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아기 때 어머니를 잃은 우리 아버지는 젖동냥으로 나를 키웠다고 한다. 생업을 접어야 했던 아버지는 말그대로 여기저기 빌어먹으며 지냈다.
아버지는 내가 네 다섯살 쯤 되었을 때, 결국 무녀들이 사는 신전에 나를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으로 보냈다. 정확히는 팔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빠가 무언가를 받아가는 것을 나는 봤거든..
그래도 아빠가 나를 재물을 위해 팔았다기보다는, 늘 배고프고 바람이 다 통하는 낡은 집에 딸내미를 계속 키울 수가 없어서 보냈다고 어리숙한 꼬마였던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며칠 동안 신전을 들락날락하며 그곳의 시종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는 나를 보내는 날에는 깨끗이 나를 씻겨서 새 옷을 입혀주었다. 신전에 가보니 그 새 옷은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이었는데, 어리고 조그마했던 나의 몸에 꼭 맞았던 것을 보면 아빠가 부탁해서 특별히 지어준 것 같았다.
부엌 옆에 있는 시종들이 밥을 먹는 공간에서 같이 국밥을 나눠먹고 나서 아빠는 나를 떠났다. 헤어질 때 나에게 잘 지내라며, 슬픈 것 같으면서도 뭔가 안심하는 것 같았던 오묘한 아버지의 마지막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아빠가 나를 언젠간 찾아올 줄 알았지만, 그 이후 아빠는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았다. 죄책감에 더이상 나를 보러올 수 없었던 걸까? 혹은 나를 팔아먹은 돈으로 잠시 배곪지 않고 지내면서 애써 나를 잊었을까? 신전에서 따듯한 밥도 먹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된 나는 그래도 아빠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아빠는 가난해서 날 여기에 보낸 거지, 날 버린 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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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빌어먹고 지낸 덕인지, 나는 금방 신전 시종장의 비위를 맞추며, 그럭저럭 신전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어렸던 나는 신전 밖으로 잔심부름을 다니게 된 6살 무렵부터는 일찌감치 일을 마치게 되면 신전 뒷편의 산에 가서 동네의 아이들 틈에 섞여 뛰어다녔다. 시종관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가 해야할 일만 다하면, 산에서 뛰어노는 나를 굳이 나무라지 않으셨다. 정적이고 숨막히는 신전 어린아이가 혼자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고, 밖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그나마 편안했던 나는 머리를 써서 일을 빨리 끝내버리고는 얼른 뒤편의 산으로 놀러가곤 했다.
산을 뛰어다니면 아빠가 생각나지 않아서 좋았다. 아빠를 기다리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지막으로 아빠와 밥을 먹었던 주방 옆 식당 앞에 아빠의 그림자가 자꾸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산에서 뛰어놀면 아빠의 그림자를 찾을 일도, 조용한 신전에서 큰소리를 내게 될까봐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산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무도 가지 말라던, 동산 너머로 가게 되었다.
결이 말에 따르면, 그 곳은 결계를 쳐두어서 사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도록 했다는데 처음 그 곳에 갔을 땐 나도 거기에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것인지.. 정신차려보니 거기였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원래는 술래잡기를 하다가 길을 잃어서, 언덕으로 올라가서 길이 어딘지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분명히 비어있는 언덕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양쪽에 돌로 된 석상이 있었고 어디로 향하는 입구인 듯 길이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길로 들어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 내가 발을 하나 내딛자 양쪽에서 토끼발이 양쪽에서 나타나며 계단 하나가 생겼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올라 다시 발를 내딛으려 하자, 마치 계단이 살아있는듯 내 속도에 맞추어 다음 한 칸이 생겼다. 돌아가야하는 걸꺼...? 뒤를 돌아봤지만 뿌연 안개 속에 갖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나는 살아있는 계단을 딛으며 올라갔다. 뿌연 안개로 뒤덮인 계단길을 지나고 나자, 어느새 축축했던 안개는 사라지고 햇빛에 뽀송뽀송하게 말라있는 검은 기와들이 무겁게 내리앉은 담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서 반듯하게 돌로 깎아 만든 계단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신전으로 돌아가는 길이 나올려나..? 나는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바로 문지기에게 잡혔다.
"꼬마야, 누구를 만나러 온거니..?"
문지기에게는 회색 털로 덮힌 쫑긋한 귀가 있어 나는 이 곳이 인간의 마을이 아님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 곳은 아빠에게 말로만 듣던 늑대족의 마을이었다.
늑대들은 혼현(魂顯)을 감추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으며, 잠을 자지 않는 낮시간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지낸다고 했었다. 하지만 계급이 낮을수록 도력이 약해 혼현을 완전히 감추긴 어려워 귀나 꼬리 등 늑대의 흔적이 남는다. 딱히 계급에 따라 심한 차별이 있지도 않지만, 외모를 보면 계급이 티가 나는 편이었기에 서열을 두고 큰 다툼이 일으키거나 계급에 따라 서로 비굴할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낸다고 했었다.
“그, 그렇게요...”
그런데 아빠에게 말로만 듣던 늑대족을 막상 만나고 나니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이 사람은 늑대로도 변할 수 있을테니.. 그럼 날 갑자기 공격할 수도 있는 것 아니야..??
‘아휴..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나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겠지..?’
칼자루를 잡고 있는 병사의 길다란 검은 손톱을 보며, 나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구.. 누구를 만난다고 해야 할까..? 빨리 짱구를 돌리자...
“족.. 족장님 아들이요!! 오, 오늘 만나기로 했었는데,
안 와서 만나러 왔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당연히 족장이 있을 테고, 그럼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족장의 아들이었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일단 여기에 존재할만한 누군가를 말해야할 것 같았다. 내 말을 들은 문지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더니 갑자기 옆을 지나가던 어린 여자애를 불렀다.
“야, 얘 좀 족장님 아드님께 데리고 가봐..
우리 왕자님을 만나러 왔다는 데, 진짜인지 확인해보자고..
요즘 도통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문지기가 그르릉거리듯 중얼거리던 마지막 말에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는 풍성한 꼬리가 달린 어린 여자애 한 명, 내 뒤에는 길다란 송곳니가 보이는 소년 병사 한 명에게 둘러쌓여서 마을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마을 안 쪽 길에는 따듯하지만 왠지 위엄이 느껴지는 거대한 기와집들이 쭉 늘어져있었다. 기외집을 지날 때마다 담장 사이 사이로 뛰어노는 어린 늑대들과 곱게 의복을 차려입은 어른들이 보였다. 시종과 병사는 마을 가장 안쪽 가장 큰 기왓집 대문으로 들어갔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높은 축대 위에 왠지 압도되는 듯한 거대한 기와지붕을 얹은 커다란 집이 있었다.
여자애가 복도를 지나던 초록색 비단옷을 입은 시종을 부르고는 축대 위로 깡총 뛰어올라가 지금 상황을 귓가에 속삭였다. 그 시종은 고개를 갸웃둥 하더니 방문에 대고 고했다.
“왕자님, 손님이 왔습니다, 인간이옵니다.”
“어..? 뭐라고??”
방에서 누군가 바로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왕자라고 부르지 말고, 도련님이라고 불러달랬잖아.. 그 호칭은 좀 부끄럽단말이야...”
조용히 투덜거라며 나온 남자애는 나랑 또래가 비슷해보였다. 살짝 푸른 빛이 도는 회색 머리칼과 다부진 얼굴, 특히 반짝이고 일렁이는 눈빛이 회색 늑대다웠다.
그 애는 나와서 내 주변에 서 있는 병사와 시종을 보며, 잠시 상황 파악을 하는 듯했다. 어쩌다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온 어린 나는 등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하던 아이는 갑자기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왜 이제야 오는 것이야! 기다렸잖아~~
얘는 내 손님이 맞아. 어서 들어와.. "
그가 뒤돌아 방으로 들어가자, 집 뒤로 펼쳐진 솔밭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이 길게 드리운 처마 끝의 풍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풍경에서 울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의 마음을 왠지 안심하게 하였다.
비단옷을 입은 시종의 눈치를 보며 디딤돌 위에 신발을 벗어놓은 나는 멋쩍게 한번 웃어보였다. 그리고, 왠지 위기를 넘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복도에 열려있던 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이내 바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늑대 특유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하고 아이가 나를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아이는 주변 사람들을 다 물리고 나서야 자기 소개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 나는 이결(李潔)이야. 사실 인간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그래서 일단 널 이곳에 들이긴 했는데,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야기해 줄래..?
내가 너를 믿을 수 있는 지부터 알고 싶어”
순간적으로 나의 신세를 깨달은 나는 납작 업드려 나의 상황을 고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것을 시작으로 늑대족에 대해서 듣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 무녀의 신전에서 일을 하게 된 것 등등.. 이것저것 정신없이 말하였다. 그리다가 문득, 이곳에 온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들고 결이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아빠의 말로만 들었던 늑대족... 아빠는 늑대 같은 친구가 한 명쯤은 꼭 필요하다고 나에게 늘 이야기했었다. 신전에 있어서 친구 사귀는 것도 쉽지 않은데, 늑대 친구가 생기면 더욱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거절하기라도 하면... 나를 없애려고 하면 어쩌지...?? 에라이..! 모 아니면 도다. 친구를 얻던지 아니면 여기서 끝장나던지... 막상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뱉고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 속이 소란스러웠다.
결은 나에게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늑대들에게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평생을 널 믿겠다는 뜻으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너.. 안개로 쌓여있는 계단을 지나서 왔다고...?? 그거 진짜 이상하네...”
결이는 나의 이야기와, 계단을 통해 내가 들어왔다는 것과, 나의 행색을 보며 생각하는 듯 했고, 나는 방 한가운데 있는 푹신한 방석에 앉아서 결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방 한가운데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여기저기 놓여있는 달항아리들이 보이고 사방탁자에 쌓여있는 서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방구석에 있는 날렵한 검도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 앉아있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나와 친구로 지내자..!”
여기저기 헤매느라 귀가시간에 늦을 것 같던 나는 결이와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바로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에게 자주 늑대족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빠 생각에, 며칠 뒤 다시 결이를 찾았다.
결이는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결은 나를 데리고 집의 서쪽에 있는 냇가로 데리고 갔다.
“내가 물가에서 약속을 한다면 그것을 영원히 깨지 않겠다는 뜻이야.”
결은 나에게 약속을 했다.
“늑대족의 영토에 언제든 올 수 있도록..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니가 위험하지 않도록 늘 보호해줄게. 그러니까 넌 나의 첫 인간 친구인거야.”
이로써 나는 인간과의 교류가 끊어진 늑대족의 영토에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