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스물아홉 된 김태형은, 홀로 여행을 갔다.

여행
태형은 한 손에 제 여행가방을 쥔 채 멀거니 페이드 아웃되는 택시 번호판을 응시했다. 8월 중순. 그쯤 되면 성수기는 지나는 터라 공항은 좀 북적인다 뿐이지 사람과 사람으로 미어터질 수준은 아니었다. 산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새삥의 가방이 걸음따라 질질 바닥을 끌었다. 회사 휴가를 간신히 걸친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죽으러 가는 낯인 것은, 불과 삼 일 전으로부터 시작된 얘기다. 태형에겐 햇수로 5년 된 여자친구가 있다. 달칵. 갈라진 바닥 틈에 낀 바퀴가 멈춰서자 시선은 자연히 허공을 좇는다.
「"원하는 대로 해. 쪄죽는 데 아니면 상관없다 난."」
「"진짜? 나중에 말 바꾸는 거 아니지?"」
「"그럴 수도?"」
「"아 좀, 김태형!"」
시덥잖은 주제로 투닥거리다 겨우 정한 게 프랑스다. 도출의 과정은 꽤나 마구잡이였지만 둘에게 그리 의미없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오직 흥미만으로 서양화과를 졸업한 여주는 살아생전 딱 한 번쯤은 루브르 박물관에 가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걸 아는 태형은 굳이 반대표를 넣지 않았으나, 이여주가 선정한 장소가 아무리 덥건, 건조하건, 살이 에도록 춥건. 발로 걸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눈 딱 감고 동의할 셈이었다. 5주년 커플 여행이자 이여주의 첫 해외여행. 그녀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로만 24시간을 가득 채운 계획을 사랑스럽게 들어주며 눈 맞추던 일이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던 것마냥 생소하다. 갈피를 잃은 두 동공은 일찍이 빛이 바랬다.
"10시니까..."
손안에 들린 여권은 둘이다. 사람은 하나. 모순된 상황 속 그 하나가 스크린에 띄워져 껌벅이는 붉은 글자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한순간 눈앞이 흐리게 번져 태형은 잠시 제 소매를 빌려야 했다. 이 일련의 행위 외엔 아무런 내색조차 없어서 남들은 그저 무심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근데, 그게 아닌데.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나는 정말···. 오죽 복잡해 어그러질 것만 같은 속을 숨긴 채, 오로지 타인을 위해 쌓아올린 계단을 저 혼자 밟아올라가며, 태형은 아쉬운 소리 하나 내뱉지 않았다.
"곧 출발이네."
그는 정말로 죽고 싶었으니까.

한여름 파리의 햇살은 살이 익는 감각을 안겨준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맨팔뚝을 문질렀다. 서울의 여름보단 습기가 덜했지만 자꾸만 콕콕 찔러대는 자외선에 태형이 무심결에 눈매를 움츠렸다. 여름이 따갑다. 금세 유분기가 빠져나와 푸스스해진 머리를 대강 흘러넘기며 호텔 체크인을 확인했다. 학창시절에 영어를 놓지 않은 보람이 있었는지 오고 가는 대화는 수월했다. 여주가 옆에 있더라면 그녀의 주특기인 칭찬에 태형은 하루종일 어깨가 으쓱했을 것이다.
"··· 아."
발끝에 착 감기는 유럽산 카펫을 밟아 복도를 지나던 도중, 지갑을 떨어뜨렸다. 툭. 맥없이 낙하하던 가죽덩이는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제 입구를 벌린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들어차는 작은 사이즈의 사진 하나. 그 안에 살아 숨쉬는 나의, 나의 이여주. 네가 그렇게 오고 싶어하던 곳인데. 마른 침을 한 차례 삼키고서야 지갑을 다시 제 주머니로 쑤셔넣었다.
태형은 사랑을 맹신하지 않았다. 관계에 있어 끝이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이여주를 만나기 전에도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를 봐왔다. 개중에는 다시 붙잡고 싶을만치 간절한 인연도 있었으나, 그러한 감정에게마저도 시간이 약이었다. 아마 똑같았을 테지. 이번의 이별도 그랬더라면 태형은 늘 그랬던 것처럼 매일마다 천천히 무뎌지는 방법을 학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단지 그에게 이여주가 특별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이여주는 저와 예정된 여행 세 달 전에 죽었다. 밝네··· 전등이. 줄곧 뭐라 중얼거리던 태형이 멍한 얼굴로 숙소 천장을 훑었다. 샹들리에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이 달랑거린다. 까무잡잡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모습이 늘어졌다. 시트를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침대 헤드에 어깨를 기댔더니 뒷목이 묘하게 시큰해져 눈꺼풀을 내렸다. 기껏 시야를 가렸는데,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방관했던 감정이 역류하지 않도록 입술을 짓씹어 참았다.
"......"
피가 나서. 피가 제멋대로 흐르는 중에도, 태형은 그걸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제 무능력함을 이겨낼 수 없었다.

사고 당일은 빌어먹게도 날이 좋았다. 좋았다기보단 그저 그렇게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한 축에 들어서 있는 날이라 태형은 업무 중 실수도 하지 않고, 평소에 저를 죽일 듯이 갈궈대던 상사에게 칭찬도 얻어들었다. 밥을 먹은 후에도 담배는 꺼내지 않았다. 그 하루 중엔 속 태우는 일이 없어서. 사실 그런 것보단, 건강에 안 좋다며 담배를 끊으라 제게 일렀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서. 저녁 무렵 모니터에 띄워진 '언제 와? 보고 싶어." 하는 메세지 하나로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웠다. 퇴근길의 난잡한 지하철을 비집고 나와 현관을 열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애인이 있었고, 인사 대신 작은 입맞춤 하나로 둘은 충분히 사랑했다. 단지 그거면 됐었지만.
유난히 좋은 날. 그 날에.
이제 막 가방을 걸쳐 메던 태형은 제 사무책상 위로 손을 뻗어 울려대는 콜을 받았다. 발신자는 저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여주의 어머니였다. 약간의 긴장이 있었지만 밝은 표정을 짓는다. 여보세요? 건너편이 묵묵부답이라 전화선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몇 초간의 침묵. 그리고,
"...네?"
몇 마디를 내리듣자마자 순간 머리가 징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곧장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태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냥, 감정장치 하나가 고장나 있는 듯이.
교통사고. 도착한 곳은 회사 근처 병원이었다. 여주는 이따금씩 태형을 직접 데리러 오곤 했다. 빈손으로 올 법도 한데 항시 양손에 뭔갈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경향이 있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태형을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애를 먹었다. 사고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원 복도에서 여주의 어머니는 핏기가 빠져 잔뜩 떨리는 태형의 손에 빵집 봉투를 쥐어주었다. 겉표면에 얼룩진 검붉은 자국과 함께 뭉그러진 빵조각이 안을 이리저리 더럽힌 채였다. 그는 바닥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감히 눈을 맞출 수가.
새하얀 벽. 진동하는 약품 냄새. 문틈 새로 간간이 새어나오던 의료진의 다급한 음성. 그 순간의 모든 요소가 태형의 숨을 옥죄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여주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이렇게... 태형은 그때서야 굳은 무릎에 힘에 풀려 그만 복도에 주저앉은 기억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그 말마따나 모든 게 제 잘못 같았다. 아니, 그게 맞다. 확신한 순간 바짝 마른 입술을 타고 지독한 한기가 흘러들어왔다. 목이 사납게 긁혀 쇳소리가 났다.
「"여주야......"」
태형에겐 그날은 정말이지 모든 게 꿈만 같아서, 이대로 둘러싼 현실을 깨고 나가고 싶다는 애달픈 충동을 일게 했다. 힘껏 움켜쥔 제 무릎에 여즉 멍자국이 박혀 있을 정도로. 아직 못다 한 말이 많았다. 웽웽거리는 기계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줄곧 그려왔던 미래는 오늘로써 손쉽게 물거품이 되었으며, 남은 여행은. 그 여행 끝에 있을 또 다른 시작은. 채 싹을 틔우기 전에 처참히 즈려밟히고 말았다. 병원 복도의 조명이 시야에서 점멸한다. 연이어 눈안에 차오르는 물기에 떠도는 빛은 번져갈 뿐이었다.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이제 와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소름끼치도록 평범한 날. 그 날에. 태형의 세상은 아프다 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 한 채 잠겼다.
다음 날은 이여주의 장례식이었다.

파리의 첫날밤이 깊었다. 계획한 일정을 바지런히 소화한 탓에 태형의 몸 상태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오후즈음에 방문한 샹드마르스 공원은 에펠탑이 훤히 보이는 경치였다. 미술품만큼이나 촬영도 좋아하던 여주는 그곳이 사진 찍기에 최적인 곳이라며 검색창을 띄운 노트북을 통째로 들고선 온 집구석을 방방거렸다. 당시 소파에 앉아 과자를 뜯고 있던 태형이 그 행태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분명 뭐 하나 부숴먹을 게 뻔했다. 종일 종알대던 주둥이를 양념치킨맛 과자 하나와 맞바꿨다.
「"긍데 태혀아."」
「"먹고 말해 칠칠아."」
「"웅, 김태형."」
「"응."」
「"너..."」
요새 어디 나가는 거야? 주말에. 그러자 태형의 눈이 한층 느릿하게 깜빡였다. 동공이 아주 약간 떨리기도 한다. 주로 놀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급기야 반바지를 입은 다리가 소파 위에서 어색하게 굽혔다 펴지길 반복하자 둔탱이 여주마저 눈치를 챌 정도에 이르렀다. 슬쩍 고개를 돌리던 태형의 얼굴을, 텁. 양손으로 감싼다.
「"...아."」
「"어쭈."」
「"..."」
「"말 안 하냐?"」
이런저런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제 가족도, 이 세상 누구도 몰라야 할 비밀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에 있는 저 불퉁한 얼굴의 이여주는 더더욱. 귀여운 공갈협박에도 진실을 토로하는 법이 없자 여주가 마침내 입꼬리를 주욱 내리며 포기했다. 기가 죽어 총총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형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어떻게 말해 그걸...
「"...들킬 뻔 했네."」
내가 우리의 내일을 준비한다는 걸. 그러면서 제 주머니속 주문제작한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다분히 후회로 남을 일이다. 차라리 그때 주는 게 나았나? 그럼 이렇겐 힘들지 않았으려나. 지금은 꼭 죄 늦어버린 기분이다. 프로포즈도, 애정표현도. 너도, 나도. 모든 게 다. 입 아프도록 읊은 사랑한다는 말이 이제와 부족하게 느껴진다. 맹렬하게 사랑하고 사랑하던 제 일상에 금이 가, 태형은 저가 오늘을 살아가는 건지 미련에 잠겨 죽어가는지 분간을 하지 못하게 됐다. 맞물리던 톱니바퀴엔 먼지가 낀 지 오래다.
의자에서 일어난 태형이 비척비척 베란다로 걸음을 옮겨 파리의 야경을 내려다 봤다. 황홀한 정경, 귓가에 잔잔히 내려앉는 여름의 사그락거리는 소리. 왜인지 숨이 막혀오는 바람에 난간에 기대 연신 쿨럭였다. 손안에 들린 와인색의 반지 케이스를 응시하며 태형은 잠시 던져버릴까도 싶었다.
짤그락ㅡ
제 몸을. 그저 이여주가 바라던 낭만 속에 한없이 떨어지고 싶었다. 그게 가장 알맞는 결말이니까. 나는... 너와 함께 죽었어야 하니까.
"...잘 자. 여주야."
이내 생각을 그친 것은, 파리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었다.

둘째 날에는 여주가 그토록 원하던 루브르 박물관에 발을 들였다. 태형은 원체 성향이 무뚝뚝하고 감수성을 잘 타지 않는지라 미술품을 봐도 딱히 이렇다 할 감상은 없었다만, 하나하나 훑으며 머리에 빼곡히 담아뒀다. 개중에는 어딘가 눈에 익은 그림이 있었는데, 여주가 예전에 과제로 낸 모작의 원본이었다. 베수비오 화산. 자세히 보니 음습한 감이 있는 원본과는 다르게 그녀의 것은 파릇파릇한 색채가 있어 태형의 마음에도 꽤나 들었었다. 되게 자랑했었지. 칭찬 좀 더 해줄 걸 그랬나. 멀거니 감상하다 눈아래가 점점 얼얼해졌다. 태형은 슬 뒷걸음질 치며 눈가를 훑는다.
"아..."
...왜 또. 찌질하게, 멍청하게, 바보 같이. 태형은 자책했다.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이여주는 세상에서 궁상떠는 인간이 제일 싫다고 했다. 이미 흘러간 일은, 그냥 흘러가게 두라고. 구태여 붙잡으려 애쓰지 말라고. 그 말을 들은 태형은 그녀 앞에서 늘 쿨하게 보이도록 갖은 수를 썼으나 결국엔 본질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김태형은 아주 궁상맞은 놈이었다. 뭐든 한이 되면 좀체 잊지를 못해 나중에 보면 그게 꼭 뒤끝으로 남아 있고, 사소한 말실수 한 번에 심장이 벌렁거리는 인간형이다. 그러니 이 여행은 시작부터 글러먹은 거다.
"병신 같은 게, 내가 뭘 하겠다고..."
제 딴엔 구질구질하게 붙들고 있던 것들을 털어버리고자 온 것이었으나, 발길이 닿는 곳 족족 트라우마로 되살아나 전신을 휘감았다. 최악 중의 최악. 조금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김태형은 미술관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주변의 모두가 쳐다봤지만 지금의 그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쓸 만한 재량이 없었다. 제 무릎에 얼굴을 억척스레 묻었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여주가 있을 것 같았다. 개구진 웃음으로 다가와선, 괜찮냐며 양손을 꼭 잡고 일으켜 줄 것만 같았다. 그럼 태형은 싫은 기색도 없이 곧장 그 품에 안겨서 눈물을 쏟아내는 거다.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보고 싶다고. 그냥... 나도 그때 같이 가면 안 됐었냐고.
여주의 일 이후로 태형은 생기를 잃은 채 살았다. 걱정되어 이따금 찾아오던 지인들도 굳세게 걸어잠긴 현관을 목전에 두고 돌아가길 반복했다. 힘겹게 들어간 회사를 단번에 퇴사하고서, 나날이 저를 우울로 내몰던 차에 여행을 결심한 계기는 방 벽에 달라붙어 있는 달력이다. 8월 17일에 동그랗게 쳐져 있는 빨간 펜 자국. 여주는 날짜가 꽤 많이 남아 있음에도 몇 달 전부터 신나하며 앞으로 있을 여행을 그렸다. 그래서 갔다. 떠난 이의 흔적을 좇는 일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지만서도 태형은 스스로 그렇게 하길 자처했다. 그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여주의 부재가, 제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

파리의 밤이 까마득하게 드리웠다. 태형은 여주가 계획표를 세세히 적어놓은 노트를 꺼내 끄트머리에 명시된 와인을 샀다. 알콜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 종류고 맛이고 다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일단 사고 본 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서 중앙을 차지한 라운드 테이블 위에 와인을 올려뒀다. 코르크를 벗기자 알싸한 향이 풍겨나왔다. 태형은 그 옆에 반지 케이스를 올려둔다. 처음으로 벌어진 곧은 케이스 새로 다이아가 박힌 반지가 광을 냈다. 중앙에 맺힌 빛이 너무나 영롱해서, 태형은 저가 홀로 여행을 왔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지경이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수룩한 달빛이 바닥을 기며 밀려들어온다.
"...이여주, 네가 그랬지."
우린 진짜 안 맞을 거라고. 결혼 전에도 이렇게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는데, 결혼하면 또 어떻겠냐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주는 활달한 반면 태형은 차분하다 못해 무기력한 성정이었으니. 주말마다 데이트 코스를 짜오는 그녀를 따라주느라 그로서는 영 기빨리고 힘든 일이었다. 입맛도, 취향도 다를 수 있는 건 전부 다 달랐다 봐도 무방했고. 그럼에도, 둘은 자그마치 5년을 사귀었다. 어찌저찌 해도 좋아서. 김태형은 이여주가 좋아서. 우리가 결혼하면 지독히도 안 맞을 걸 알지마는, 그건 내가 다 맞춰주면 되는 거잖아. 늘 말했다.
"우린 진짜 잘 맞을 거야. 여주야."
"설령 안 맞아도 내가 다... 내가 다 좋아할게."
"예전에 말했던 놀이공원도 가고, 네가 봐놨던 카페도, 집 앞에 영화관도. 가고 싶은 데는 어디든 다. 다 가보자."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는 손짓이 떨려온다. 잘게 요동치는 손마디끝에 다이아가 걸렸다. 내가 정말... 볼품없는 사람이지만. 프로포즈도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아서 예쁜 반지랑, 멋진 야경도 깔아놨는데. 태형이 느릿하게 반지를 쥐었다. 애를 써 봤으나 이젠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어쩔 새도 없이 뺨이 축축히 젖어갔다. 태형은 프랑스 파리에서 울지 않기 위한 수많은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봤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마른 줄만 알았던 눈물샘이 일순 터져나온다.
"여주야. 난...-"
테이블을 등지고 일어섰다. 창가로 향해 걸어간다. 커튼을 헤치고, 그는 제 손에 자리잡혀 있는 반지를 응시했다.
"꼭 말하고 싶었어."
"내가 정말... 말재간이 없어서, 되게 감동적인 말은 못 하겠는데."
"...."
"그래도. 이건 꼭 말하고 싶었어."
오늘 밤, 그토록 사랑하는 너에게 끼워졌어야 했을 반지. 이 정처없는 반지가. 이 애타는 고백이. 이, 어렴풋한 사랑이.
"사랑해."
그는 하염없이 울고 말았다. 내가, 내가 많이 사랑해. 오 년동안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난 매번 그랬어 정말. 난간에 힘없이 기대어 주저앉는다. 태형은 몇 번을 겪어도 여전히 이별에 면역이 없다. 그래서 늘상 삶의 모든 순간에 있어 만남도 주저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고 싶어. 만지고 싶어. 아니 그냥, 뭐라도 한 마디만. 한 마디만 더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간곡히 만남을 기다렸다. 단 한 번, 너의 마지막에, 내가 그 곁에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할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그 어떤 사무치는 아픔이더라도.
태형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없는 이여주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 여행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여주야."
"그러니까..."
여지껏 못다 한 말, 그 중에서도.

"나랑 결혼해줄래?"
가장 커다란 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