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오후5시
2
외부 미팅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건물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 거리에서 석진은 잠깐 멈춰 섰다. 낮에 봤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지도는 켜져 있었지만, 화면 속 길과 실제 골목이 좀처럼 겹치지 않았다. 비슷한 모퉁이와 비슷한 간판이 반복됐다. 몇 번을 방향을 바꿔도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일 텐데, 분명 몇 번 와본 동네인데도 낯설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다.
방향을 바꿀수록 확신은 줄어들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낮에 지나쳤다면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거리였다. 낮은 건물들, 닫힌 셔터, 불이 꺼진 간판들. 사람 소리 대신 어딘가에서 나는 에어컨 실외기 소리만 낮게 울렸다.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차를 부를 마음은 나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서 있고 싶었다. 그때, 골목 끝에서 불이 하나 보였다. 다른 불들과 달리 밝지 않았다. 눈에 띄게 환하지도 않았고 멀리서도 광고처럼 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꽃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꽃다발이 아니라, 흙에 심긴 화분들이었다. 말려 있지도, 과하게 손질돼 있지도 않은 상태 그대로의 것들.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방향을 다시 잡기 전에, 잠깐 멈출 장소가 필요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공간.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여는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여기 꽃집 맞죠?”
“네.”
.
.
3
문이 닫히자 종소리가 짧게 울렸다. 석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꽃집 안에서와 달리, 밖은 금방 어두워졌다. 골목의 불빛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고, 방금 전까지 있던 조용한 공기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실히 갈라져 있었다. 손에 들린 화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에 둘 생각이라서요.’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로 꺼냈을 때보다 지금 손에 들고 나와 보니 더 실감이 났다. 집에 뭔가를 들인다는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은 늘 이미 갖춰져 있었고, 부족하면 누군가가 채워주었다. 스스로 고른 물건이라고 해봤자, 계절마다 바뀌는 넥타이나 셔츠 정도였다.
꽃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물건이었다.그는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아까보다 방향 감각은 더 흐릿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초조하지는 않았다. 석진은 몇 걸음 벗어나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 위치 보내줄게요.”
“네, 대표님 차량 바로 대기시키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서야 그는 손에 들린 화분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의 조용한 공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가게 안과는 달리, 바깥은 다시 빠르게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골목 끝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졌다. 검은 세단이 천천히 다가왔다. 석진은 차 문이 열리기 전, 한 번 더 화분을 봤다.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는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조심해서 실어주세요.”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골목이 멀어졌다. 꽃집 간판도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석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중,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물건 하나가 지금 그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4
집에 도착했을 때, 안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자동으로 켜진 조명이 거실을 고르게 비췄고, 석진의 집은 지나치게 정돈된 공간으로 누가 머무는 집이라기보다는 준비된 전시장에 가까웠다. 석진은 현관에 서서 잠깐 화분을 내려다봤다. 이 집에 들어온 물건들 대부분은 필요해서였거나, 누군가가 대신 정해준 것들이었다. 스스로 고른 물건은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화분은 유난히 낯설었다.
“이걸 왜 샀지.”
낮게 중얼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화분은 곧바로 창가에 두고 한 발 물러났다. 낮에는 햇빛이 들 것 같다는, 그 정도의 이유였다. 잠깐 서서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그는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넘기다 멈췄다. 검색창에 몇 글자를 입력했다가 지웠다. ‘꽃집 이름이 뭐였더라.’
간판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들어갔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 기억을 더듬어 다시 검색했다. 동네 이름, 숨을 고르는 꽃. 사진 몇 장이 떴고, 낮에 봤던 유리창과 비슷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이름을 한 번 읽고, 화면을 껐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화분은 그대로 있었다. 아무 변화도, 소리도 없었다. 석진은 침실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바로 잠들지는 못했다.집은 여전히 완벽하게 조용했다.
다만, 그날 밤에는 의미 없는 여백이 하나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5
다음 날 저녁, 석진은 퇴근길에 차를 조금 돌아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의도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핸들 방향을 트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어두웠고 늦은 밤이였다. 가게 대부분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그 꽃집만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이 보였다. 어젯밤 꽃을 골라 준 그 여자였다. 그녀는 가게 안쪽에서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모습이었다.
석진은 차를 급히 길가에 세우고 시동을 껐다. 문을 닫는 소리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해졌다. 화분 바닥이 끌리는 둔한 마찰음, 그리고 짧게 내뱉는 숨소리.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어—”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양팔로 커다란 화분을 끌어안은 채였다. 중심이 잘 잡히지 않는지, 몸이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잠깐만요.”
석진은 말과 동시에 다가가 화분 한쪽을 잡았다. 생각보다 무게가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녀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와… 감사합니다. 진짜요.”
말투는 숨이 차 있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난처함보다는 들킨 사람처럼 조금 민망한 웃음이었다.
“혼자 하시기엔 무거워 보이던데요.”
“네. 딱 그 생각 하면서 옮기고 있었어요.”
“어디로 옮길까요?”
“아 이쪽이요. 바닥 조심하셔야 해요, 흙 좀 흘려서.”
석진은 그녀가 말한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화분이 바닥에 닿는 순간, 둔한 소리가 났다. 두 사람 동시에 손을 놓았다.
“하… 살았다.”
그녀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손등으로 이마를 한번 훑고는, 석진을 봤다.
“어제 오셨던 분 맞죠?”
“네.”
“이 동네 자주 오시나 봐요?”
“아니요. 근데… 어제 산 게 생각나서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화분.”
“네.”
“아직 잘 있죠?”
“네. 아직은요.”
“아직이면 충분해요.”
그 말투는 이상하게 가벼웠다. 괜찮다는 말보다, 괜찮아질 거라는 쪽에 가까운.
“근데 진짜 타이밍 좋으셨어요.”
“왜요?”
“이거 혼자 하다가 오늘 여기서 쓰러질 뻔했거든요. 이것도 하나만 더 옮기면 끝인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어디로 옮기면 되나요?”
그녀가 잠깐 그를 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6
그녀는 잠깐 그를 보더니, 화분 옆에 서서 장갑을 낀 손바닥을 바지에 슥 문질렀다. 흙이 묻은 자국이 그대로 남았지만,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바로 석진에게 깨끗해진 장갑을 건네주었다.
“아, 근데 계속 이렇게 도와만 주시고….”
말을 흐리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저는- 여긴 제 가게고요. 이름은… 제가 안 알려드렸죠? 여주에요. 임여주!”
석진은 장갑을 건데 받으며 잠깐 그녀의 손을 봤다. 꽃집에서 본 손들보다 훨씬 생활감 있는 모습이었다. 흙이 묻고, 손톱 끝에 물든 초록색 자국이 있는 대부분의 꽃가게 사장들이 비해 여주의 손은 공주님 손이라고 해도 될만큼 상처 하나 없었다.
“김석진입니다.”
“아, 석진 씨. 저는… 그냥 여주라고 불러주세요.”
“사장님 아니고요?”
“아, 그런 거 안 써요. 여기선 제가 사장이면서 직원이고, 잡부여서요.”
말하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석진은 그 반응이 생각보다 웃겨서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럼 여주 씨.”
“네.”
“이건 어디로 옮기면 되죠?”
그가 화분을 가리키자, 여주는 금세 다시 일 모드로 돌아왔다.
“아, 저기요. 창가 쪽 말고, 안쪽 벽으로 붙여야 해요. 밤에 좀 춥거든요.”
“꽃도 추위를 타나요?”
“사람보다 예민해요. 티는 안 내는데 다 느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석진은 화분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가게 안은 낮보다 더 조용했고, 흙 냄새와 물기 섞인 공기가 은근하게 감돌았다.
“석진 씨는 꽃 잘 키우실 것 같아요.”
“왜요?”
“물어보는 거 보면요. 대충 안 두실 스타일 같아서.”
“그건… 처음이라서요.”
“처음이 제일 신경 쓰이긴 하죠.”
여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