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1942년 4월 29일
수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칼을 찬 헌병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 뒤 학생들의 출석부를 보았다. 연희전문학교는 일본인이 세운 학교가 아닌 탓에 총독부가 경계하고 있는 학교 중 하나였다. 갑작스레 들어온 헌병에 다들 놀라 수군거렸다. 출석부를 꼼꼼히 보던 헌병은 탕하는 소리와 함께 출석부를 교탁에 내던졌다. 수빈은 탄식을 내뱉었다. 창씨개명을 확인하러 왔구나. 수업을 하던 교수가 놀라 움찔거렸다.
“どうして創氏改名をしていない生徒が教室にいるの?(어째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학생이 교실에 있는 거지?)”
모두들 직감적으로 그 학생을 알아차렸다. 헌병이 교실을 향해 호령했다.
“최수빈!(최수빈!)”
“네.(네.)”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병은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거만한 그의 태도에 모두들 분노가 끓어올랐으나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었다.
“来い. (와라.)”
수빈이 교실의 맨 앞으로 나가 헌병의 바로 앞에 섰다.
“創氏改名をしなかった理由は何か?(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일본,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 일본말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헌병이 수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자 헌병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치켜들어 등과 다리를 여러 번 때렸다. 교실 앞에서 자행되는 매질에 다들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거나 고개를 돌려 피했다. 헌병의 등장으로 교탁 뒤로 물러서 있던 교수가 헌병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또다시 몽둥이를 치켜올리는 헌병의 손목을 붙잡고 그 앞을 막아선 교수가 소리쳤다.
“무엇을 하고 있나요? 갑자기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을 치는다니!(뭐 하는 짓입니까? 갑작스레 교실에 들어와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은 퇴학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그만하세요!”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그리고 교수의 옆으로 가 똑같이 헌병을 막아섰다. 그래요! 교실 한쪽에서 또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일어나 헌병의 앞을 막아섰다. 곧 모든 학생들이 일어나 헌병의 앞에 서고 뒤에서는 수빈을 부축해 일으켰다. 모두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헌병을 쳐다보았다. 개중에는 몰래 주먹을 쥐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조센진들이···. (조센징들이 감히...)”
맞고 싶어? 헌병이 몽둥이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모두들 움찔하면서도 꿋꿋이 헌병을 노려보았다. 헌병은 다른 학생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수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あの学生が一週間以内に創氏改名をしなければ教室全体に不利益があるだろう。 教授、あなたにも。(저 학생이 일주일 내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교실 전체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다. 교수 당신에게도.)”
헌병이 나가자마자 꽉 막힌 숨들이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시간이 영겁 같았다. 더러는 여린 마음에 눈물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교수는 낙망의 시대를 사는 청춘들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수빈은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와 기지로 향했다.
_1942년 4월 29일
종로 거리를 걷는 동안 비가 내렸다. 비 때문에 온갖 가게들이 문을 닫는 통에 윤기와 정국은 비에 젖은 생쥐꼴로 신문사 안으로 들어섰다. 아담하고 소박한 신문사 안에는 잉크를 가득 담은 통 여러개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꽂이가 한쪽 면을 메우고 있었다.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문과 가장 멀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몇 없는 전등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나, 원. 회선 동지도 살림이 어렵게 됐구나. 윤기가 혀를 쯧쯧 찼다. 신문의 원본을 보관하는 궤가 책꽂이 근처에 놓여 있었는데 은근히 높이가 낮았다. 다소 초라한 책상이 놓인 바로 그 앞, 신문사의 정중앙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인쇄기가 바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윤기가 인쇄가 끝난 신문 한 부를 집어 들었다. 한글이 큼지막하게 쓰인 신문은 보기에 썩 훌륭하였다. 정국은 이미 난로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손을 데우고 있었다. 아니 가만. 윤기는 난로를 빙자한 불구덩이에서 타고 있는 일본어 신문을 발견했다. 불쏘시개로 뒤적여 그것들을 숨긴 윤기는 허 - 하고 웃었다. 경성이라 난로도 따시다며 정국이 좋아했다. 경성이 그래 좋아? 만주보다? 윤기가 부러 유치하게 물었다. 정국은 머쓱하게 웃으며 나고 자란 곳보다 더하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5시가 되어 만주 사람 둘의 몸이 노곤하게 데워질 무렵, 그래서 정국이 윤기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폭풍과 같은 천둥 소리를 몰고 누군가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다 쉰 것 같은 거친 목소리가 천둥 사이로 들렸다. 윤기가 반사적으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 들어온 출입자를 확인하고 총을 내렸다.
“회선 동지.”
“이렇게 서신도 없이 방문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태현의 목소리가 제법 무뚝뚝했다. 잠이 깬 정국이 비몽사몽 한 채로 일어났다. 태현이 정국을 힐끗 바라보았다. 윤기 또한 제 뒤의 정국을 바라보았다.
“단원들과 상의할 것이 있어서.”
“아직 모일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곧 모일 시각이니, 식사라도 하며 기다리시지요.”
“그럼 신세 좀 지겠소.”
비에 흠뻑 젖은 코트를 옷걸이에 건 태현은 층계를 올라가 식사를 차렸다.
“아 경성은 밥맛도 다르네요!”
제법 맛이 훌륭한 식사를 몇 술 뜨니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윤기와 정국을 보자 예상치 못한 손님인듯 잠시 멈칫 하더니 곧 각자의 자리에 가 앉았다. 지민은 늘 그러했듯 창가 자리에 앉았다. 태형이 지민의 옆에 붙어 앉아 총을 만지작거렸다. 그들을 시작으로 범규, 카이, 석진이 차례로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남준과 수빈이 각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앉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짧은 담소를 나눈 후에 태현이 방의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동지.”
태현이 손깍지를 끼고 윤기 쪽을 응시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윤기와 정국 쪽으로 집중되었다.
“급히 돌아가야 하니 본론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성에 정국일 놓고 가려 합니다.
무덤덤하게 뱉어진 그의 말에 모든 단원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 당사자인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지민이 입을 열려는 찰나, 윤기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압니다. 염치없는 거.”
“대장님, 이건!”
“넌 조용히 해.”
벌써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카이가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다가 곧 다물었다. 독립군 대장에게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비장함이 보인 탓이었다. 윤기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것은 정국을 위한 일이었다. 능숙한 아이인 것은 맞으나 그 실력이 어찌 되었든 윤기는 전투 속으로 정국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제가 나라를 집어삼킨 마당에 위험한 곳이 없겠느냐마는 눈앞에 닥친 위험에서 떨어뜨려 보자 하는 것이 윤기의 심정이었다. 이토록 조급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윤기는 입을 다물고서 태현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침묵을 깨고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모든 시선이 태현에게로 집중되었다.
“전 동지도 우리 단원이니 살뜰히 보살필 것을 약속드립니다. 마침 신문사 근처 여관에 방이 하나 남는다 하는데, 그곳에서 머무름이 어떨련지요.”
“고맙소, 동지. 그러하도록 하지.”
내심 거절당할까 두려웠는지 윤기의 얼굴이 한층 풀어졌다.
“식비나 하숙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예산 내에서 최대한 지불하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회선 동지. 이 호의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국은 그동안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의 눈망울에는 어떤 간절함이 드러났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하였다. 곧 정국이 고개를 숙였다. 문득 앞자리가 2를 넘지 못하는 제 나이가 밉게 느껴졌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손톱을 괴롭혔다.
“다만, 설명하실 것이 있을 듯합니다.”
태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윤기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말입니다.”
__1942년 4월 29일
“죄인 최영준 호출이다.(죄인 최연준 호출이다.)”
다른 헌병이 와 연준을 우악스럽게 일으켰다. 사람인지 갓 도축된 고깃덩어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피에 절여진 채로 연준은 재판정에 섰다. 그에게 변호사는 없었고, 일본인 검사와 일본인 판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누구보다 여유로웠다.
“지금부터 죄인 최영준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 (지금부터 죄인 최연준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다.)”
판사가 법봉을 세번 내리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는 시민 엔도 타다요시를 그의 집에서 살해하려고 현장 검거되었습니다. (피고는 시민 엔도 타다요시를 그의 자택에서 살해하려고 한다
검사가 입을 열었다.
“그가 당시 가지고 있던 총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그가 당시 들고 있던 총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검사가 혈흔이 남은 장총을 판사에게 내밀었다. 판사는 그것을 꼼꼼히 보는 척 하더니 자기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피고, 변론은 있는가? (피고. 변론 있는가?)”
연준이 픽 웃었다.
“글쎄. 내가 옥살이하는 꼴 보고 싶으면 임정으로 보내던가.”
“피고. 자국의 언어를 쓸 것을 요구한다!(피고. 자국의 언어를 쓰기를 요구한다!)”
판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참혹한 것은.(해서간 성질머리 급하는 것은.)”
“피고, 빨리 변론하라!(피고, 어서 변론하라!)”
“변론할 생각 없는데. 내가 뭐라 지껄이든 이미 다 정해진 수순 아닌가.”
“왜 그렇게 불편한!(어찌 그렇게 불손한!)”
검사가 벌떡 일어나자 판사가 그를 제지했다.
“변론하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변론하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양이들 속담이 있는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해서 나는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대한의 사내로서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 너희가 얼마나 찌르고 매질하고 지져버리든지 이젠 내 알 바가 아니지. 그것은 내게 즐거움이 될 것이고, 더없는 쾌락이 될 테니 말이야.”
“피고 최영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피고 최연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법봉의 소리가 재판정 가득 울려 퍼졌다. 연준은 살짝 웃었다. 잠깐.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판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총독의 서신을 가져온 헌병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고 최영준의 무죄를 보증한다. 성총독인 (피고 최연준의 무죄를 보증한다. 마코토 총독인.)”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연준은 제 손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가 총독에게까지 가서 사형수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연준은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엔도 야마토. 그 익숙한 이름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한창 시끄러운 법정을 홀린 듯이 나와 형무소 벽에 기대었다.
익숙한 고통에 몇 번 손이 미끄러진 후에서야 시가를 한 대 머금었다. 곧 얼굴들이 보였다. 태형, 정국, 윤기, 남준, 카이, 지민, 태현….
“괜찮으십니까?! 엔도 야마토라는 자가 당신의 무죄를 간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태현이 연준을 얼싸안았다. 윤기 또한 성큼 걸어와 연준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정국은 카이와 두 손을 맞잡고 “무죄라네! 무죄라네! 무죄라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약점을 잡혔군. 혹 원한다면 지금 그 야마토라는 자의 잘난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는데.”
태형이 확연한 살기를 띤 채로 말했다. 지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당장이라도 엔도 가로 뛰어갈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연준이 담배를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최범규 동지. 그가 엔도 야마토요. 엔도 가의 장남이 우리 편이라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태현의 말을 기점으로 침묵이 흘렀다.
“아. 진즉 말해주지 않은 것은 미안해. 허나-”
“…애초에 다 알고 있었으면서 한마디 언질도 주지 않았군요.”
태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차 싶었다. 연준은 달래듯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 같은 모습을 보일까 염려한 것 아니겠어?”
“그것 참 고맙군요. 그래, 단체의 안전보다 그 사람이 더 중요했던 겁니까?”
“도대체 그대는 뭐가 문제야? 왜 그를 못 쫓아내서 안달인건데.”
“그가 어디 믿을만한 사람이더이까? 독립운동을 하겠다면서 일본말이나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합니다! 동지는-”
“신임을 줄 기회조차 주지 않았는데 뭘 기대하는거야? 그리고 범규가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Stop it! 카이가 말을 잘랐다. There’s nothing we can do if we just stand here and fight. 맞아요! 정국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그들을 쳐다보았다. 윤기가 입을 열었다.
“너 영어 할 줄 모르잖아.”
아 대장님! 정국이 바락 소리를 쳤다. 그때 총독부 건물에서 일본군들이 여럿 빠져나갔다. 다들 그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불안하게 황색 군복을 따라갔다. 마침내 그것의 윤곽이 미라보 호텔로 향하자 모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음박질을 했다. 그 안에 한반도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기지 지도와 소속자 명단이 있었다. 그 안에 친일 인사 암살 계획서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안에는 수빈이 남아 있었다. 다급한 가슴을 움켜쥐고 미라보 호텔에 도착했다. 기지가 있는 곳으로 시꺼멓게 불에 그을린 흔적이 생겼다. 잠깐. 최범규 동지는 어디 있지? 윤기의 말에 남준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곧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하늘도 무심하지. 참 무심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