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헤어져?"
"··· 응."
조짐이 없었다. 굳이 기를 쓰고 찾아내겠노라 하며 근 4년동안의 연애일지를 뒤적인다면 접때 점심메뉴로 햄버거를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 같잖게 싸운 거라든지 뭐 하나 건수는 나오겠지만 애초에 헤어질 계기는 찾는 데 필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명확해야 했다. '너 같은 거 질렸어' 종지부를 찍거나, 멀쩡한 애인 납두고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식으로 말이다. 여주가 여즉 혼란스러운 까닭은 거기서 비롯됐다. 헤어졌어. 어제. 근데... 왜? 그게 문제다. 왜인지를 모르겠다. 바람이 선선하고 일이 너무 급작스레 치닫는 바람에 눈물은 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인간극장 보고도 쭐쭐 우는 타입인데 이상하게 그런 감정이 일절 피어오르지 않는다. 대신 분노, 어처구니없음, 기막힘 등의 허무맹랑한 조각들만이 한동안 뇌내에 자리잡혔다.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가서.

모든 것은 제자리에
W. 문스
기억하기 싫은 날은 종강총회. 학적부도 원만히 마무리된 터라 이대로 착실히 학점만 채우고 한다면 여주는 막학기가 끝나고서 곧장 아버지네 회사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집이 좀 잘 살았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나 가장 보편화된 행복을 위해 갖춰야 조건: 일, 넉넉한 지원과 평안한 가정환경. 이, 결혼을 약속할만치 진득하게 만난 애인. 삼, 정년퇴임이 보장된 안정적인 직장. 이 세가지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던 그녀의 일생에 천 갈래 만 갈래 금을 가게 한 일이 문제의 종강총회 당일 발생한 것이다. 아니, 가지 않았더래도 하루 뒤에든 이틀 뒤에든 불시에 일어날 사건이었지. 그냥 원망할 구석이 필요했다는 게 맞다.
술자리라면 늘상 질색하며 빼던 민윤기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순순히 자리에 참석했다. 따로 음침한 구석도 없고 그저 말수만 적을 뿐인 윤기는 인복이 좋아서인지 저가 애써 끌어들이지 않아도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늦게 도착한 여주는 이미 차 있는 테이블로부터 발길을 돌려야 했다. 비밀연애는 아니다만 멀쩡히 붙어 있는 동기들을 밀어내고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가야 할만큼 속좁은 인간도 아니었다. 술도 오랜만에 마시는 것 같던데. 나오면 연락하겠지. 하여 쿨하게 선로를 틀고서 저를 손짓하는 무리에 섞여들어갔다. 익숙한 면면들이 눈에 띄는 걸로 보아 얼결에 자리잡은 곳은 국문과 집합소가 틀림없었다. 정해진 거 없이 알아서 앉는 거라지만 역시 사람은 본래 속한 데 속해 있어야 편한 법이다. 기류만으로 알딸딸해진 상태에서 먹지도 않을 감자튀김을 포크로 툭툭 간보듯 찌른다. 그 찰나에 마주앉은 이가 대뜸 물어왔다. 누구였더라, 아. 교양 옆자리 여자애.
"여주. 너넨 결혼할 거야? 벌써 청첩장 돌린다는 애들도 있대, 웃긴 것들."
"하긴 해야지."
"민윤기도 하고 싶대?"
"진지하게 말한 적은 없는데, 그러지 않을까. 아마도."
눅눅한 반응이었지만 어느 정도 기대가 섞여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일 년 차이나게 입학했는데도 불구, 윤기는 중간에 군휴학으로 2년 가량 공백기가 생겨 올해 3학년이고 여주는 곧 취업을 바라보는 4학년이었다. 그나마 저처럼 미리부터 갈 곳 정해진 게 낫지 다른 동기들 보면 자소서 쓰랴 자격증 따랴 토익점수 올리랴 이리 느긋하게 술 마실 시간도 없다. 연애도 같다. 사람 사귀는 건 여유 있는 자의 특권이다. 주변을 봐, 임용고시 준비한다던 아는 언니는 독서실에서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눈 맞아선 제 처지랑 비슷한 고시생이랑 연애하다가, 둘이 사이좋게 낙방했다. 그리고 몇 개월 안 가 깨졌다. 서로 죽고 못 사는 듯 굴더니 막상 현실이 눈앞에 범람하자 불쑥 꼬리를 내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주는 저가 아주 행운아라고 여겼다. 사정이 괜찮으니 철없이 연애도 할 수 있고 말이야. 게다가, 군대 통으로 기다리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그건 민윤기도 기이 아는 사실인지 입대 전에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까끌한 뒷목을 매만지며.
"기다리지 마."
"야, 니 머리 밀어준 게 누군데. 헛소리 말고 갔다 와."
"너 힘들어."
덤덤한 체. 힘든 건 저가 더 그래보였다. 기다란 눈에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뭉뚱그려 있다. 여주는 그게 비단 1년 하고 반년간 겪을 고생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알아."
"차라리 다른 남자를 만나든가, 이왕이면 군필로."
"너만큼 잘생긴 놈 있으면 만날란다."
"안 만나겠다는 거네."
"어."
농담조로 피실거리며 말했는데 것보다 훨씬 무겁고 단호한 답이 따르니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다. 여주는 그랬다. 평소엔 매사 한없이 가벼운 것 같다가도 번뜩 진지해지는 성질이 있었다. 듣는 윤기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인다. 밤이라 한적한 골목 어귀. 대문에 몸을 기대며 말한다.
"안 만날 거야. 언제 오는지 날짜 하나하나 세면서 너만 기다릴 거야. 지칠 때까지 보고 싶어할 거야. 네가 내 목소리 질려할만큼 연락할 거야."
"······."
"그러니까 잘해."
"······."
"진짜, 잘해."
"··· 응."
그날 도여주 앞에서 눈물 찔끔 흘렸던 일은 민윤기의 유일한 흑역사로 기억된다. 면회 겸 외출권 받아 만났을 때도 놀림받았다. 거기선 안 우나 몰라, 한 마디 했다가 삐져서인지 존심 상해서인지 입 일자로 째고 묵묵부답하는 짓을 삼십 분동안 이어나갔다. 차피 인심 써준 입맞춤 한 번에 다 풀려버릴 거면서. 남들 눈에는 어떨진 몰라도 적어도 여주에게 있어 그는 최강 쪼잔한 남자였다. 그래도 좋아. 좋으니까 내내 기다렸지. 아무튼 그 지독한 인내심의 출처는 이후 민윤기와 어떤 식으로든 함께하게 될 거란 확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혹여 부담 가질까 결혼 얘기를 대놓고 꺼내본 적은 없지만 여주가 동기의 물음에 '그러지 않을까. 아마도' 대답한 것은 그와 같은 수순.
그러나, 둘은 헤어졌다. 발화자는 민윤기였다.
몇 시였더라. 원체 술을 좋아하는 축이 아닌지라 대강 입안에 안주만 밀어놓고 있을 즈음에 연락이 왔다. 아까 총회 온다는 얘기를 끝으로 중단된 대화에 시작을 끊은 건 달랑 한 마디. [나와봐] 응? 나와? 저쪽 테이블을 곁눈질로 흘깃하니 윤기는 겉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다. 아직 가긴 너무 이르지 않나. 아 맞다. 민윤기 술 약했지. 사소한 의문은 대강 넘겨버리고 따라 자리서 일어난다. 몇 줄씩은 말을 섞었던 이들이 벌게진 얼굴로 벌써 들어가냐며 칭얼거린다. 살풋 웃으며 배웅했다. 가을의 초입이라 바깥은 약간 시원선선한 정도였다. 여주는 아무래도 봄 자켓을 입은 게 미스였던 듯 싶은지 이 정도 기온에도 팔뚝을 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때마침 목덜미께로 둘러지는 목도리. 민윤기 냄새다.
"가자."
"뭐야, 너 목도리도 하고 왔어? 아까 못 봤는데"
"너 주려고 챙겨왔어. 춥게 좀 입지 마."
"남친 행세는."
장난 어린 투에도 퍽 진중한 낯짝이었다. 마주 웃어주지도 않고 같은 말을 거듭 반복했다. 이제 춥게 입지 마, 알았지. 여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싫어. 정수리로 내리쬐는 가로등 조명이 강해 정작 가까이 있는 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령 그때 민윤기의 표정, 같은 것들. 별로 심각히 여기진 않아 그의 머리카락이나 간간이 만지작댔다. 많이 길었네. 밀기 전보다 더 긴 것 같은데. 윤기는 묵묵했다. 컨디션이 저조해서 오는 침묵이 아니라 할말을 애써 고르고 추려내는 듯한 침묵이었다. 평소에 바래다주는 건 제 습관이고 루틴이기 때문인 반면, 오늘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양 여주의 집까지 말없이 나란히 걸어갔다. 내일 만날래? 아니. 일 있어서. 원래도 그랬지만 대화가 더욱 뚝뚝 끊겼다. 서리라도 낀 듯 매끄러운 데가 없다. 취해서 그런가 치부하기엔 술냄새는 나지 않았다. 두 발걸음이 대문에 다다랐다.
"너 좀 피곤한 것 같아."
"그런가."
"응. 혹시 아직도 몸 안 좋으면 병원 가보고, 두통이나 감기약 같은 건 우리집에 있으니까 꼭 연락-"
"여주야."
윤기가 말했다. 어? 가로등 불빛이 걷혀 이제사 앞이 뚜렷하게 트인다. 내보인 미소. 그건 분명 쓴웃음이었다.
"우리 헤어질까."
"······."
뭐랄까,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할 시간.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 끝으로, 적응하고 체념할 시간. 도여주는 놀랍게도 어느 한 단계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되물었다. 장난이야? 야, 살벌하다. 무슨 장난을 그렇게... 여직 싸늘한 공기 탓에 목소리에 점차 확신이 걷힌다. 민윤기는 제게 지금 이별을 통보하고 있다.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실제 상황. 사람이 정말 당황하면 욕이고 나발이고 입밖으로 한 자도 제대로 뱉어내지 못한다. 무중력의 상태에 도달한 듯 팔다리 내지 머리가 통째로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
"··· 사과하지 마."
"미안, 여주야."
"······."
화를 낼 타이밍은 일전에 놓쳐버렸다. 이렇게 뛸 수 있나 싶을만큼 심장이 박동했다. 윤기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밀었다. 숙취해소제. 그것만을 덜컥 쥐어주고 떠나버린 시점에도 여주는 그 자리서 요지부동이었다. 자꾸만 피식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웃겨서. 숙취해소제라니, 자긴 거기서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계속 안주만 씹은 게 단데 말이다. 그딴 건 필요없었다. 도여주는 그때 그 시각부터 민윤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 아량이라도 베풀듯 둘러주고 간 목도리. 춥게 입지 말라는 걱정. 나오기 전 편의점에서 급히 사온 듯한 숙취해소제. 당장이라도 따라가 묻고 싶었다. 이중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뭘 것 같은데?
'하고 싶다'는 열망은 대개 '하지 못함'의 무력감에서 생겨난다. 여주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차인데다 굳이 찾아가서 감히 네가 날 찼느니 내가 뭘 잘못했느니 하는 꼴은 짐작건대 무던히 추해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국어국문과와 사회학과와는 건물 자체도 동떨어져 있다. 한 명이 작정하고 그 근처로 가지 않는 이상 년간 접점이 그다지도 없었다. 신경 끄자. 홀로 남은 여주는 그렇게 생각을 떠넘기며 남은 학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애인의 행태가 분해 돌아버리겠지만 연애와 미래, 뭐 하나 제대로 쟁취하지 못한 제 아는 언니의 노선을 그대로 밟아가기 싫었기에 짐짓 더 바쁘게 살았다. 4학년 2학기. 체감 기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다.
민윤기는 학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면 몰라도, 여주와 동반한다면 꼭 근처 고깃집이나 저가 따로 봐둔 식당을 찾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계산은 예외없이 본인이 했다. 여주가 왜 제 카드를 쓰게 하질 않냐며 기어코 반기를 들 적에도 얍삽하게 교체해 식당 아주머니께 내밀었다.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하며 아저씨 같은 말을 남발했다. 여주는 그동안, 자주는 아니고, 조금조금씩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그가 헤어지자 통보한 이유는 제 식탐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좀 덜 처 먹었더라면 우린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실없는 중얼거림. 푸훕! 옆에서 친구가 생수를 허공에 끼얹었다. 여주가 경멸스레 바라보니 그보다 더한 눈이 되려 이쪽을 향한다. 너 아직도 민윤기 생각해? 진짜 정신 나갔네 얘, 나 같으면 상종을 안 하겠다 어쩌고저쩌고. 유일하게 둘 사이의 사정을 아는 터라 이런 거친 반응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여주도 안다. 안단 말이야. 그 새끼가 나쁜 새끼고 자존심이 단 1그램이라도 남아 있다면 생각 안 하는 게 맞았다. 근데 4년의 세월은 물이 아니다. 진했다. 지우려 달겨들수록 추억은 처절하게 번졌다. 항시 들락날락대던 윤기의 자취방 앞을 지나면 여주는 왜인지 마음이 쿰쿰해져 걸음을 빨리했다. 그만큼 힘들었다.
"연락은 안 하지? 제발 여주야. 우리 구질구질하게 그러진 말자."
"아, 안 해 진짜. 너 성질 그만 긁어라."
"어련하시겠어요. 저번에 장문카톡 보내려던 거 다 봤는데."
뜨끔했다. 그거 언제 봤냐, 하려다가 말았다. 시시때때로 그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도여주는 구태여 놀란 티를 감추고 학식당 문을 밀었다. 이윽고 들어가려는 무리와 나오는 무리가 교차하며 시간이 느릿하게 지나는 듯했다. 야, 너도 알지. 흘러가는 대화는 원치 않아도 종종 귀에 내리꽃힐 때가 있다.
"윤기 저번주에 자퇴한 거."
"맞아 그랬다며? 취준 스터디도 들어갔던 애가 왜 그런대."
"왜 그러긴. 걔 사정이 특출나게 딱하잖냐."
"응? 왜?"
숨이 찰 정도로 뛰었다. 뒤에 대고 무어라 소리치는 친구의 말은 메아리도 없이 흩어져갔다. 뛰는 도중에도 여주는 저가 왜 울고 있는지 몰랐다. 헤어지잔 말을 면전에다 대고 들었을 때도 안 나던 눈물이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끊임없이 맺혔다 흐르길 반복한다. 지나는 이들은 모두 여주를 미친 사람 보듯 했다. 시야가 덜커덕 흔들리고, 가끔가끔 나오는 언덕이 가파르다. 멈춰 서 가늘게 숨을 고르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을은 다 졌다. 이제 곧 겨울이다. 길 구석에 나풀나풀 쌓여 있는 낙엽 무더기를 밟고 다시금 달려간다. 도여주는, 왜 민윤기가 그토록 제게 차가워야만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지난 달에 갑자기 입원하셨다잖냐, 심장병으로. 성적도 좋은데 아깝지 뭐. 이제 학교 다니면서 돈도 벌어야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대학 병원 앞에 도착하자 타이밍 좋게 다리가 풀렸다. 정말 죽을만큼 뛴 것이다. ...어디예요 거기. 오기 전 아까 그 하나를 잡고 정신없이 물었다. 그런 사정을 알 정도면 꽤나 안면이 있는 지인이겠거니 하며 건 도박이었다. 여주는 민윤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다라는 생각에 아직까지 이견이 없다. 엘레베이터 손잡이를 중심 삼아 숨을 연거푸 들이마셨다. 까라진 눈으로 상승하는 번호판을 본다. 309호. 내렸다. 내리고 언제 힘들어 했냐는 양 빈 복도를 속히 지나친다. 병실 문을 열기도 전, 여주의 걸음이 멈췄다. 앞선 사람이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섞는다.
"··· 도여주?"
"······."
"여긴 왜, 아니 어떻게 알고···"
"······."
"··· 울지 마."
다시 만나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여주는 그 다짐대로 펑펑 울었다. 풀썩. 309호 그 병실 앞에 맥없이 주저앉아 겹친 무릎에 이마를 파묻었다. 베이지색 코트에 진한 물자국이 배여갔다.
"왜··· 왜 말 안 했는데···. 왜 나만 모르게 해···."
"······."
"이 나쁜 새끼야아···"
윤기가 둥글게 말린 그 인영 앞에 마주 앉았다. 작게 한숨을 쉬고, 말없이 몇몇 카락이 나풀거리는 머리 위를 정돈한다. 진정하라는 듯 낮은 음성이다.
"이제 오지 마. 우리 헤어졌잖아."
"······."
"난 너 같은 사람이 나 같은 거 신경쓰는 거 싫어. 도여주. 그만하고 네 인생 살아."
"······."
"나 괜찮아."
거짓말.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예전에도 그랬다. 굳이 눈 올려 보지 않아도 뻔한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전히 머리를 쿡 박은 채 여주가 나즈막이 말했다.
"돈만··· 구하면 되는 거지."
"······."
"내가, 내가. 우리 아빠한테 말해볼게 윤기야. 알잖아, 나 돈 많아. 병원비가 몇 백 몇 천이든 내가 부탁하면···!"
벌떡 고개를 들고서 보이는 건 저가 여태 봤던 광경 중에 가장 최악이었다. 윤기는 여주의 말에 반색하긴 커녕 되려 어두컴컴해졌다. 납득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그 감정은 도여주가 모르는 류의 것이었으니까. 창피함, 혹은 좌절감. 기왕에 밑바닥까지 드러내보자면 헤어지잔 말은 진심이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돈의 지분이 아예 없진 않더라도 전부터 윤기는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자신과 도여주는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그것은 이 관계가 누구에게도 좋은 결말이 될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옆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윤기의 마음 한 켠엔 나날이 비참함이 자라고 있었다. 당장에 다음 날 사정이 아득한 저와 달리 여주는 지나치게 평탄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던 것도 아니다. 이 모진 굴레를 깨기 위해 노력도 해봤다. 사실 여주의 예상과 달리 윤기는 맛 같은 거 따지지 않고 저렴한 학식이나 편의점서 라면을 사먹지만 그녀와 함께 있을 땐 온갖 있는 척을 한답시고 지출을 남발했던 것이 노력의 파편이었다. 결국엔 생활고에 쪼들렸지만. 잠시나마 행복했던 기억이 유일한 소득이다.
다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심장병 판정. 손쓸 새 없이 불어나는 빚더미. 그리고, 병의 유전 가능성. 참 비루한 생애라고 생각했다. 확률이 거진 백에 가까워 발병은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고 전해들었다. 여주에겐 말하지 못했다. 말한더래도 분명 안고 가겠지. 그럴 애니까. 당시 윤기는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는 정말... 가진 건 뭣도 없지만, 작은 일자리라도 하나 구해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끝끝내 짐덩이 역할이라. 조막만한 방구석에서 사흘밤낮으로 울었다. 그보다 더 처절할 수 없게끔. 걱정하는 연락엔 그저 몸살이라 둘러댔다. 종강총회에서 여주가 윤기의 몸상태를 걱정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날 헤어지자 했었지. 실상 종강총회에서든 그 전이었든, 염치불구하고 모든 걸 주절댈 기회는 많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도여주 또한 이 구질구질한 곳에 끌어들이기엔 민윤기는 너무 착했다. 멍청하도록 착했다. 이미 일찍이 깨달았던 구절이 머릿속을 선하게 장악한 지 오래였다. 우리는 사는 세상이 다르다. 아니, 틀려. 틀린 퍼즐조각을 빈공간에 꾸역꾸역 집어넣어봤자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윤기는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그림을 망칠 생각이 없다.
정말, 추호도.
"··· 일어나서 집 가."
"민윤기."
"빨리."
"약속했잖아··· 너, 나한테."
여주가 울컥 울분을 터뜨렸다. 나한테 잘하기로 했잖아···. 재작년의 이야기였다. 그걸 죄 기억할 정도로 섬세하고 여리다. 그런 너를, 내가 감히. 덤덤히 지켜보던 윤기는 병실 문을 열며 말했다.
"잘하고 있잖아."
"······."
더이상은 끌 수 없었다.
"미련없이 너 놔주고 있잖아. 지금."
우리는 이게 맞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