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더랬다

천리향

편지는 간만이라 많이 서툽니다. 

잘 가셨는 지 모르겠소만 어쨌거나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하오. 그쪽은 무슨 계절인 지 잘 모르오나 이곳은 봄입니다! 산뜻한 날씨에 더운 바람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은 모두 당신 탓임을 반쯤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 매정하게도 먼저 두고 가게 되어 차암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감히 아랫사람이 되어선 먼저 가버리다니, 천하의 공자도 공노하여 뛰쳐나올 이야기 아니외까?  

사실 공자가 뭐라던 맹자가 뭐라던 내 알 바가 아니오만 이리 쓰면 조금이라도 격식 차리려 했단 것을 알아줄까 싶어 넣은 구절이니 놀릴 생각 일랑 하지도 마시오. 진솔하게 털어놓자면 나는 그간 꽤 나쁘지 않게 지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뾰조록한 우듬지에 올라가 최고의 정경을 내 이 두 눈에 담았고 때 마침 살핏하게 날아오는 화우에 얼마나 들뜨던지,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게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만물이 이리 고운 지 몰랐습니다. 아, 그거 아셨습니까, 저번에 말입니다. 양민들을 구제한다느니 어쩌느니 하여 꽤 규모가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기이하게도 다친 건 우리 둘 뿐이었소. 이것 쯤은 아시고 계시겠지. 그런데도 나는 얼굴에 칼집이 났고, 당신은 옆구리에 이상한 철 쪼가리 하나 커다랗게 박혀 와서 내 고생 깨나 했지. 중요한 건 여기부터요. 가는 길에 어린 아해 하나가 다가와서 뭐라 말했는 지 아오? 꽃 한 송이를 건네주며 주변에 볼 게 많다고 주위를 보면서 걸어라 하더이다. 그때는 대강 웃어 넘겨 머리를 쓰담아주고 발걸음을 했소만 어떻게 생각하면 팔십이나 처 먹은 노인네 보다 고작 대여섯 먹은 아해가 더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을 내 잠시 했소. 

그런데 그 뒤에 또 다가오는 육중한 사내 하나가 뭐라 말한 지는 아시오? 당신은 그때 골골대며 침상에서 쉬고 있었을 터라 들은 건 없을 거요. 글쎄, 이런 그 쉬웠다는 전투에서 왜 다쳤느냐, 우리를 보고 더 열심히 싸울 생각은 안 했냐 묻더랍니다. 그리고는 전표 네 다섯을 건네들고서는 싸우며 허물어진 주루와 전각들의 수리 비용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부아하여 누가 그딴 소리를 지껄였냐 물으니 금세 기세가 잦아들면서 바들바들 잘도 떨리는 손 모가지로 사람 하나를 가리켰소. 양민들의 피해는 없었으니 으레 그리 생각할 줄도 모르나 가리킴 당한 그 치는 내 곁에서 함께 싸우던 이였소. 전투를 몸소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잘난 꼴 자랑하고자 남을 깎아내리고 공로를 죄다 묻고는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천치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소. 말이 많이 길어졌구려. 어찌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요. 세상천지 그런 치들이 널렸으니 굳이 당신 목숨 갈아가면서 평화를 찾으려 하지 마시오. 평화는 모든 이들이 합심하여 염오하지 않아야 근본적인 겉모양이 잡혀지는 데 내가 말한 이들이 널린 게 이 속세요. 평화를 되찾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먼저 방패가 되려고도 하지 마시오. 사회악은 존재할 수 밖에 없으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평화는 절대 오지 않을 거요. 만약 그러한 것을 당신의 목표로 잡는다면 당신도 그 치들과 똑같은 등신임을 알고 계시오. 

내가 죽을 걸 알면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수반한 것은 순전히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두겁을 쓴 검귀가 아닌 인간이오. 그래봤자 내 말은 다 도외시하고 사람이나 죽죽 베어 댈 거면서.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하면 나중에 죽을 때가 됐을 때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거요. 흥. 하여간 처세술이고 뭐고 하나도 모르는 양반이.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고.

혹시 해서 말 하는데 칼 집어 넣으시오. 농이오.

한 번 더 진솔해지자면 다 죽어갈 때가 되니 회한이 맺히더랍니다. 가는 길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준 게 퍽이나 아쉬워 옷소매 끝동만이라도 잡아드릴 걸 하오. 다 뒈지고 망하니 그제서야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우리가 얼마나 무모했는 지 알게됐소. 산뜻하게 부는 것은 삭풍이 아니라 봄 샛바람이었고 뿌옇고 희끄무레한 것은 적군이 쳐 둔 연막이 아닌 청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소. 우리는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너무 멀리 왔고 꽉 막혔지요. 회생하여 다시 시작하게 된다해도 나는 지금처럼 살 겁니다. 딱히 당신한테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살아라 방향을 제시해 줄 순 없으나 그냥 쉬고 싶을 땐 하늘을 보고 주변을 한 번 둘러 보시오.

춘야에 암향의 공기까지 무엇하나 거슬리는 게 없소. 찌르르 울어대는 초충들의 소음과 각 천뢰의 소리가 적절히 아울러져 내 눈에도 파도가 입니다. 그렇다고 일찌거니 내 곁에 올 생각은 마시고 질리도록 하늘을 눈에 담고 오시오. 이제 내려다보기만 하니 올려다보고도 싶은 것이 미리 좀 볼 걸 그랬소. 혈향 폴폴 풍기며 오지도 말고 좀 씻고도 오시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자시고 그 좋아하는 분주도 마음껏 마시고 오시오. 

연모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아시오? 그리워하면서 사랑한다는 뜻이라오.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서두에는 몰랐건만 끝자락이 다 되니 뜻이 이해가 됩니다. 이제 나는 온전히 당신을 연모합니다. 사모하고 경애하고 또 애경합니다. 

그러니 모든 게 다 끝나면 다른 이 말고 내게로 뛰어오면서 말해주시오. 당신 내 곁에 올 때 즈음에 마중이나 가볍게 나가겠으니 그대로 나를 끌어안고 말해주소. 이 세상이 아름다워졌다고, 네 말 대로 만물이 이리 아름다운 지 내 차마 몰랐다고. 황홀경에 도취한 천하 제 일로 고운 눈망울을 보여주면서 그리 말해주시오.





눈을 떴다. 아직 땅거미가 지는 걸 보니 낮잠을 잔 게 필히 원인이라. 쓰게 웃었다. 더이상은 볼 수 없는 이의 편지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해진 것 같기도 하다. 무덤덤해지는 게 점점 잊혀져만 가는 것 같아서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가 않아 절망했다. 

난 이제 네 얘기가 나와도 무덤덤하다. 그 사실에 다시 한 번 무너진다.

시간이 지나 하늘이 어둑해지는 밤 희미하게 들렸다 사라진 마지막 한 줄기 미련이었다.





내가 구구절절 봄이니 어쩌니 하며 편지를 쓴 이유는 모두 나의 미련과 미욱함의 난잡한 부산물이리라. 끝까지 이기적이라 미안하오만 님만은 살아계셨으면 하오. 나야 이미 뒈졌으니 편하게 그딴 소리나 지껄인다 타박할 지라도 여기서라도 볼 수 있게 명줄 단단히 붙잡고 계시오. 동귀어진 하면 내 그 길로 당장 가서 등짝에 칼 하나 꽂아 넣을 생각이니 그리 아쇼. 

뭐.. 내가 뒈졌으니 당신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지. 나도 연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