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1942년 4월 30일
“이제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
“동지라 부르자니 가증스럽고, 이름을 부르자니 친분이 없고.”
“…”
“내 이래서 당신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태현이 말했다. 그의 눈은 확연한 경멸과 어쩌면 명백한 살의를 띄고 있었다. 범규는 초점 없는 눈으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태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우리가 그리도 오합지졸로 보였습니까?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이 그리 당당하게 거짓을 늘어놓아도 의심따위 하지 않을 것 같았나요? 그렇게 계속해서 낯빛 하나 안 바뀌고 모두 숨겼군요. 당신 눈에는 우리가 어찌나 우스워 보였을지….”
태현이 실소를 내뱉었다. 겨우 1년이라지만 어쨌든 믿었다. 임무에 보내줄 정도로 신임하진 않았으나 은연중에 믿었다. 역시 일본의 태에서 난 것은 믿으면 안 되는 것이었나. 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사람을 믿었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중에도 이제껏 덮어놓았던 사소한 결점까지 상기하고 있는 것이 추잡스러웠다. 한심하고 우스웠다. 이리 원망할 것이라면 애초에 믿지 않았으면 될 것을. 순간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허상처럼 보였다. 동지들이 언제라도 제게 친일하는 아버지가 있다며 떠나갈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지? 태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는 범규를 노려보았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 모습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힘이 빠졌다. 불신의 시대요, 고발의 시대였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던 것 아니었나. 태현은 범규의 팔을 움켜잡았다. 목소리만큼이나 손이 떨렸다. 그를 마구 흔들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말해 보십시오.”
뭐라 변명이라도 해달란 말입니다! 태현이 소리쳤다. 그는 빌고 있었다. 제발 무어라 변명하기를 빌고 있었다. 독립에 대한 마음도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태극기에 인주를 찍으면서 대한의 독립을 위해 그 어떠한 고통도 마다치 않겠다던 그 말도, 눈빛도, 목소리도 모두 꾸며낸 것이었냔 말입니다. 나를 상대로, 아니. 대한을 상대로 그리 연기 한 것인가요. 난 믿었습니다. 비록 미덥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독립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어요. 혹여 내가 당신에게 너무 박하게 굴었던 겁니까? 내가 그렇게 다그치고 힐난해서 더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가요.
“일본이 밉습니다.”
“…”
“그 일본의 태에서 나고 자란 당신도 사무치게 증오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이 어떤 액체로 반짝였다.
“당신이 뭔데 목숨을 저울질해? 당신이 뭔데 한 사람 살리겠답시고 천 명을 죽여! 우리 기지에 있던 그 자료들, 그걸 지키느라 최 동지 같은, 그런 아까운 목숨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알아? 당신이 뭐라고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를 결정해? 조선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당신이 도대체 뭔데!”
벌벌 떨면서 감정은 더욱 격앙되어갔다. 태현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멈추어야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이 간신히 떨리는 몸을 멈추었다. 처벌은 차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현의 목소리가 거리에 내려앉았다. 결정한다 하나 사실 그것은 마지막 호의임에 틀림없었다. 제 10항. 단체를 배반한 자는 죽음으로써 단죄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규칙이었다. 따라서 범규 또한 무릎을 꿇으며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태현은 목을 죄어오는 생경한 느낌을 뿌리치고서 먼저 걸어갔다. 범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폐쇄된 호텔의 유리창에 지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멋스럽게 기른 머리, 티끌 한 톨 없는 양장. 부티가 나도록 내려와 있는 금색 줄의 시계…영락없는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그 길로 집으로 달음박질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서는 모든 것을 게워내려고 애를 썼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자 쓴 물이 나왔다. 허나 그것으로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을 한껏 머금었다가 뱉어내고 미친 듯이 온몸을 씻어내렸다. 새하얀 피부가 빨개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또다시 변기로 가 머리를 처박고 목구멍을 헤집었다. 눈을 까뒤집을 정도로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양잿물을 들이마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어, 자신이 원치 않는 자신의 언어를 게워내고 싶었다. 기름처럼 자신을 뒤덮은 일제의 흔적을 지워내고 싶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일본인의 모습일 수가. 욕실에서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충동적으로 뜨거운 물을 온몸에 뒤집어 썼을 때 날갯죽지에 새긴 까만 새 문신이 드러났다. 범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 살을 도려내고 싶었다. 이 문양은 그에게 너무 과분했다. 가까이에 있는 면도칼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그 날카로운 물건을 날개뼈 부근에 박아넣자 악 하는 비명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까무러쳤다.
난 조선을 언제나 흠모해 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무척이나 부끄러워하셨지만요. 갓난아이일 때부터 유모를 붙여 타국에서 키우면서 정작 내 부모님이라는 사람들은 단 한번도 나를 보러 와 준 적이 없었습니다. 유모는 어린 날 달래려 부모님께서 조선에서 날 위한 온갖 좋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시다 했죠. 그래서 발도 디뎌본 적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내게 환상 속의 나라나 다름없었습니다. 전기가 통하고 일본 사람들이며 미국 사람들이며 저 멀리 스페인 사람들까지 없는 사람들이 없고 그렇게 활기차게 북적이는 곳. 허깨비일까 두려워하면서도 난 성년이 되기까지 그렇게 매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신정이 되고 아버지로부터 조선에 오라는 편지가 오더군요. 그 길로 가장 빠른 열차를 타고 가장 빠른 배를 타서 조선으로 왔습니다. 어차피 일본에서 도망치고 싶었기도 하고요. 조선의 땅에 발을 디디고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나왔다는 하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행인들더러 길을 비키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난 내가 꼭 왕이 된 것만 같았어요. 그 철없는 생각은 어느 남자에 의해 깨졌습니다. 내 이름, 그 지긋지긋한 엔도 야마토라는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그 남자가 내 멱살을 잡고 이리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비가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새끼.”
_1942년 5월 1일
경매장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일본인들이 가득한 그곳은 꽤나 세련된 연회장이었다. 그러나 곧 경매의 주최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석진도 예의상 박수를 보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그 남자는 조선인인데 곧 아메리카로 이민하게 되어 저가 가진 귀중품을 모두 처분한다 하였다. 그 와중에 돈은 챙기고 싶었는지 이리 경매를 연 것이다. 시답잖은 물건들이 올라왔고 석진은 차분히 물건들을 보며 낙찰이 되면 조용히 박수를 치고 올라가는 가격들을 보며 남몰래 코웃음을 쳤다. 생각보다 적은 양을 판 주최자는 마음이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즉시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 새로운 물건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경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참았다. 석진의 눈이 총기로 빛났다. 그는 자신의 패를 쥐고 주최자가
“마지막 물건입니다. 시작은 천원으로 합시다.(마지막 물건입니다. 시작은 천원으로 하지요.)”
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다시금 올라온 물건을 확인했다. 그것은 청자로, 학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상감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도자기였다. 석진은 홀로 중얼거렸다.
“청자 운학문 상감 매병…”
한 남자가 이천 원이라 소리쳤다. 배로 오른 가격에 대부분이 입맛을 다셨고 손이 큰 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패를 만지작거렸다.
“ 4천원.(사천원.)”
“4천3백원!(사천 삼백원!)”
“오천칠백원!(오천 칠백원!)”
“ 만원!(만원!)”
만원을 외친 일본인이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바라보았다. 옷차림을 보아 총독부 사람 같았다. 석진은 실소를 내뱉었다. 유학을 갔었던 미국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의 말이 기억났다.
조선은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친구여, 역사적으로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지배당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돌아가면 일본은 조선의 유물을 최대한 많이 훔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을 통치하는 데 정당한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네. 역사상 문화적 수준이 더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게 영원히 지배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가 조선으로 귀국하고 나면 일본은 우리 문화재를 눈독 들일걸세. 그것이 조선 지배의 합당한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
더 이상의 가격이 나오지 않았다. 주최자는 참석자들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석진은 자신의 패를 높이 들어올렸다.
“ 2만원.(이만 원.)”
만원을 외친 남자가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주최자 또한 턱이 바닥에 닿을 기세로 입을 쩍 벌렸다. 마침내 숨막히는 침묵이 끝나고서 주최자가 입을 열었다.
“낙찰입니다. (낙찰입니다.) "
미쳤군, 미쳤어! 어떻게 저 따위 도자기에 기와집 스무 채 가격을…! 눈앞에서 도자기를 놓친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석진은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석진을 발견한 그 남자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인심을 쓴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의 2배의 가격을 줄게. 나한테 건네줘.
석진은 싱긋 웃었다.
“이것보다 더 뛰어난 자기를 가져온다면 내 그대에게 넘기도록 하겠소이다. 걱정해주어 고맙소. 허나 그대 앞에 선 자는 경성 제일의 갑부라 말이오.”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를 뒤로하고 석진은 제집으로 향했다. 비단 보자기로 몇 겹을 싸서 소중히 들고 온 도자기를 궤에 넣어두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도련님이 요즈음 밤마다 어딘가로 가시더니 이젠 옛날 도자기 한 점을 사왔다는 이야기가 하인들 사이 떠돌아다녔다. 석진은 평소처럼 하인들에게 사람 좋게 웃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으로 석진을 쳐다보았다.
“고생이 많소.”
석진이 말했다. 기지를 옮기기 위해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모아 상자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 상자들은 카이의 조그마한 교실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쌓인 상자들 중에 ‘말모이’ 라고 적힌 상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카이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자들 때문에 사내 둘이 서 있기에도 자리가 어정쩡 했다.
“If he…really betrayed everyone…(만일 그가…정말 모두를 배신한 것이라면…)”
“There’s no time to feel sorrow of betrayal. (배신에 아파할 시간이 없소.)”
석진이 종잇장을 내밀었다. 카이는 종잇장에 적힌 보낸 이와 받는 이를 살폈다. 만주로 카는 것이군요. 카이가 말했다.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We will leave at midnight. I’ll meet you at the platform 6-3. (자정에 떠날거요. 6-3 승강장에서 만납시다.)”
“Aren’t you angry? (화나지 않아요?)”
카이의 작은 교실을 나서던 석진은 잠시 멈춰섰다. I mean…we are not used to betrayal. 카이가 덧붙였다. 석진은 문고리를 꽉 움켜잡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 어느 액체로 반짝였다. 석진은 카이 쪽을 노려보았다.
“내 어디 화나지 않는 곳이 있겠소. 지금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내 껍데기만이 살아 입을 나불거리고 있소. 배신에 익숙하지 않다고? 그럼 도대체 몇 번을 놀아나야 익숙해지는거지? 두 번? 아니, 다섯 번? 어쩌면 열 번인가? 그 영악한 개자식한테!”
석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힘이 쭉 빠졌다. 배신이라. 그만큼 야속한 단어가 있을까. 석진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대한은 그들을 뼈아픈 고통 속에 몸부림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_1942년 3월 1일
태현은 인쇄기에 잉크를 넣었다. 인쇄기는 노쇠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김없이 셔츠에는 잉크 자국들이 나타났다. 총 여덟 쪽으로 된 신문에는 어김없이 한글이 쓰여 있었다. 신문을 상자에 나누어 담은 후 태현은 책상 앞에 앉았다. 새로 산 빳빳한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만년필을 든 태현은 북받치는 마음으로 펜촉에 모든 것을 담아 한 글자씩 써나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그의 손놀림은 더욱 더 빨라졌다. 펜촉에 모든 것을 거는 마음으로, 마치 폭탄을 가슴에 품은 듯 한 획씩 써 내려간 글자는 담담하게 원고지에 수 놓였다. 뒤에서 문이 열렸다. 태현은 원고지를 뒤엎으며 벌떡 일어났다.
“…시 써요?”
수빈이었다. 태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하니까.”
좀 봐도 돼요? 수빈이 물었다. 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쑥스러웠으나 이미 수빈은 원고지를 들어 읽고 있었다.
눈이 나려 나를 덮으면 그 밤에는 오시려나
마른 가지 희스무레하게 꽃눈이 맺혀오면
저문 유월 임의 품에서 이향(異香)에 취했거늘
된 비 세차게 내리고 씻겨도 차마
떨치지 못하노라
오라, 아득히 멀리 멎어버린 임의 향기여
부옇게 번지는 꽃무더기 헤치며 울어보노라
가라, 내게서 짙게 배어버린 임의 온기여
떠나시던 임의 옷깃에 엉겨 매달려 볼 것을
아니 오실 임을 애써 기다려 무엇 하랴
밑가지 채 꺾어 버려도
향기가 먼저 마중 가는데
아니 오실 임을 자꾸 새겨서 무엇 할까
이 생에 살아서 못 만난 들 어떠리
이 생에 살아서 못 만난 들
사랑했으매
어쩌면 너무나 숨겨져 있고 어쩌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오랫동안 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수빈은 마침내 종이를 내려놓았다. 시의 여운이 그들을 뒤덮었을 때는 이미 나린 눈에 반쯤 덮여버린 후였다.
내 오랜 로망을 실현시킬 때가 왔다.
나 완결 기념 QnA하고 싶다.
사실 다들 많이 안 해주실 것 같아서 4화 일찍 씀.
이 인간은 4화 전부터 설레발을 치네 하실 수도 있는데
맞아요 정답임.
