바꿔준 구원이 너니까. 여전히 넌 ‘나의 사랑 나의 삶 김여주’야.”
“태형 씨도 너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에게 많이 미안해 하고 있거든. 너무 어렸고 너무 어리석어서 너를 미워했었다고.”
“내가 그 애의 너무 많은 걸 가졌어. 너까지 가져가기엔 하늘도 태형이도 허락하지 않을 걸. 난 둘만 행복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생글생글 웃어오는 얼굴이 마치 어젯밤 같았다. 그래, 이제는 널 놓을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오늘 붙잡았지만 오늘 놓을 필요가 있으니까.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적막이 오갔다. 복잡한 머릿속을 한참 헤매고 있었을 즈음, 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매일 밤 듣던 그 말, 이제는 듣지 못할 그 말.
“꽃이 보고 싶어.”
“······“
”너랑 손잡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나도. 나도···.“
결국 또 울었다. 안기지도 못할 품에 다가가 울어버리는 바람에 또다시 당황한 네가 내 눈물을 닦으려다 또 현실을 직시했다. 내 피부 하나하나를 전부 통과하는 네가 대체 어떤 감정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지금 펑펑 울어야만 네가 내 사랑을 알아챌 것 같았다.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너까지 울음이 터져 볼이 푹 젖긴 했지만.
”그럼 우리 벚꽃 필 때 다시 만나자.“
”언제···?“
”언제든. 난 기다릴 수 있어.“
”······“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
네 품에 안기고 싶어. 제발 네 품에 안기게 해줘. 네 목도 끌어안고 싶고 네 숨결, 네 온도, 네 향 전부 느끼고 싶어. 애달프게 울어대며 계속 중얼거렸지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넌 이미 죽었고, 난 아직 살아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을 찢어 죽이고도 남는다. 내가 너의 곁을 떠날 생각을 않자 날 태형 씨 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본인도 울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그쪽으로 걸었다.
점점 도서관에 가까워지자, 계단에 앉아 멍하니 풍경만 보던 태형 씨의 시선에 내가 들어왔다. 태형 씨는 날 보자마자 계단을 빠르게 내려와 내 앞에 섰고, 계속 울기만 하는 내 볼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너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왜, 왜 무슨 일이에요. 못 찾았어요? 왜 이렇게 울어요···.”
“태형, 태형 씨 저 진짜···.”

“······.”
네 눈은 선망과 질투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김여주가 내 앞에서 죽도록 울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물을 닦는 것도, 품에 안기게 하는 것도, 머리를 쓰담으며 위로하는 것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조금이나마 남았던 미련도 사라졌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태형이에게 여주의 미래를 부탁하고 싶었다. 정말 오래, 함께 사랑하길 바랬다. 너와 내가 아닌 너와 태형이가.
“나 갈게, 여주야.”
“잠깐, 잠깐만···!“
”사랑해. 너랑 나 말고 태형이랑 네가. 둘이서 행복하게 사랑해. 그게 내 바람이야.“
”나 기다려줄 거지···? 같이 벚꽃 보기로 한 거···.“
”당연하지. 그러니까 넌 속 편하게 혼자서 남은 인생 최고로 재밌게 즐기다 와. 나도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게.“
”사랑해, 석진아. 정말 많이, 진짜 많이 사랑해.“
”나도.“
”······“

”나도 널 사랑해.“
어쩌면 태형 씨에게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정말 어쩌면, 내가 진짜 미친 걸지도 모른다. 다만 이로써 너와 내 인연이 아름다운 끝맺음을 맺는다면, 나와 태형 씨의 애타는 인연도 아름다운 시작을 이뤄낼테니까. 그래서 우린 모두 행복할 것이다. 모두가 아름답고 모두가 시작이자 끝에 도달해 그 무엇보다 찬란한 삶을 살길 바란다.
“형이었어요?”
“네?”
“아까 여주 씨가 허공 보면서 한 말들. 형이었어요?”
“네. 그 사람이었어요. 이제 전부 끝났어요.”
“그럼 시작할 일만 남았네요.”
한참을 우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귀 뒤로 살살 넘기며 그가 말했다. 끝이 있다면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으니 이제 남은 건 시작과 끝뿐이다. 여전히 우드향 가득한 그의 품에 조심스레 안겼다. 사랑을 한다면, 너와 할 거야. 아까 석진이에게 하고 싶었던 일을 모두 태형 씨에게 했다. 목을 끌어안고 체향을 맡고 온도를 느끼는 일. 그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도서관으로 이끌었다. 나 역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텅 빈 거리. 정말로 네가 날 떠났음을 증명하는 적막함. 만일 우리가 정말 다시 만난다면, 벚꽃잎이 흩날리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어느 봄날에 다시 만날까. 하고 싶었던 모든 걸 다 하면서, 입을 맞추고 사랑을 말하자. 서로의 손을 잡고 예쁜 꽃들을 바라보며 이상하고 아름다웠던 우리의 삶을 되짚어 보는 거야. 찬란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너와 나의 시간들이 겹쳐지는 그날, 우리 다시 만나자.

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𝑬𝒑𝒊𝒍𝒐𝒈𝒖𝒆

솔체꽃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