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데 없어서 내가 쓰는 단편집

[단편/크미] 나의 지구

눈을 뜬다. 수많은 항성들이 줄을 잇고, 광활히 펼쳐진 어둠이 순식간에 나의 육신을 감싼다. 들이마실 것이라곤 산소를 가장한 숨이 턱턱 막혀오는 이산화탄소와 정체모를 기체 그 쯤 어떤 것. 고개를 치켜뜨든 떨구든 끝없이 펼쳐진 암흑세계만이 내 말동무다. 

충돌의 흔적인지, 초신성의 잔해인지 알 수 없는 달 표면의 구멍 사이에 몸을 맞춰본다. 밤인지 낮인지 모를 무한한 시간 속 스스로의 생체리듬에 몸을 맡긴 채 내 안의 우주가 또 하루 저물어간다. 


며칠, 몇 달째인지 모를 우주에서 뜨는 눈. 어둠에 적응된 시야는 점차 밝아지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하나의 개체가 있었으니,

바로 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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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스스로 발길을 떠나온 곳이지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푸르른 빛을 유지하는 곳. 나의 지구는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야속하다고 해야할까? 

처음 지구를 떠나오던 날, 나의 세계는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깨어졌다. 믿음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결계는 오염 되었고, 인류애란 신앙심은 독배가 되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가 아닌, 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는 결속이 매일 숨통을 조여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끊어내면 편할 줄 알았는데, 분명... 그럴 줄 알았는데. 지구 밖으로 나온 이 순간, 드넓은 우주 속 유일하게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나 하나란 걸 느낀 순간 몰려온 사무친 외로움이 또 다시 나를 덮쳤다.

처음엔 분명 좋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노이즈 같은 시끄러운 세상에 귀를 귀울일 필요도 없고,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복잡하지 않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이루었으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네 젊음이 아깝지도 않아? 남들은 다 부러워 하는 걸?"

"제발 어디가서 아는 사이라고 말하지 마."



"......"
"....X발."


나의 지구에서 들었던 말들. 주어는 나, 말하는 이는 핏줄로 얽히고 설킨 다수. 하루하루 숨을 쉴 때 마다 내가 들이마실 수 있는 산소가 줄어드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답답한 곳이었다. 나라고 하고 싶은게 없나, 나라고 생각이 없나, 나라고, 이러고 사나...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정말로 미쳐버릴 때쯤, 나는 그토록 염원하던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쳇바퀴처럼,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가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난날의 괴로움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기에 애써 물려뒀던 생각이 스멀스멀 자라나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그 때 느꼈던 회의감 때문이었으랴.

드넓은 우주 속 오로지 지구와 나, 나는 내가 너무나도 큰 존재인 줄 알았는데, 너는 아니었나보구나.


"...외롭다..."


스스로 인정하게 될 줄은 몰랐던 말. 외롭다는 말 한 마디가 뭐라고 한 번 말 하자마자 눈물이 솟구치는지, 흙더미 언덕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낸다. 그 눈물은 저 우주 어딘가로 떨어져 또 나의 흔적이 되고, 지금껏 버텨왔던 나의 잔해이자 원석이 될 것이리라. 

시간과 공간은 거대하다. 그리고 평등하다. 모든 걸 놓고 하염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갈때도, 누군가와 비비지 못 할 만큼 바쁘게 살아갈때도 결국 둘은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을 제공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 살아내느냐는 오로지 본인의 몫에 달린 것.

생각과는 다른 우주 속 삶에 나는 다시 무기력에 얽매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일깨운 건 다시 생각해봐도 참 놀라운 경험이었다. 


"너는 네가 무슨 존재라고 생각하니?"


어둠 속에서 들려운 누군가, 아니, 누군가가 맞나? 사람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닌, 무엇인가의 음성. 


"...누구세요?"


너무 오랜만에 말을 한 탓일까, 짧은 한 마디에도 목이 메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켁켁거렸다. 그 무언가는 나의 기침이 멎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사실은 뭔지 잘 살펴보지도 못 했지만.


"너는 왜 여기 있니?"

"...사람이 싫어서요."

"내가 보기엔 말야, 넌 고독이 어울리지 않아."

"...무슨 말이에요?"

"무작정 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정말 벗어나고 싶으면, 더 나은 인간이 되란 말이야."

"그걸 알았으면, 내가 탈출 했을까요?"

"잘 찾아봐."
"원래 제일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무슨 말도 안되는..."


짧은 대화였지만, 그 목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명치를 얻어맞은 듯 한 황망함, 그 속에 남아있는 작은 찝찝함. 그날따라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을까?

사실 늘 감춰왔던 내가 지구를 떠나온 진짜 이유는, 세상이 날 버린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세상을 놓았다는 한심한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던 그 날의 기억이다. 비난 속에서도 나조차 나를 지키지 못 했던 그 때가 너무나도 소름끼쳐서, 그럼에도 할 수 있는거라곤 도망뿐인 내 자신이 역겨워서.

그치만 어딘가 달라진 지금은, 그때보단 조금 더 당당히 세상에 발을 들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진 모른다. 아마 밤중의 그 음성 때문일수도, 변덕스레 움직인 내 마음의 탓일수도.

지구를 떠나온지 약 1년, 드디어 우주라는 작은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둥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한다. 언젠가 비로소 나의 진짜 지구에 다다르는 날, 환히 웃으며 과거와 달라진 나를 맞이하게 될 날. 변치않았을 그 푸르름을 살며시 기대해본다. 나의 지구여, 나의 집이여, 너무 늦은게 아니길.

부디, 그 자리에 있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