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4.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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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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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석진은 평소처럼 꽃집을 자주 찾았다. 작은 화분 하나를 고르거나 물을 주는 날도 있었고, 그냥 가볍게 얼굴만 보고 가는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여주는 장갑을 벗고 손을 털며, 살짝 웃거나 눈을 깜빡이며 말을 건넸다.

 

 

“석진 씨, 오늘도 오셨네요.”

“네. 오늘도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요.”

“우와 커피다. 매번 고마워요.”

"뭘요. 좋아서 사주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어색함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눈빛, 작은 농담, 화분을 가리키며 주고받는 가벼운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꽃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섞이면서, 석진이 오는 날은 가게 안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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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날은 , 비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해 기울 무렵이 되자 더 굵어졌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가게 안 풍경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밖에서는 지나가는 차 소리마저 둔하게 들렸다. 여주는 문 옆에 놓인 작은 화분 몇 개를 안쪽으로 옮기고, 젖은 바닥을 천으로 한 번 훑었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가 흙 냄새와 섞여 가게 안에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한 박자 늦게 들렸다. 여주는 고개를 들었다. 석진이 우산을 접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코트 끝자락과 신발이 조금 젖어 있었고, 손에는 익숙한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석진은 우산을 벽에 세워 두고, 자연스럽게 컵 하나를 내밀었다.

 

 

“비 많이 와요.”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춥겠다.“

“괜찮아요.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거예요. 아이스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센스 있으시네요.”

 

 

여주는 컵을 받아 들고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가 천천히 전해지자, 굳어 있던 손끝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석진은 말없이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창가 쪽 화분 앞에 멈춰 섰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빛이 잘 들던 자리가, 오늘은 흐린 회색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쪽 화분들, 비 오는 날엔 괜찮아요?”

“네. 오히려 이런 날이 좋아요. 조용해서.”

 

 

여주는 말하며 잎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살짝 털어냈다. 석진은 그녀의 손동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옆에 놓인 작은 화분을 들어 올렸다. 흙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물은… 오늘 안 줘도 되겠네요.”

“네. 알아보시네요. 이젠 나보다 더 전문가야”

“그럼 월급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바로 돈 얘기 나오는 거예요?”

“전문가는 유료죠.”

 

여주는 코옷음을 치며 석진이 사온 커피는 음미하며 마셨다.

 

“그럼 오늘은 체험 근무예요. 무급.”

“무급이면 퇴근도 마음대로 해도 되죠?”

“안 돼요. 제일 바쁠 때 갈 거죠? 절대 못 가지~”

“이상하네. 사장님이 제일 불공정하시네.”

“대신 커피는 무한 제공.”

“아, 그럼 얘기가 달라지죠.”

 

 

석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고, 여주는 그 모습을 흘끔 보다가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빗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며 길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방금까지 오가던 농담이 가게 안 공기 속에 남아, 괜히 웃음이 가시지 않는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봤다. 비에 젖은 도로 위로 자동차 불빛이 번지듯 퍼졌고,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산 아래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달리 가게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빗소리와 함께, 화분에서 올라오는 흙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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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석진은 평소처럼 퇴근 후 꽃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무심코 내려다본 순간, 화면 위에 뜬 이름 하나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김상철.

 

 

아버지다. 그가 보낸 짧은 진동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는 단출했다.

오늘 저녁, 본가로 와라.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늘 그랬다. 묻는 건 선택지에 없다는 듯한 문장이었다. 석진은 한숨을 삼키며 휴대폰을 잠시 쥐고 서 있었다. 오늘따라 꽃집 문을 밀고 들어가면 보이는 그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가, 이내 화면 속 문자에 의해 지워졌다.

그는 방향을 바꾸기 전, 잠깐 망설이다가 메시지 창을 열었다.

 

 

석진:
여주야, 바빠요?

 

잠시 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여주:
아뇨. 괜찮아요. 왜요?

 

 

석진:
별건 아니고 오늘 회사가 너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서요.

 

 

여주:
음…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화분들이랑만 놀아야겠네.

 

석진은 잠깐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무심한 듯 다시 답장을 보냈다.

 

석진:
그 말투가 더 문제네요.

 

곧바로 한 줄이 이어졌다.

 

석진:
가게 비워두기 미안해질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석진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상철의 부름보다 꽃집 생각을 더 하고 있었다.

 

 

 

 

13

본가에 도착했을 때, 집 안에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부엌을 제외한 모든 공간은 여전히 고요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넓은 공간 어디에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석진은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에는 아버지가 앉아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석진을 향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그가 올 걸 알고 있었고, 굳이 반길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석진은 그 시선을 기다리지도, 부르지지도 않고 조용히 거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 준비가 다 끝났고 본가의 식탁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석진. 식사는 조용히 시작됐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어머니는 별말 없이 식사를 하셨고, 아버지는 신문을 접고 석진을 향해 말을 꺼냈다.

 

 

“요즘, 회사 일 끝나고 어디를 그렇게 많이 싸돌아다니는 거냐.”

 

 

석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버지는 석진을 보지 않았다. 마치 이미 결론을 내려둔 사람처럼, 정면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내가 모를 것 같았나?”

“너는 우리 회사를 이을 후계자야.”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왜 행동을 조심하지 않지?”

 

 

어머니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 석진 쪽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식탁 위로 시선을 떨궜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대립이 아니라 균형이었다.

 

 

“요즘 기사 하나 나오는 게 얼마나 빠른지 알잖아.”
“일반인 여자, 사적 교류, 이미지 관리 실패—”
“이런 단어들 옆에 회사 이름이 붙으면 어쩔 생각이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석진은 수저를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숨을 고르고, 시선을 식탁 위에 둔 채 입을 열었다.

 

 

“기사요? 아직 난 적도 없는데요.”

 

 

아버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곧이어, 석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적 교류’가 문제라면,”
“저는 업무 외 시간에, 법적으로 문제 될 만한 행동은 한 적 없습니다.”

“회사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사적인 만남까지 통제받아야 한다면,”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기준은 너무 자의적이지 않습니까.”

 

 

그 순간, 아버지가 수저를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자의적? 지금 나한테 그걸 따지고 있나?!”

 

 

식탁 위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점점 더 삭막해지는 분위기에 조용히 있던 어머니가 급히 말했다.

 

 

“여보—”

“당신은 가만있어.”

 


어머니의 말림에도 아버지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끊었다.

 

 

“네가 뭘 알고 그 기준을 논해? 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리스크 하나가 어떤 손실로 이어지는지—”

“알죠, 제가 모를리 있겠습니까?”

 


석진이 아버지의 말을 낮게 끊어 말했다. 그 짧은 대답에,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석진의 행동에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더욱 높아졌다.

 

 

“알면서도 저러는 거면, 더 큰 문제지!”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정면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문제가 될 가능성과, 문제가 되지 않게 관리하는 건 다른 얘기입니다.”

“제가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걸 미리 잘라내는 게 관리야!”
“후계자라는 자리가 장식인 줄 아나!”

 

 

그는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 말하기 전에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 대화가 언젠가는 반드시 와야 할 순간이었고, 지금은 그저 예정된 시간을 맞이했을 뿐이라는 듯 담담했다

 

 

“그럼 더 분명히 말씀드리죠.”
“회사를 위해 제가 희생해야 할 건 감내합니다.”
“시간, 사생활, 평판까지도요.”

 

 

잠깐의 침묵. 석진은 한 박자 늦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관계를,”
“문제처럼 몰아가는 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놈이—!”

 


석진은 말을 끊지 않았다.
단호하게, 차분하게 이어갔다.

 

 

“그리고, 그 선을 넘으시면,”
“전 그땐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식탁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어느 쪽에서도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기는 팽팽하게 굳어 있었고, 접시 위의 음식은 그대로 식어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석진은 아버지를 다시 보지 않았다. 굳이 시선을 맞출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태도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과 기척을 무시한 채, 그는 조용히 식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