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해가 웃을 때

《노란 해가 웃을 때》 4화

규칙 셋, 약속 하나


새벽 이슬이 마르고 난 뒤의 볕이 안뜰 돌길 위로 가늘게 스며들었다. 행랑채 앞마당, 세 개의 과녁이 제각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노아가 활시위를 당겼다. 고요한 순간이 흘렀다. 놓인 시위와 함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과녁 중심을 꿰뚫었다.


퍽—


“이른 시간부터 활 연습을 하시는군요.”


내 말에도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고, 호흡을 가다듬은 채 겨냥했다.


“오후에는 비구름이 몰려올 기세라.”


두 번째 화살이 첫 번째와 나란히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박혔다. 

그제야 노아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가에 스치는 미소가 아침 햇살처럼 은은했다.


“반했나? 눈빛이 너무 뜨거운데”


그의 능글거리는 말을 못 들을 척 했다.


“...장부에 오차가 생겨 오늘 집안이 다소 어수선할 예정입니다. 그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노아는 과녁까지 걸어가 화살 두 대를 뽑아내더니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한 번 해볼 생각은?”


“활을 말입니까?”


“복잡한 일이 있을 때 몸을 움직여야 마음이 정리된다.”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나는 시위에 손을 대었다. 

손바닥에 활나무의 결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노아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또렷했다.


“손목에 힘을 주지 말고, 어깨는 자연스럽게 내려.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잠시 머무르다가–.”


시위를 놓자마자 화살은 과녁의 흰 테두리를 스치고 지나쳐 흙바닥에 박혔다.


노아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과 똑같구나“


“제가 활을 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 그의 손끝이 내 소매 위로 팔꿈치를 가볍게 받쳐 올렸다가 놓았다. 피부에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전율처럼 전해졌다.


“허리는 반 걸음만 뒤로 물리고. 다시 해보자. 손목의 힘을 빼고 손가락 두 마디만으로 시위를 거는 거다.”


이상하게 호흡이 가라앉았다.


“지금 바람이 왼편에서 불어오는구나. 과녁을 쳐다보지 말고 고요함을 바리봐라.”


나는 숨을 멈추었다. 시위를 놓았다.


툭—

이번에는 검은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노아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우연이겠지요?”


“아니. 방금 진정으로 ‘머물렀던’ 순간에 놓았다.”


그가 말했다.


나는 활을 내려놓았다. 노아가 그것을 받아 행랑채 기둥에 기대어 놓았다.


“활쏘기는 여기서 마치자.”


그가 내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장부에 오차가 생겼다고 했지. 장부가 어긋난 날에는 온 집안이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니. 그대는 소란을 싫어하는 편이지?”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용하게 해결해보지 않겠어? 가자.“





대청마루에 앉자 곳간지기가 장부를 내 앞으로 펼쳐놓았다. 밤새 고민했던 숫자들이 다시 눈앞에 어지럽게 펼쳐졌다.


“오늘 들어온 목재 세 묶음 중 한 묶음이 도착하지 않았군요. 사정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마부가 갓을 벗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으며 대답했다.


“새벽에 남대문길이 진창이어서 서소문으로 길을 돌렸습니다. 통행세가 예상보다 더 들어서… 그래서 두 묶음만…”


“계약서에 우회로 인한 추가 비용에 대한 조항은 없었습니다.”


나는 장부의 빈 여백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사전 보고도 없이 추가 비용을 청구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납니다.”


마부의 입술이 바짝 말라 들러붙었다.


“그 길이 워낙 험해서…”


그때 뒤편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노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어제 시장 시세가 삼 푼 올랐다고 들었는데 이 장부에는 닷 푼이라고 기록되어 있군. 맞나?”


곳간지기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순간 나는 시선을 올렸다. 그는 아직 장부를 직접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문제점을 짚어냈다.


노아는 더 가까이 다가오지도 내 역할을 대신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마디만 더 보탰을 뿐이었다.


“우회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다만 사전에 알렸느냐가 관건이겠지.”


마부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보고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장부 여백을 바라보다가 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만 나에게 맡겨볼 생각은 없나? 장부는 그대 앞에서만 펼치지.”


예상치 못한 제안에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오늘만 그렇게 하죠. 신세지겠습니다.”


“믿어주어 고맙다.”


노아가 벼루를 가까이 끌어당기곤 붓끝을 먹물에 적셨다.


“장부를 내 쪽으로 조금만 돌려주겠나.”


곳간지기가 장부를 내 쪽에서 우리 사이 중앙으로 밀어놓았다. 노아는 한 장, 또 한 장 차근차근 넘겨가며 훑어보았다. 계산 부분은 손끝으로만 짚어보며 확인했다.


“좋다. 기준을 이렇게 세워보지.”


노아가 붓을 들어 여백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우천·우회 시 사전 통지 의무>
1.추가 비용 상한선은 시장 평균가로 측정한다.
2.미통지 우회분은 추가 비용의 절반만 인정하며
3.우회 시각·경로는 서면 보고하고 통행증 첨부 필수로 한다.


적는 내내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였다.


“오늘 건은 여기 적힌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동의하는가”


쩔쩔 매고있던 마부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네..동의합니다.“


”그대는 어찌하겠어.“


“허락합니다. 제 이름으로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노아가 마지막 줄을 마치고 붓을 놓았다. 마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새벽 문 열기 전에 다시 와라. 사유서에 우회 시각과 경로를 상세히 적고, 서소문 통행증을 함께 제출하면 된다.”


“예!”


마부가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노아는 더 이상 장부를 넘기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붓끝을 정갈하게 닦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별지에 지금 적은 조항들을 옮겨 정식 약정서를 작성하지. 오늘 허용한 절반 인정분은 전례가 아니라 특별 조치임을 명확히 기록해두고.”


“예! 분명히 적어두겠습니다.”


마부가 답했다.


나는 결재란을 앞으로 당겨 서명을 마쳤다. 

장부 표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께도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노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이곳에서 기다리지.”


_______


마루로 돌아온 나를 발견한 노아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눈길을 마주쳤다.


“잘 마무리되었어? 이제 좀 조용한가?”


“네, 덕분에 승인받았어요.“


어제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는 웃었다. 가볍지만 오래 흉내내기 어려운 웃음.


“규수 아씨께서는 참 무뚝뚝하시군. 그렇게 고마워하신다면 나와 놀아주실 생각은 없으신가? 어제는 내가 아씨를 놀아드린거고. 오늘는 아씨께서 직접.”


“제가요?”


“그래. 규칙 세 가지를 정해서 지키는 거로”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들어는 보겠습니다.”


노아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또박또박 설명했다.


“첫째. 그대가 고개로 승락하시면 따르고 거부하시면 그 즉시 멈추지.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좋네요. 다음은요?”


“둘째. 내가하는 질문에 답을 해줄 것. 이것 또한 싫으면 답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죠.”


“그리고 마지막은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 여기까지. 그럼 첫번째 질문. 그대는 평소 이 시간에 무엇을 하나?”


“독서를 합니다.”


“역시 규수다우시군.”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것을 하시지요.”


“아니. 오늘은 내가 너를 따른다. 네가 궁금하거든.


_______


서고. 

어젯밤 빌려온 책 일곱 권이 반듯하게 쌓여 있고

맨 위의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노아가 책더미를 살펴보았다.


“책갈피가 여섯 개군. 남은 한 권이 지금 펼쳐진 그 책이겠지. 정말 그걸 다 읽었어.”


문장 끝을 찍고 나서야 시선을 올렸다.


“관찰력이 뛰어나시네요.”


“원래 세심한 편이다.”


그가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한쪽 발목을 편안하게 접었다.


“방해하지 않으마. 옆에서 조용히 있지.”


“…마지막 규칙인가요?”


“이건 규칙이 아니라 약속. 그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그는 마루 끝자락에 앉아 도포 자락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리 사이에는 손 한 뼘 정도의 거리. 그 정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나는 다시 활자 속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 줄, 두 줄. 호흡이 고르게 이어지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세 장쯤 지났을 때 낮은 목소리가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봄빛이 깊어갈수록 사람의 말은 얕아진다.’”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행이 더 핵심이지요. ‘얕아진 말 아래로 진심이 들여다보이니까.’”


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오늘은 진심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잘하고 계시잖아요. 조금도 꿰뚫어볼 수 없으신 분인데요.”


“그렇군.” 


그는 짧게 대답하고 옆에 놓인 시집을 펼쳤다.


정말로 조용했다. 

기둥을 따라 스며든 빛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살짝 얹혔다가 미끄러져 내렸다.


차를 마시려다 잔이 기울어져 찻물이 넘칠 뻔했다. 바로 그때 그의 손이 재빠르게 잔을 받쳤다.


“어찌 손으로–! 괜찮습니까?”


순간 손과 손이 맞닿았다. 그는 잔을 안정시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책은 아쉽게 됐구나. 소중한 책인가?”


노아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이야 대수입니까?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얼음물을 가져와라!”


“그럴 것 없이 ‘호—’ 해 주면 될 텐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멀쩡하네요.”


”네 걱정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


그가 빙그레 웃었다. 

말끝이 닿자마자 볼이 데운 듯 뜨거워졌다. 

난 이런것에 면역이 없는 것 같다.

마침 소희가 문을 밀고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아, 얼음물은 됐다. 물러가라.”


“아기씨, 그게 아니라 손님께서…”


손님? 말하기도 전에 웃음소리가 먼저 흘러들었다. 

듣기 좋은 음색이었지만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들어가도 되지요?”


문이 열리자 선홍빛 기운이 확 스며들었다. 

비단 치맛자락이 물기를 털며 반짝였고 빗방울 한두 개가 바닥에 떨어져 튀었다.


“윤서련이라고 해요. 영평부원군 윤씨 댁의 외손입니다.”


그녀는 우아하게 목례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댁 어른께 문안드리러 왔다가 마침 비가 와서 잠시 비를 피하러 들렀어요.”


서련은 가벼운 인사를 건넨 뒤 거의 동시에 노아를 바라보았다.


“노아야.”


호칭에 예는 없었다. 오래 알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거리.


“서련.”


눈끝이 얇게 휘었다. 

‘뭐야 저 눈웃음은.’

나에게 보여준 눈웃음과는 다른 종류였다. 

마치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


“오랜만이야.”


그녀는 젖은 소매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


“돌아왔다는 소식만 듣고 얼굴을 못 봐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그러게. 잘 지냈나?”


짧은 정적이 앉았다.


‘...연인 상봉이 따로없네.‘


나는 책을 덮었다. 


“비는 거의 그쳤습니다. 사랑채로 가시면 더 편하게 대화하실 수 있게 마련하겠습니다.”


“잠시만.”


서련이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노아의 정혼자인가요?”


“맞습니다.”


서련의 눈꼬리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부드럽게 누웠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내가 빼앗아 가는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서련의 미소가 한 올 더 얇아졌다. 그녀는 노아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소매가 노아의 도포 자락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나는 미소만 지었다.


“..제가 아씨를 붙잡아 둘 처지는 아니지요.”


서련은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나를 의식했다.

누가봐도 적대적인 태도로.


“그럼 노아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뵙지요”


“–그대는 어찌하라 하겠어.“


노아가 나에게 묻듯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숨이 한 번 막혔다. 지금 이 와중에 나한테 묻는다고?


“…”


내가 답을하지 않자 그는 낮게 덧붙였다.


첫째, 그대가 고개로 ‘예’라 하면 따르고, ‘아니오’면 그 자리에서 멈춘다.”


서련의 미간이 눈치 못 채게 접혔다. 


노아가 이어서 말했다.


둘째, 내가 하는 물음에 답해 주되, 싫으면 침묵해도 좋다.”


그 순간 공기 결이 살짝 바뀌었다.


나는 당황하여 책을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다녀오십시오. 저는 책을 정리해야해서”


“그대가 그렇다면… 그럼 이따가 보자. 다녀오겠다.”


잠깐 눈을 돌려 본 서련의 얼굴은 여전히 공손했으나 입꼬리 끝선이 아주 조금 굳었다. 얼굴빛엔 얇은 화가 스쳤다.


“곧 돌아오지.”


“네.” 


나는 시선을 들지 않고 답했다.


화가 날 법도한데 서련은 끔찍할 만큼 예의 바른 미소로 마무리했다.


“실례할게요. 어른들 일도 있고 오랜만에 만난 인연과 나눌 말도 많아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마루 끝으로 멀어졌다.

노아가 돌아서다 말고 내 쪽을 다시 보았다. 

말없이 걸린 눈빛. 조금만 더–. 하고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매달리는 시선이었다.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따로 있으면서… 왜 나에게’


그 표정이 너무 진심같아 속을 뻔 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손끝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내 얼굴이 벌겋게 올라앉고 있음을


4화 규칙 셋, 약속 하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