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1942년 5월 4일
“今.(자.)”
심문관이 일본어가 몇 자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아래에는 창씨개명 없이 결국 담백하게 적힌 수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진술의 내용이 적힐 것이라며 심문관은 통보했다. 종이의 옆에 때가 꼬질꼬질한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전등불이 비치는 곳에 얼핏 핏자국이 보였다. 바싹 마른 입에서 목소리가 나지막이 갈라져 나왔다. 자비 없는 폭행에 마디마다 시퍼렇게 멍든 관절이 욱신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심문관이 수빈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손에 깍지를 꼈다. 짧게 난 그의 수염은 어딘가 밉살스러운 그의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한몫했고 결코 큰 키는 아니었지만 남을 깔보는 눈에 권위주의가 여실히 드러났다. 오른쪽 가슴팍에 ‘노덕술’이라는 명찰이 보였다. 깔끔했다. 수빈과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조선인은 학습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조선인들은 학습능력이라는 게 없는 건가?)”
심문관이 비죽거리며 웃었다.
“수준을 낮게 하여 대한청년회에 관해서는 듣지 않을 것이다.
“……”
“大和君の協力で大韓青年会の会員たちは大体把握できるからね。 あ、彼が密告した人がお前のやつだったと思うが。(야마토 군의 협조로 대한청년회 회원들은 대략 파악 가능하니 말이야. 참, 그자가 밀고한 사람이 네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나는 대한청년회 회원이 아닙니다. (…저는 대대청년회 회원이 아닙니다.)”
덕술이 피식 웃더니 곧 칙칙한 방 안이 떠나가라 웃었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윙윙 울렸다. 정말이지 조선인들의 태세 전환이란 재미있군. 그가 말했다.
“태어난 시대에… 나는 단지 혼란에 빠져 노선을 바꿨을 뿐이다. 선량한 학생인 내가 그들과 묶여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부당하다…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수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껏 받았던 그 어떤 고문보다도 뼈저리게 자신을 덮쳐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눈에 눈물이 괴었다. 수빈이 결국 고개를 들었다. 심문관이 그를 비웃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렴, 불령선인은 날 때부터 불령선인이야. 자존심도 없나? 네까짓 조선인들은 수도 없이 보았다. 호기롭게 앞뒤도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가 불리해지니 결국엔 동지를 팔아먹는. 너도 그중 하나겠지. 역시나 조선인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친일이니 하는 그놈들하고 네놈하고 다를 바가 무엇이냐? 태평양 전쟁의 가미카제를 봐라. 청춘을 나라에 바치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의 해병대로 날아가 장렬히 전사하는 그 모습을-
“부끄럽고… 그렇습니다…(부끄러워서…그럽습니다…)”
“뭐야?(뭐?)”
“그들과... 동지들과 함께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빈이 말을 자르자 심문관이 불쾌한 듯이 낯빛을 찡그렸다. 조선인에 대한 그의 가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순간에 그것의 멸망을 부른 것은 수빈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이런 시대에 태어나…시를 부르짖고…시인을 갈망하고…별을 헤었다는 것이……미치도록…부끄러워서…. 사내로서 앞장서지는 못할망정…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저 태양을 좇는 달처럼 따르기만 했다는 사실이……그토록 부끄러워서….”
심문관은 책상을 탕 치더니 수빈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런 위선적인 것을 언제까지나 말할 수 있는지 지켜보자.(그딴 위선적인 소릴 언제까지고 지껄일 수 있는지 지켜보지.)”
수빈은 고개를 들고 심문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깃들어 있었다. 이 순간에 그의 부끄러움은 그의 긍지였다. 수빈은 저가 대한청년회를 대신하여 언제까지고 버티리라 다짐했다. 삶의 촛불이 꺼져버리는 순간에도 결코 하늘의 아래에서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초라한 몸뚱아리에 축복처럼 어떤 힘이 샘솟았다. 알 수 없는 그 힘에 다만 순종할 뿐이었다. 심문관은 수빈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수빈은 그에 짤막하게 답했다. 대답의 길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덕술은 매질을 했던 자리를 다시 때리며 그를 조롱했다. 곧 온몸이 빨갛다 못해 푸르게 멍이 들자 심문관은 제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물었다.
"체스빈. (최수빈.)"
“……”
“후쿠오카에 가본 적 있나?(후쿠오카에 가 본 적은 있나?)”
_1942년 5월 15일
다른 수감자들과 한데로 묶인 채 배를 타고 도착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여느 감옥이 그렇듯이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감자들을 일렬로 세우고 인원수를 검사한 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그들을 차례로 들여보냈다. 수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경성 형무소와 마찬가지로 비명이 가득한 지옥의 아가리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갔다.
“…어?”
그간의 수감표가 벽 한쪽에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수빈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굳고 짙은 눈썹, 일자로 다문 강인한 입술. 기꺼이 개가 된, 조선만 아니었어도 맹수가 되었을 풍모의 사내. 반갑고도 서러운 마음에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헌병이 그의 등을 거칠게 떠밀며 어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도달한 곳은 독방이었다. 수감번호를 받고 나니 총책임자가 수감자들을 모두 형무소 앞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인파에 떠밀려 수빈은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들은 간단히 설명했다. 여기에서 작은 실험을 할 것이라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짧은 집합이 끝난 뒤 수감자들은 다시 짐승처럼 독방으로 끌려갔다.
_1942년 5월 27일
어머니 살려주세요. 여기는 지옥입니다. 첫날 그들은 우리를 모두 하나씩 가두어 두고서 수학 문제를 풀게 시켰습니다. 1+1 같은 것들이요. 그것을 온종일 하였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휴식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한 명씩 데려가 이상한 주사를 놓았습니다. 저도 그 주사를 맞았습니다. 아 어머니, 그 다음 날부터 머리가 둘로 찢어질 듯이 아프고 열이 납니다. 온몸이 달아오르고 기력이 없습니다. 이따금씩 주사 맞은 자리가 아파오면 하루를 꼬박 앓아야 했습니다. 모두들 이 ‘작은 실험’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우리 중 누군가가 피를 토하며 끌려갔을 때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여기는 지옥입니다. 우리는 마치 실험쥐처럼 하나씩 하나씩 주사를 맞습니다. 우리의 팔에는 주삿바늘에 찔린 자국과 멍 자국이 하루가 멀다고 늘어납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주사가 무엇이냐 물은 한 수감자는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뒤를 따를 용기가 아직도 제게는 없어 그저 몹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러내는데도 불구하고 밥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서 우리는 마치 개라도 된 듯이 우리의 오물이 묻은 멍석의 지푸라기를 씹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울음이 섞인 만세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저도 함께 그것을 씹다가 어머니께서 해 주셨던 장국이 생각나 그만…….
어머니 제가 진정 미쳐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제 문제를 풀 적에는 2+3이 되질 않아 멍든 손으로 손가락셈을 해야 했습니다. 비참한 기분에 저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놓고야 말았습니다. 어머니 무섭습니다. 형이 보고 싶고 동지들이 보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 간청하고픈 마음뿐입니다. 이 지옥에서 살아서 나가기만 한다면 나는 하느님께 온 마음 바쳐 살아갈 텐데. 그러니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그 새 무명옷에서 하얀 수의를 보았습니다.
어머니 오늘도 그 주사를 맞았습니다. 이를 쓰는 지금도 열이 나고 온몸이 홧홧하게 불타오르는 듯 합니다. 그 따스한 품속이 그립습니다. 하루하루를 어머니와 가족과 동지들과 별을 그리며 간신히 살아갑니다. 언젠가 해방된 대한에서 그렇게 뵐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제가 갇혀 있는 여기 후쿠오카에서는 날이 너무나도 덥습니다. 벌써 누구 하나가 일사병에 걸린 것인지 주검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어머니 부디 여름옷을 일찍 꺼내는 것을 잊지 마시고 얼음과 메밀과 미역을 사두는 것을 잊지 마시고 끼니와 잠을 거르지 마시며 무엇보다도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바라건대 어린 아들의 투정일랑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시고 훌훌 털어내주십시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아 어머니! 아 어머니…….
_1942년 날짜 미상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에서 잘못됐어!(뭐가 문제인 거지?
누군가가 핏대 세워 소리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것은 한여름밤의 풀벌레 소리처럼 윙윙 울렸다가 아득하게 사라졌다. 어떤 투명한 커튼이 쳐진 듯이 흐린 시야에 수빈은 자신이 더는 예전과 같은 젊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전부 폐기 처분해 버려.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수빈은 고통에 겨운 숨을 헐떡였다. 몸에서는 열감이 느껴졌고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것이 마치 종말을 세상이 되어 느끼고 있는 기분이었다. 코에서는 코피가 흘러나왔다. 먹은 것이 없는 뱃속은 무엇이 마뜩잖은지 피가 섞인 위액을 게워내었다. 그는 서서히 죽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끊어지는 숨으로 알 수 있었다. 숨이 가파르게 넘어가는 소리가 독방 속의 유일한 소리였다. 벽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던 수빈은 끝내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별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떠 있었다. 별을 동경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했던 시인은 별빛 속에 싸였다. 수도 없이 많은 초여름 은근한 빛들은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덮듯이 그들이 가장 아꼈던 별을 안아올렸다. 북간도의 풀벌레 소리는 눈을 감으면 후쿠오카에서도 들려왔다. 독방의 문이 열려 군인들의 말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온통 뒤섞였다. 이미 죽은 걸까? 딱 보면 모르겠나? 이미 죽은 거야. 확실해. 뭐, 총알을 아끼니 우리야 좋지. 수빈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같이 떨리는 손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돌려 단조로운 나무 천장을,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머리에 겨눠진 차가운 감촉에 짧은 심상은 끝이 났다. 도둑맞은 청춘의 죽음이었다. 독립을 그리며 마침내 마지막 시를 들릴락 말락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북간도의 풀벌레 소리와 함께 들린 것은, 아스라이 먼 총성이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